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총 (문단 편집) === 중국에서 === 본래 중국에는 [[원나라]] 때부터 화총(火銃) 혹은 화창(火槍)이라는 것이 존재했으나, 이 화총/화창은 서양의 [[핸드 캐논]]에 해당하는 물건으로 현대의 총과는 거리가 멀었다. 槍은 중국어로 총을 뜻하게 될 정도로 중국에서는 총기류를 화창의 변종들로 받아들였다. 현대에서도 중국어 신문에선 총기 관련 사건 기사에 창격안(槍擊案), 즉 화창으로 공격한 사건이라며 총기난사를 표현한다.[* 한중일의 총기류 호칭이 달라서 중국은 화창에서 유래한 창, 한국에서는 총통에서 유래한 총, 그리고 일본에서는 철포로 표현했다. 일본엔 화포가 전래되지 않아 대조총이 화포 역할을 했으며 철포(鐵砲)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포가 아닌 총을 일컬었다.] 이후 13세기 몽골의 침략 이후 서양에 화약이 전래되었고, 우리가 흔히 총이라 부르는 경량화를 거치고 방아쇠가 달린 무기는 15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유럽]]에서 출현한다. 그러나 중국도 핸드 캐논에 해당하는 물건을 소구경화하여 삼안총 등이 등장했으며 심지어 삼안총은 조총 도입 후인 [[임진왜란]], [[사르후 전투]] 등에도 잘 쓰였다.[* 명나라는 화창, 삼안총 등 화기를 아주 초기부터 운용했다. [[토목의 변]] 때도 삼안총 등 화기를 끌고 갔으나 화기 사용법을 가르쳐 주지 않은덕에 대부분 병사들이 멀쩡한 화기를 버렸다. 당연히 오이라트인들도 화기 사용법을 몰라 멀쩡한 총이 대거 버려졌다.] [[1523년]] [[포르투갈인]]들이 지금의 [[홍콩]] [[구룡반도]] 북쪽에서 행패를 부리다 물자와 무기를 몰수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포르투갈]]이 쓰던 선상용 화승총이 처음 소개되었다. 이것을 매치락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명은 유럽인과의 통상을 거부하였기에 단순히 소개만 되었다. 그러다가 [[1548년]] 명나라 군대에 잡힌 [[왜구]]를 통해서도 중국에 선상용 화승총이 소개되면서 중국에서도 본격적으로 화승총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한편 이보다 늦은 [[1597년]]에는 [[오스만 제국]]에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화승총을 같이 선물로 보낸다. 명나라에서는 포르투갈인이나 왜구를 통해서 들어온 총을 조취총(鳥嘴銃) 혹은 조총(鳥銃), 오스만 제국을 통해서 들어온 총을 노밀총(魯密銃)이라고 불렀다. 중국에서도 [[명나라]]가 화승총 같은 개인화기들을 제식[[무기]]로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실제로 기효신서에서 남병이 왜구 대응용으로 20% 이상 조총으로 무장했다. 그러나 중국 남방과 북방의 가혹한 기후 상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은 남방에서 [[왜구]]들과 싸울 당시 잘 사용해서 기효신서에도 조총 운용 전술을 도입했다. 그러나 화기들이 남방의 습한 기후 탓에 자주 불발되거나 심지어 폭발하는 이유로 화약무기에 너무 크게 의존하지는 않았고 타 병종과 혼성 편성해 20% 정도 보병부대를 조총으로 무장시키고 나머지 포수는 전통적인 삼안총이나 화창, 그리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원거리 보병은 엄호용 궁병으로 편성했다. 대신 내몽골과 인접한 북방의 기주에서 새로 군 편제를 짤 때 1개 조 20명 중 4명은 화승총으로 무장하도록 하였다. 사실 북방의 경우 몽골족이나 여진족이 기병이 대부분이라 화승총만큼 기병 저지력이 좋은 것도 없었다. 남방군 역시 기효신서에도 언급을 한 만큼 적극 사용하였으며 특히 왜구 저지력이 좋았다.[[https://blog.naver.com/gogijinri/222634496024| 명나라와 청나라 조총 역사에 대한 블로그 포스팅]] 중국이 [[불랑기포]][* 불랑기는 프랑크인, 이방인을 뜻하는 [[아랍어]] 단어 프랑키(파랑기)가 기원이다. 아랍 상인들의 영향으로 중국에 온 마자파힛 제국, 시암 등 동남아시아 출신 통역들이 이들을 파랑기라고 칭한 것이 음사된 것이다.]를 처음 접한 것은 [[1523년]] 현재 [[홍콩]]의 튄문에서 행패를 부리다 나포된 두 척의 [[포르투갈]] 선박에 의해서이며, 1529년부터는 중국에서도 제작되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명나라가 서구인 선교사들에게 직접 생산과 제작 관리를 요청한 것은 주로 대포였고, [[마테오 리치]] 같은 선교사들 역시 명나라의 수요에 맞추어 대포 제작 관리에 집중했지 개인화기 제작 관련한 기록은 잘 남기지 않았다. 이는 이미 화창이나 삼안총 등 개인화기 비슷하게 쓰이던 개인용 화포가 중국에도 있었던데다 이미 [[왜구]]를 통해 [[포르투갈인]] 등 유럽인이 쓰던 선상총은 제작기술을 파악해 자체 제작중이었다. 그리고 노밀총이라고 하서회랑을 통해 [[오스만 제국]]을 통해 들여온 조총 비중도 높았으며 이러한 이유로 굳이 [[포르투갈인]]이나 [[스페인인]] 등 당시 접촉하던 유럽인들에게 개인화기를 부탁하진 않은 것이었다. 대신 화포는 유럽 화포가 사거리가 더 넓고 화력도 강해 기존 화포는 전부 대체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 조총이 안 쓰이진 않고 엄연히 잘 쓰였다. 노밀총과 조취총의 두 종류를 사용했다.[* 임진왜란 원군으로 파병된 남병은 선상식 머스킷인 조취총을 썼고 사르후 전투 연간엔 노밀총과 조취총을 혼용했다.] 북방에서 몽골족, 남방에서 왜구를 대응하고자 했고 기효신서의 삼수병 체계도 조총을 쏘는 포수, 활을 쏘는 사수, 그리고 포수를 엄호하는 살수의 3개 병종 활용법이 나왔을 정도다. 임진왜란 때도 기병 위주 북병보단 화포와 조총, 삼안총을 운용하는 남병의 활약이 더 컸다. [[중국어]]로는 총을 '''창(槍)'''이라고 부르는데[* [[홍콩 경찰]]이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당시 실탄을 발사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총기를 창이라고 언급했다.] 총의 원조가 불화살을 화약으로 추진해 발사하는 [[송나라]] 시대의 화창(火槍)이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중국어]]로 창은 총을 뜻하며 개창(開槍)이 발포를 뜻한다. 송나라 초기 화창이 [[금나라]]와 [[원나라]]에서 삼안총 등으로 발전했고, [[칭기즈 칸]]의 손자인 바투가 유럽 원정에 화기를 동원하면서 유럽에도 총기 등 화약무기가 전래되었으며 이후 화승총으로 발전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ing dynasty Musketeer 41.jpg|width=400]]}}} || || 명나라 조총병 || [[사르후 전투]] 이전인 1597년 하서회랑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서 노밀총이 들어왔다. 노밀총은 거치대가 필수적일 정도로 화력이 강해서 주적이 [[여진족]]으로 바뀌자 적극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명나라는 나라가 엉망이라서 화약무기인 조총 및 화포를 갖고 후금으로 넘어가는 탈영병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거기에 전혀 군대가 훈련되지 않아서 [[사르후 전투]]에선 조총으로 무장한 명나라군이 활을 사용하는 기병 위주 후금에게 대거 썰려나가는 굴욕을 겪었으며 그 외에도 자잘한 전투에서 명나라 조총병이 후금의 궁기병에 썰려나가곤 했다. 명나라 조총병의 훈련도가 낮은데다 조총은 재장전 및 방열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라 방열이나 재장전하는 사이에 화살을 대거 맞고 고슴도치가 되어 끔살당하기 일쑤였다. 사르후 전투에선 오히려 밤에 조총을 격발하려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게 되려 좋은 표적지로 전락해 후금 궁기병이 활을 쏴서 조총수 사냥을 벌여 조총은 써보지도 못하고 대패를 경험했다. [[이자성]]을 비롯한 명나라 섬서성(현 [[산시성(섬서성)|산시성]])의 농민 반란군들과 탈영병들은 초반에는 무장이 빈약하였지만 1640년대에 이르러서는 총포를 대량으로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무기들은 상당수는 탈영병들이 들고 온 것이었지만[* 당시 탈영병들이 괜히 생긴 게 아니라 명나라 조정에서 현재 [[간쑤성]], [[산시성(섬서성)|산시성]] 등 서부지방 군인들에게 [[둔전]]을 경작해서 자급자족할 것을 지시했는데 서부지방에 가뭄이 들어서 농사를 망치고 중앙 정부는 나몰라라 장교들은 봉급을 착복하는 상황이 되자, 병사들이 어쩔 수 없이 굶어죽기 싫어서 대거 탈영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자성도 이렇게 어쩔 수 없이 탈영한 케이스로 추정된다.] 자체적으로 제작한 것도 있었다. 자체 제작한 화기의 품질이 나쁘지는 않았는지 오히려 명나라 관료들이 '우리가 보유한 화기는 저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구나'라고 한탄한 사례가 기록에 남아있다. 이자성이 1642년 좌량옥이 이끄는 명나라 관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도 화포의 우세 때문이었다고 평한다. 명나라 때는 조총 및 화포 등 화약무기의 활발한 개량과 도입이 이루어졌는데, 조사정이 1603년 작성한 조총 교범인 신기보(神器譜)등의 명나라 화약 병기 서적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이나 [[포르투갈]]의 화승총은 물론이고, 차륜식 머스킷 또한 운용하였다. 특기할 점은 명나라의 화약 무기 서적 중 하나인 하여빈의 <병록(兵錄)>에는 후장식 조총인 자모총과 착탈식 총검까지 기록되어 있다.[[http://egloos.zum.com/zairai/v/5667948|*]] 하지만 그러한 조총의 개량과 개발은 왕조가 교체된 후 이어지지 못했다. 사실 애초에 명나라의 신박한 화약무기라며 인터넷에 떠도는 것들은 사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고, 원조인 유럽에서도 실전성 없다고 외면 받은거라 자연히 명나라에서도 거의 안 쓰였다. 이자성의 난 당시 요동 지역을 침공한 [[후금]]의 경우 [[1629년]] 영평을 점령하면서 유럽인들로부터 훈련받은 총포공들을 찾아내고 [[1631년]]부터는 자체적으로 대포를 주조할 수 있게 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들어선 [[청나라]]는 초반에 [[만주족]] 및 [[몽골족]] [[기병]]인 [[팔기군]]이 주력이었다가 [[요동]]을 손에 넣은 후 [[한족]]들을 받아 들이면서 팔기한군이라고 [[해군]]과 [[화포]] 담당 병과를 신설했다. 특히 [[모문룡]]이 처형당한 이후 [[홍이포]] 및 [[불랑기포]]와 조총을 다루는 그의 부하들이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홍타이지]]에게 투항, [[청나라]]도 조총 및 홍이포를 손에 넣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대규모 총/포격을 퍼붓는다. 특히 산봉우리 위에서 성벽 아래로 조총과 홍이포를 대규모로 퍼부어 성벽 일부를 부수고 다수 [[조선군]]을 저격해 전사시켜 버렸으며 이는 [[인조]]가 결국 항복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 결정적인 항복 원인은 [[강화도]] 함락으로 왕족들이 죄다 잡혔기 때문이다. 그전까진 조선군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청군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고 심지어 천자총통으로 홍이포를 대포병 사격하여 청군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더군더나 근왕병이 산성 주변에서 깔짝거리고 조총으로 청군을 끔살해서 시간이 부족한 청군은 더욱 조바심을 냈다. 이들 근왕병 조총수들이 청나라의 귀족 지휘관 여럿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영화 남한산성에도 이러한 근왕병의 심기일전이 나온다.] [[베이징]]을 점령하고 입관한 이후 [[강희제]]부터는 [[한족]] 용병인 녹영을 두었는데 이 녹영의 주력 무기는 조총이었다. 이런 조총병의 활약은 마지막 유목 제국이었던 [[준가르]]를 지도상에서 지워지게 만들었다. [[준가르]] 정복의 주연은 [[기병]]인 [[팔기군]]이었다만 준가르도 조총을 운용한지라 조총을 사용하는 녹영의 역할은 컸다. 문제는 [[건륭제]] 사후 [[팔기군]]은 오랜 평화에 젖어버려 군마를 팔아 치우고 몰래 장사를 하는 등 전투력 저하 행위를 했고 그 자체가 특권층화되어 무력 집단으로서 기능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군마 부족으로 [[기병]]이어야 할 팔기군 대부분이 몽골족 팔기인 팔기몽고만 남고 나머진 보병으로 전락했고 그 땜빵은 총포를 운용하는 녹영이 해야만 했다. 팔기몽고는 [[아편전쟁]]에서도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이 분전했으나 결국 수석식 머스킷이라는 유럽인들의 우세한 화력에 전멸했다. 일본이 [[에도 시대]] 이후 무장 억제책으로 조총 연구 및 소지를 금지해 조총이 잊혀져서 총기 발전이 없었듯 중국도 [[만주족]]들의 통치 이후 총기 발전은 없었다. [[만주족]] 및 [[몽골인]] [[팔기군]]이 권력 유지에 핵심이었던 청나라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한족]]들의 무기인 화기연구는 답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화약무기는 한족들의 전유물 비슷한 취급이었다 심지어 19세기 초반까지 팔기군이 유지되어 창병과 궁병이 편제에 남아 있을 정도였고 이 때문에 [[아편전쟁]] 당시에는 수석식 머스킷으로 무장한 [[영국군]]에게 청이 자랑하는 몽골팔기와 구식 조총을 쓰는 녹영 등이 모두 일방적으로 갈려나갔다.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로 일본도 에도 시대가 열리며 민란을 우려해 조총을 대거 몰수하면서 총기발전이 없었다.[* 단 일본은 다이묘들이 개별적으로 총기를 사서 무장하는 정도는 막부 측이 문제삼지 않았기에 슬금슬금 들여와 나중에 자체 양산을 하거나 여러 차례 여러 방법으로 들여와 군대를 구성하는 일도 많았다. 그래봐야 조직적인 군대 양성이 이뤄진 게 아니라 다를 건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일본과 중국이 조용하던 시기 오히려 [[영조]] 때 박영준이 [[천보총]]을 발명하고 [[기병]]을 조총으로 무장시키는 총기병이 등장하며 [[네덜란드]] 출신 박연 등을 통해 서양식 화포에 대해서도 익히는 등 되려 [[1700년대]] 화약무기는 조선이 발전시켰다. 애초 오랜 평화에 젖게 된 중국, 일본과 달리 조선은 남방으론 일본, 북방으로는 청나라와 접했으며 둘 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를 쑥대밭을 만든 적이 있어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애초 천보총의 발명 목적 역시 북방 오랑캐들인 몽골족과 만주족의 팔기군 기병과 남방의 일본 조총부대를 모두 제압할 무기가 필요해서였다.[* 다른 한편으론 역관들을 부지런히 청나라에 파견해 [[몽골어]] 및 [[만주어]] 습득을 꾀하고 국제 정세도 파악해오는 등의 노력도 병행했다.] 조선이 약체화된 건 [[정조]] 사후 세도정치의 폐해 탓이었다. 이후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팔기군과 조총수, [[노궁]]수, 그리고 [[홍이포]]를 운용하는 포병들이 수석식 머스킷, 최신 대포 등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에 썰려버리자 충격을 받고는 서양식 무기 도입을 재추진해[* 이 때면 청이 쓰는 [[홍이포]]와 [[불랑기포]] 따위는 도태된 지 오래였다. 당장 불랑기포 원산지 포르투갈, 스페인이나 홍이포 즉 캘버린의 원산지 네덜란드도 영국, 프랑스, 미국 등과의 무기 차이가 커져서 전쟁에서 패배해 식민지를 대거 뺏기던 시절이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말할 거 없고 [[오스만 제국]]과 [[스페인]] 역시 쇠퇴하면서 이탈리아-투르크 전쟁/ [[크림전쟁]]과 [[미서전쟁]]으로 영토가 쪼그라들던 시기다. 오스만 제국은 당장 크림전쟁으로 우크라이나 남부와 크림을 완전히 상실하고 [[중앙아시아]] 통제권을 잃었으며 [[캅카스]] 도 대거 러시아에 내줘야 했고 나중엔 되려 영프미 연합군이 1차 대전에서 패전한 오스만 제국의 본진을 털어 [[이스탄불]]이 영국군에 점령당하기까지 했다.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으로도 [[리비아]], [[소말리아]], [[에리트레아]] 등 [[아프리카]] 영토를 모두 잃었다. 스페인은 미국에게 [[필리핀]]과 [[괌]], [[북마리아나 제도]], [[푸에르토리코]]를 모두 내줬고 스페인에서 근세식 무기를 도입해 주력으로 삼던 [[멕시코]]도 [[미멕전쟁]] 참패로 북부 영토를 모두 잃었으며 스페인의 메인 식민지 [[쿠바]]는 미국이 속국화했다. 스페인/포르투갈이고 네덜란드고 오스만 제국이고 이들 모두 보유하던 무기가 도태되어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게 상대가 더이상 될 수 없었다.] [[양무운동]]을 통해 세워진 군수공장들에서 [[퍼커션 캡]] 라이플과 [[게베어 1871]]을 생산하는 것으로 조총을 대체하고, 1894년부터는 [[독일]]의 [[게베어 1888]]을 주력으로 채용하여 한양식[* 이 소총을 생산했던 [[후베이성]] [[우한시]]의 한양 병공창에서 딴 제식명이다. 우한(武漢)은 우창+한커우를 합쳐 만든 도시인데 한커우의 옛 이름이 한양이었다.] 소총이란 이름으로 라이센스 생산한다. 이후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된 후 [[중화민국]]의 혼란으로 군벌 할거 시대가 열리자 국제 무기상들이 팔아치운 온갖 무기들이 중국 내로 들어오면서 민간에서도 조총은 거의 자취를 감춘다. 이때쯤이면 [[중국 국민당]]의 국부군은 독일제 무기가 주력무기가 되었으며 군벌들도 서양 각국으로부터 무기를 사와서 각기 무장하기 바빴다. 그러다가 결국 [[장제스]]가 북벌로 군벌들을 모두 정리했다. 당연히 민간에서도 조총은 도태되어 쓸모없는 무기로 전락해 버려졌고 국부군 및 [[중화민국 경정서]]는 마적 등을 방지하고자 민간에서 무기를 압수하면서 조총은 박물관에 쳐박혀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