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총 (문단 편집) ==== 임진왜란 ==== [youtube(kUN_-RhhmlU)] [youtube(C4YgRVI8bdg)] 대중매체에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조총 사격을 보고 처음 보는 무기의 위력과 폭음에 조선이 크게 놀랐다는 묘사가 많은데 사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조선 조정은 조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왜인 평장친이 가지고 온 총통이 지극히 정교하고 제조한 화약도 또한 맹렬합니다. 상을 내리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그의 원대로 당상의 직을 제수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명종실록 10년 5월 21일 >요시토시는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공작 두 마리와 '''조총''', 창, 칼 등을 임금께 바쳤다. 임금께서 공작새는 날려 보내라 하시고, 조총은 군기시에 보관토록 하셨다. >---- >-[[징비록]]中[* 1590년 3월, 즉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의 일이다.] >평의지 등이 공작 한 쌍과 조총 수삼 정을 바쳤는데, 공작은 남양 섬으로 놓아 보내도록 하고 조총은 군기시에 간직하도록 명하였다. 우리나라가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 >-선조수정실록 22년 7월 1일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를 시연한 기록이 있는데 시연 당일날 대신들이 이미 조총의 장단점을 알고 그에 대해 거론하고 있는 걸 보면 그 이전부터 이미 중국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조총과는 비교도 안 되는 폭음과 파괴력의 대포를 주력으로 운용하고 있었고 조총과 비슷한 무기인 [[승자총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임란 초반 조선군의 붕괴에는 조총이 매우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 원거리 개인무기의 대명사였던 [[활]]은 그래도 나무방패 정도면 거의 확실한 방호가 가능하고 갑옷 정도로도 그럭저럭 버텨볼 수 있지만, 화약으로 추진되는 조총은 갑옷은 물론이고 나무방패조차 뚫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 안그래도 훈련도가 낮은 지방군 병사들의 전투의욕을 감퇴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비숙련 지방군이 곡사화기인 활을 쏘는 것과 숙련된 왜군 선발대가 직사화기인 조총을 발사하는 것은 명중률과 살상률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낳을수밖에 없었고,[* [[상주 전투]]에서도 훈련도가 낮았던 조선군의 궁시는 왜군에게 제대로 맞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지휘관 입장에서도 당초 활에 의한 피해 정도를 예상했다가 전투가 진행되고 상정했던 규모를 월등히 상회하는 피해가 누적된다면 병사들의 동요는 차치하고라도 작전계획 자체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 입장에서는 조총의 폭음이나 섬광도 전의를 꺾는 데 한몫을 했다. 무엇보다도 조총의 존재를 접하고 분석한 건 일본과 교류가 있던 소수, 그리고 그들 및 외교 채널을 통해 정보와 실물을 입수한 정부에 한정되는 것이지, 임진왜란 때의 징집병 및 [[의병]]들은 조총에 대한 정보는 커녕 일본에 대한 지식도 희박한 상태인 것이 정상이다. 게다가 어찌어찌 전쟁 중에 조총의 존재에 대해 전해들은 이후라고 해도 충격효과는 단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총의 일제 사격이 가져오는 쇼크 효과는 생각보다 크고, 훈련도가 낮고 경험이 없는 병사들이 총소리나 일제 사격에 놀라서 전의를 상실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심지어 [[30년 전쟁]] 당시에 신교도 측 부대가 일제 사격을 한 후 '''자기들이 쏜 총소리'''에 놀라서 스스로 붕괴해버리는 어이없는 상황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시험 사격을 한 후 군기시에 보관된 조총을 일반 병사들이 접했을 가능성도 작은데다가 훈련을 충분히 받지 않은 병사들이 전장의 혼란과 공포에 전염되어서 놀라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는 화약무기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더구나 경군 소속이면 승자총통을 여러번 써봐 화기에 익숙했지만 도순변사 신립은 판단 착오로 승자총통을 다루는 포군을 데려오지 않고 본인의 궁기병들만 잔뜩 데려왔으며 궁기병들이 아닌 보병 전원은 천안, 성환, 청주, 공주, 충주, 증평, 죽산 등의 장터 등에서 갓 잡아와 징집으로 땜빵한 충청도 속오군이었다. 최근 들어 화력덕후 조선이 왜 조총 따위에게 그렇게 쪽을 못 썼냐는 목소리도 나오는데, 당시 조선군의 주력전선은 여진족과 맞부딪치는 북방 전선이었지 남방이 아니었고, 만성적인 청동난과 화약난에 시달리던 조선이 아무리 화력덕후라 해도 후방에서까지 총통을 펑펑 찍어내서 쏴제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약 40년 전 [[을묘왜변]]때의 사정을 보면 전쟁이 벌어지는 내내 절간의 종이라도 떼어다가 녹여서 쓰자는 조정 신료들과 그건 절대 안된다는 명종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전쟁이 끝난 이후로도 총통 좀 보내달라는 요청이 계속된다. 심지어 임진왜란 30년 전 1563년에는 조정에서 중남부의 방비상황을 점검해보고는 '''"총통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할 정도로 보유상황도 관리상황도 영 좋지 않았다. 애초에 조선은 최근에 부각된 화력덕후 이미지와는 별개로 그 화포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제반여건, 즉 화포를 제조하기 위한 각종 금속이나 화포 운용을 위한 화약 재료(염초, 유황 등) 등은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리던 나라였다. 임진왜란 당시 청어잡이와 둔전, 물길 통행세를 통해 자신의 휘하 수군과 백성들의 자급자족을 성공시킨 충무공 [[이순신]]도 화포의 제작과 운영에 소모되는 재료의 효율적 사용을 위해 천자총통 대신 그 아래 체급의 현자총통, 지차총통을 주력으로 삼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ma_11807010_001|#]]] 임란 1년 전인 1591년에서야 병조에서 '''철환 쏠 줄 아는게 화포장 몇명밖에 없으니 출번하는 병사들 훈련 좀 시켜야겠는데요?''' 하는 소리가 나왔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na_12402006_002|#]] 도성에서 복무하는 번상병들을 이제서야 화포 훈련시킨다고 하고 있으니 지방 읍병들이야 뻔한 일이다. 이일이 상주 가서 전투 직전까지 하고 있던 게 습진, 즉 진법 훈련이었을 정도니 이 병사들이 총통에 익숙할지는 굳이 분석할 필요도 없다. 반대로 일본군의 주력무기는 창이고 조총은 전체 군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은데 그 위력이 부풀려진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일본 국내에서 벌어진 전국시대 전투 양상을 그대로 임진왜란에 대입해 벌어지는 오류로, 조선에서의 전투 양상은 일본에서의 내전과는 전혀 달랐다. 조선 측의 기록을 봐도 관심은 온통 조총에 쏠려있지 일본군의 장창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우선 대부분 성을 포위해 위력을 과시하고 항복을 받아내던 일본 내에서의 공성전 양상과 달리 조선에서는 초전인 [[부산진 전투]]에서부터 '''항복 그딴거 없이 너죽고 나죽는 진짜배기 공성전'''이 터졌기 때문에 어딜 가든 철포대가 대대적인 사격을 가해야 했다. 또 일본과 달리 조선군과 명군 모두 기병대를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상황에서 대보병전에 특화된 일본식 장창병대는 큰 역할을 하기 힘들었고,[* 일본 장창병대는 기본적으로 농민 징집병이라 적을 찌르는게 아니라 봉술마냥 죽어라 내려쳐댔다고 알려져있다. 물론 진짜 창을 안 찌른 것은 아니고, 당연히 찌르기도 했다. 다만 흔히 생각하는 장창 대기병방진 같은 건 엄두도 못냈고 기병의 운용이 미약했던 일본에서는 딱히 필요하지도 않았다.] 조선군 보병은 초반 몇 번의 결전이 처참하게 실패한 이후 대부분 수성전이나 고지전, 유격전 위주로 일본군을 상대했기 때문에, 반대로 전세가 역전되었을 때에는 일본군 역시 성에 틀어박혀 농성했기 때문에 이러나 저러나 죽어라 철포를 쏴댈수밖에 없었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kkumi17cs1013&logNo=221224870436|#]] 결정적으로 일본 장창병은 '''명군의 [[원앙진]]에게 썰렸다.''' 오히려 조총과 함께 조선에 큰 피해를 준 건 칼이었다. 일본은 오랜 전란과 좋지 못한 치안에서 백병전과 호신을 위해 검술과 백병전에 익숙했으나, 조선은 오랜 태평성대를 지나며 그나마 활쏘기 이외에는 여러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조총의 탄환에 휩쓸린 뒤, 전국시대 동안 전쟁을 직업으로 할 정도로 전쟁에 이골난 일본군과 평시에 칼 잡을 일 없는 조선군이 맞붙으면 결과는 뻔했다. 당시 조선 환도에 비해 일본도가 상대적으로 길기도 했던 만큼, 칼은 조총과 함께 2대 위협이었다. 조선이 검술을 다시 제대로 보급하고 신경쓰기 시작한 것은 왜란 이후의 일이다.[* 당장 임란 전 창검은 무과에서나 다루지 평소에 다루지 않아 버려진 무기가 된 지 오래란 한탄도 있었다. 더구나 일본에서 사신으로 온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広)도 '''조선의 창은 너무 짧다'''고 지적했다.] 당시 조선은 당시 조총에 장점이 있음을 인지했지만 그 단점 역시 명확했기에 당장 양산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고 군기시에 보관해 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조총은 사용법이 쉽긴 했지만 장전과 조준이 활에 비해 몇 배로 느렸고 사거리나 명중률에서 낫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임진왜란]] 이전 조선군의 주력은 여진족을 상대하는 북방군이었고, 그것도 농민병을 대거 징집하기보다는 [[갑사(역사)|갑사]]로 대표되는 전문 군인 집단 중심의 체제였다. 자연히 마상에서도 이동 표적을 상대로 쉽게 운용할 수 있고 지형적인 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활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고, 조총의 대량 운용 능력은 그다지 크게 각광받지 못했다. 뒤에도 서술하겠지만 조선군에는 구한말까지 극소수지만 궁병이 남아 있었다. 실록에 나온 대화를 보면 한쪽은 '''양산이 빠르고 쉽다는 점에 주안점을 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같은 조건이면 활이 유리한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냐'''는 쪽으로 흘렀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은 효율적으로 조총을 운용한 일본군의 전술에 그 위력을 실감하고 양산에 들어갔다. 이는 임진왜란이 이전의 여진족 토벌이나 왜변과 달리 그야말로 총력전 수준의 혈전이었고 자연히 징집된 농민병들을 빠르게 무장시킬 수단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군의 높은 조총 보급률은 [[속오군]]으로 대표되는 동원 체제의 정비와도 크게 연관이 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총은 조선군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이에 조선군은 바로 조총 개발 연구에 들어갔다. 그 결과 1593년 9월 충무공 [[이순신]]의 수군이 처음 조총을 제작하는데 성공한다. 바로 조총을 모방한 '''정철총통(正鐵銃筒)'''으로 수군에 빠르게 보급되었고 육군에도 제작법을 전파하여 전군에서 생산하였다. 이순신은 이외에도 화약무기를 중요시해서 [[승자총통]]을 개인화기로 대거 확보해 수병들에게 훈련시키기도 하고 천자포, 지자포 등 국산 [[화포]]도 포술 훈련을 시켰으며[* 특히 조총을 잘 아는 이순신은 절대 조총 유효사거리 내에 함선이 들어가지 말도록 지시하고 사거리와 파괴력이 더 우월한 화포를 이용해 원거리에서 일본 함선을 공격했다. 일본군 입장에선 조총을 격발하려 폼을 잡을 때 머리위로 포탄이 날아오니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조선 수군은 최근 연구에서 조총 사거리 내에서 교전한 적이 많았다고 나오기는 했는데 이러한 양상 때문에 더욱이 이순신 부대가 최대한 화포가 이점을 발휘하는 조총 사거리 밖에서 화포로 조총으로 깨작거리는 일본군을 제압하는데 주력했다. 당시 배는 모두 나무배라서 대장군전 같은 충격력 강한 투사체가 발사되면 순식간에 일부가 부숴지며 일부만 부서져도 병사들의 동요가 커진다. 더구나 [[거북선]]은 갑판을 덮어서 조총 유효사거리 내에 들어와도 생체기 하나 없이 왜선을 부수고 다녔다.] 이순신 부대에 보급된 물건은 이름하야 정철총통이었으며 그 우월한 성능 덕에 이순신 부대의 해전에 적극 활용되었다. 또한 지상군 역시 [[김충선]] 등 [[항왜]]들이 조총 제작 기술을 전수해주면서 조총은 육군과 수군 모두 조선군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하나, 정철총통은 전쟁에 가장 긴요한 것인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만드는 법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제야 온갖 연구 끝에 조총을 만들어내니 왜놈의 총통보다도 낫습니다. 명나라 사람들이 와서 진중에서 시험사격을 하고서는 잘 되었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미 그 묘법을 알았으니, 도 안에서는 같은 모양으로 넉넉히 만들어 내도록 순찰사와 병마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려서 알게 하였습니다. >---- >난중일기 1593년 9월 15일자 다음 장[* 날짜가 적혀 있지 않고 9월 15일 자 다음에 나온다.] [youtube(OFz_044T3no)] (승자총통과 조총의 비교 영상) 개화문부터 폐화문까지의 과정 때문에 장전 속도에서 조총이 밀리긴 했지만[* 단 동영상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구식 화약 병기의 장전 과정은 큰 차이가 없고 속도는 개인 기량의 의존도가 큰 탓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역으로 승자총통은 지화식 화기인 탓에 타이밍 조절과 움직이는 표적을 계속 조준할 수 없었고, 기본적으로 곡사화기인 탓에 명중률과 사거리 모두 패배했다. 아무튼 조총은 1593년부터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금방 보급되어 1597년 재침 때는 이미 조선군도 조총을 갖추고 조총+승자총통+불랑기포 조합으로 일본군을 격퇴했다. 명량 및 노량에서 이순신도 휘하 부대가 조총을 사용하게 하여 조총으로 적병을 제압하고 불화살로 왜선에 불을 질러버렸다. 이순신 최후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역시 조총이 크게 활약했다. 노량에서는 일본군이 밧줄 타고 올라와 백병전이 벌어졌을 정도로 엉키고 엉킨 개싸움이어서 이순신이 전사했을 뿐이지 일본군은 주력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시마즈 요시히로]] 본인도 전사할 뻔한 걸 간신히 목숨만 건져 빠져나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