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총 (문단 편집) === 위력 === [[파일:external/oktoshi2004.blog.so-net.ne.jp/3339866.jpg|width=400]] 대조총을 발사하다 실수한 모습.[[http://oktoshi2004.blog.so-net.ne.jp/2006-05-06|#]] 크기와 들어가는 화약의 양만큼 반동도 강해 일어난 일이다. 특히 대조총은 말이 총이지 실제로는 [[핸드 캐논]] 수준이다. > 열넷째는 조총(鳥銃)을 주조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장기는 오직 조총 한 가지뿐입니다. 가장 만전을 기할 수 있고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하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제압하니 전구(戰具) 중에 웅맹한 것으로서 적을 물리치는 묘용이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십오(什伍)로 하여금 모두 나아오게 하여 천만 개를 일제히 발사하도록 하면 연기가 적의 보루에 가득 차고 소리는 적의 담을 흔들 것이며 범하는 자는 즉시 부딪치고 부딪친 것은 곧 부서져 버립니다. 지혜는 교묘함을 믿지 않고 용맹은 힘을 믿지 않고 강함은 무리를 믿지 않고 악은 사나움을 믿지 않는 것이니 실로 만 번 승리할 기구요 한 사람을 대적할 것이 아니므로 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이것이고 우리가 의지할 것도 이것입니다. > ----- > - 인조 15년 정축(1637) 12월 25일(기미) 장단 생원 최욱의 상소 > 왜의 장기는 조총(鳥銃)에 있으니, 우리 화살을 쏘는 곳에는 투구와 갑옷으로 피할 수 있지마는 조총을 쏘는 곳에는 군사와 말이 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등패(藤牌)가 있으면 이미 몸을 가릴 수 있고 또 말도 가릴 수 있으니 등갑(藤甲)과 조총을 속히 준비해야 합니다. > ----- > -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임진년 하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 또 기계(器械)에 관한 일로 말씀드리면, 우리 나라의 궁시(弓矢)는 본디 조총(鳥銃)에 대적하기 어렵거니와, 야전(野戰)에서 그러할 뿐만이 아니라 적의 보루를 쳐부술 때에도 궁시로는 하기 어려운 것이 참으로 성교(聖敎)에서 이르신 바와 같습니다. 오직 화기(火器)를 많이 갖춘 뒤에야 견고한 보루를 칠 때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 ----- > - 선조 26년 계사(1593) 윤 11월 28일(무신) > “우리 나라의 군기 가운데 궁시(弓矢)ㆍ간척(干戚)ㆍ창검(鎗劍)ㆍ총포(銃砲) 중 어떤 것이 가장 긴요한 것인가? >하니, 서영보가 말하기를, >“〈천지가〉 개벽(開闢)한 후에 곧 궁시(弓矢)가 있었으므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호시(弧矢)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부족한 것은 음습(陰濕)할 때 조화를 운용할 수 없고, 또 그것이 명중시키는 것이 2, 3백 보(步)에 지나지 않으므로, 적이 가까워진 후에야 비로소 편전(片箭)을 쏘게 되는데, 재빠르고 굳세고 멀리 쏘아야만 가장 군중(軍中)의 정교한 기술로 여겼으나 모두 조총(鳥銃)에 뒤지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총포의 제도는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갑옷을 뚫고 뼈를 꿰뚫어 사람이 확실하게 죽지 않음이 없으니, 이른바 총포가 나오면서 명장(名將)이 없었다는 말은 과연 믿을 만하다.” > ----- > - 순조 8년 무진(1808) 8월 1일(갑오) 일반 조총 기준으로 유효 사거리가 약 50m, 최대 사거리는 500m ~ 700m. 살상력을 기대할수 있는 거리는 200m. 하지만 조총은 동아시아에서 100년 ~ 200여년에 걸친 화승총 전반을 이르는 호칭이므로, 사거리와 위력은 시대에 따라서 다르다는 점을 알아두자. 가령 [[임진왜란]] 때 왜군이 사용한 조총은 실질적인 살상거리가 40m ~ 50m, 유효 타격거리가 70m ~ 80m 이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승자총통]]에 비하면 2배 ~ 3배 이상 긴 사거리였으므로 매우 강력했다. 이후에는 조선군에서도 장조총, [[천보총]]과 같은 자체적인 신형 조총을 만들면서 살상 거리와 비거리가 본 문서에 기재된 성능, 혹은 그 이상으로 점점 늘어난다. 내부에 [[강선]]이 없는데다 탄자 형태가 동그란 구형이어서, 공기 역학적으로 좋은 성능을 발휘하기 힘들어 명중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다만 이건 활이 미친듯이 발전한 동아시아에서 단점이라고 하는 정도지, [[장궁]]병을 집단 운용해서 화망을 만들어 적을 사살하던 유럽에서는 오히려 엄청난 장점이었다. 활은 능숙하게 다루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리지만 총은 장전할 줄만 알면 쏠 수 있는 덕분에 활에 비해 숙달되는 기간이 매우 짧아 빠른 병력 양성이 가능했다. 또한 기본적으로 높은 운동 에너지를 가지므로 살상력과 갑옷 관통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점이 있다. 조총은 쏘면 갑옷 자체를 뭉개버리면서 상대를 죽이는데 반해, 활로 갑옷 뚫으려면 '''110파운드''' 급 장궁을 사용하던 영국 정도는 되어야 했다. 게다가 그 갑옷이 14세기, 15세기의 판금 갑옷이라면, 100파운드 대의 장력을 가진 장궁도 뚫을 확률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정도이다. 위력은 화기답게 매우 강하여 [[석궁]] 계열보다 강력했다. 특히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한 덕분에 2000J이 넘는 운동 에너지를 이용하여, 납탄으로도 50미터 가까운 거리에서도 갑옷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다만 조선에서의 경우에는 다른 국가에 비해 활에다가 화약 뭉치를 붙여서 발사해 화살이 박히는 순간 폭발하게 하거나, 화살에 독을 발라 놓는 등 화살 자체의 살상력을 높이는 노력을 조선 초부터 꾸준히 해왔다. 때문에 다른 국가에 비해 오랫동안 활과 총이 병용 가능했다.] 다만 조총의 가장 큰 의의는 그 위력이 아니라, 기존에 갑주를 관통하는데 사용되었던 화약 무기들이 마침내 개인 화기로서 운용이 가능해졌다는 데 있다. 서양에서 화승총이 전래되기 이전에도 동아시아에는 충분히 갑주를 관통할만한 개인화기가 있었지만, 지나치게 불편한 중화기 형태이거나 집단으로 운용하여 파편 충격을 주는 형식의 원시적인 소형 화기 밖에 없었다. 조총의 위력은 단순히 화력이 강력한 점이 아니라, 중거리 보병끼리의 교전에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매커니즘을 널리 보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실제로 일본 전국 시대 시기의 활로 일본 갑주인 당세구족을 입은 적병을 쏘면 관통력 부족으로 적을 일격에 죽이기 쉽지 않았다. 창이나 일본도를 사용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골절만 일으킬 뿐, 갑옷을 입은 무사를 무력화 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장 삼포왜란 당시 장전과 편전을 10여발 맞고 버티던 적병이나 화살 수십발을 버티고 버티다 겨우 죽는 왜장에 대한 보고가 실록에 등장한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K0_A18_06A_01A_00020_2005_024_XML|'5번째 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K0_A05_08A_04A_00010_2005_006_XML|'10번째 줄']]] 비단 일본 활만 문제가 아니라 국궁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정사에서 우리 활로도 갑옷을 뚫을 수 없어 투구끈을 쏘아맞혀 간신히 죽였다고 기록된 [[아기발도]] 사례를 생각해보자. 이게 전국 시대로부터 무려 200년 전의 일이었다. 임란 이후 1605년 북방에서 발발한 건퇴전투의 경우를 봐도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806007_002|여진족이 중국 갑옷을 입고 오자 궁시로 뚫지 못해]] 총통밖에 답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반면 조총의 경우 50m 거리에서 바로 관통이 가능하니, 가히 위력에 있어서는 혁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조총을 든 일개 병사가 비싼 갑옷을 입은 사무라이를 한 방에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시기 조선군 장수들 대부분은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관통력 뿐만이 아니라 화살의 속도 또한 활이 가진 약점이었는데, [[편전]]에는 무력화 되었으나 주력 전투용 화살인 장전을 여진족이 날아 오는것을 보고 피해버리는것도 모자라 [[겐지(오버워치)|칼로 받아 쳐 버리는]] 무협지스러운 사례도 실록에 나와있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494712|'#']] 조총의 전래되기전까지 조정에서는 보다 효과적인 편전을 생산해 배급하는것으로 대응했으나, 곧이어 승자총통과 같은 화기인 핸드캐논이 더 효율적이라 판단했고 조총의 전래 이후엔 편전마저 도태시킬 정도로 중용했다.[* 아래에 기술된 인조실록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아예 조총의 도래 이후 편전이 잊혀진 무기가 되었다는 언급까지 있다.] 이는 화기인 조총의 장점이 드러나는 부분으로, 탄자의 속도는 화살이 비교할바가 아니었다. 조준한 뒤 격발하게 되면 격발한 바로 그 순간 조준한 표적에 명중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총의 도입은 아무래도 개발 주체인 서구권이 조금 더 유연했던건 사실이었다. 동양도 갑주를 입은 상대에 대한 활의 저지력이 불분명했기에 조총이 성공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서양에서는 더 나아가 판갑의 발전으로 활이 아예 무력화되어 도태 단계였고, 그나마 타격을 줄수있는 투사병기는 심지 꽂고 쏘는 핸드캐논이나 무식한 장력의 활을 달아 장전이 오래 걸리는 쇠뇌뿐이었으며, 그마저도 갑옷의 발달로 관통을 기대해 저지력을 발휘할수 있는 유효사거리는 20m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는 사실상 그런 무장을 한 기병 상대로는 영거리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총이 다른 개인용 투사병기의 유예를 줄 이유가 애당초 없었기에, 의문의 여지없이 주력병기의 위치를 장악할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