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중응 (문단 편집) === 생애 후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066487_339282_4737.png|width=100%]]}}} || || {{{#fff '''1915년 10월 28일자 매일신보'''[* 뒷줄 왼쪽이 [[조중응]]이다. 뒷줄 오른쪽 사람은 [[이윤용(1855)|이윤용]]이고 앞줄 중앙의 여성은 [[이완용]]의 부인, ]}}} || 1915년 11월 [[다이쇼 덴노]]의 즉위 대례식에 참여하고 즉위 기념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1월 '경성상업회의소' 특별 평의원에 임명되는 한편 '제국군인후원회' 조선 지회 평의원에 위촉되었다. 1916년 11월 조선인 전직 [[관료]]와 귀족 대지주 실업가들이 친목 도모와 내선 융화를 목적으로 '대정친목회'를 발기하자 회장에 선출된 후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1917년 4월 <매일신보사> 주최로 조직된 '남북 만주 시찰단'의 단장으로 참여해 만주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1917년 6월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일본 [[천황]]부 부를 알현하고 돌아온 후 <매일신보> 6월 30일자에 「안태하신 존가를 봉영하고」라는 글을 발표해 '이왕 전하의 동상하신 금회의 사실은 실로 일본 유사 이래 미증유의 성사되는 동시에 아! 조선에도 또한 일찍이 없던 바이며 필시에 조선이 [[청나라|청국]]에 대해 응수하던 당시의 정황을 회고하며 이번에 무한한 감개가 어찌 없으리오. 이로써 보면 이번에 성의는 첫째 이왕가를 위해 다행할 뿐 아니라 둘째 우리 조선인 전체의 영광이라 할 것이라 위로는 [[황실]]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인민]]에 이르기까지 이왕 전하께 대한 성의를 다하면 우리 황국 신민 일반에 대하여 영원히 애호함을 심심치 인지될 것인즉. 우리 조선 인민은 제실의 이와 같은 위대하신 성지를 극체하며 내지 인민의 심훈한 친애를 감사하여 부디 내선이 일심협력으로 융화진취에 노력하여 더욱 더 충량한 신민이 되어 [[국가]]에 봉공하기를 자기할지어다.'라고 감사하는 마음을 밝혔다. 1918년 1월 조선지(朝鮮紙)주식회사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4월에 열린 창립 총회에서 감사역에 선출되었다. 1918년 7월 '조선국세(國勢)조사평의회' 평의원에 위촉되는 한편 주식회사 [[조흥은행|한성은행]]장에 선출되었으며 1918년 8월 '경성구제회'에 수많은 거금을 기부했다. 1918년 12월 왕세자 [[영친왕|이은]]과 일본 [[황족]]인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왕세자비)의 [[결혼식]]이 1919년 1월에 발표되자 <경성일보> 12월 7일자에 "동화의 좋은 모범 / 옛 일선 관계를 재현"이라는 글을 발표해 일반 민중도 앞으로 더욱 내선 동화에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19년 1월 고종의 국장 위원장에 임명되어 3월까지 재임했으며 얼마 안가서 1919년 8월 25일 종3위의 [[벼슬]]을 지내다가 병으로 사망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조차도 사망 다음 날인 1919년 8월 26일자 1면에 '''조중응 자작 훙거'''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조중응에 대해 조의를 표하면서도 '''[[매국]]적인 행위 이외에도 [[기회주의]]적의 악매와 냉조의 중심 인물이 됨으로써 조중응 세자는 거의 경조부박의 수괴의 관이 유하였음을 사실이다'''라고 [[평가]]했다. 사망 후 작위는 세습되어 장남 조대호가 이어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