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중응 (문단 편집) === 친일 행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90419_56_10157.png|width=100%]]}}} || || {{{#fff '''1907년 영친왕과 대한제국 내각의 모습'''}}}[* 둘째 줄 오른쪽에서 첫번째 인물이 [[조중응]].] || 1906년 귀국한 그는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으로 입각하였고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에 관여했으며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 체결에 큰 공을 세워 [[정미칠적]]이 되었다. [[법부|법부대신]], [[농상공부|농상공부대신]] 등을 역임하였으며 1909년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장례식]]에 내각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는 [[경술국치]] 후 [[경술국적]] 중 1명이 되어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작위)|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이후로도 [[친일파]]로 활동했다. [[장석주]], [[김윤식(조선)|김윤식]], [[조희연(1856)|조희연]]과 일선 사적 및 구관습 연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1년 1월 이완용, [[박제순]] 등과 함께 조선의 각종 구관을 조사해 [[일본 제국|일제]]의 조선 통치 자료로 공급할 계획으로 '조선구관연구회'를 설립했다. 같은 달 은사 공채 10만원을 받았고 2월에 [[조선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 본서 봉수식'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했다. 1911년 3월 대동법률전문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200원을 [[기부]]하는 한편 오성학교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에 찬성원으로 참석했다. 1911년 8월 29일 ‘병합 1주년’을 기념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병합 1주년 감상'이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축사를 발표했다. >'''극동의 평화를 영원히 함에 있어서 일한 병합이 필요함은 오배의 노노를 부뢰하고 대세의 사연한 바인데 우리는 무사히 1주년을 경과 하였으니 차는 오직 천황 폐하의 지인지자하신 은덕에 욕함과 우일은 대명을 배하고 조선 통치의 임을 대한 사내 총독이 일시동인의 시정과 공명정대한 조치에 화함을 의하여 연함이니라..... 조선의 적자는 금회에 비로소 제1회의 탄생일에 해당하였는데 금후 3년, 5년을 점차 발육성숙하면 되고 된 일본에 대하여 충분히 보은할지요. 현재로써 미래를 추하면 유망한 장래가 유한 고로 여배는 충심으로 함을 불승하노라......''' 1912년 1월에는 조선인 문사와 일본인 문사들의 친목 단체인 '문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2월에 '조선상업합자회' 사부총재로 선출되었다. 1912년 7월 감약당 [[주식회사]] 조선 측 발기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이완용과 함께 [[조선귀족]] 대표로 [[메이지 덴노]] 위문을 위해 [[도쿄시|도쿄]]에 갔다가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한 후 9월 말에 돌아왔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1월에 '[[경기도]] 대지주회' 부회장과 '남부공익회'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2월 정4위에 서위되었다. 1913년 1월 '조선귀족회' 총회에 참석해 다음과 같은 3개항을 의결했다. ||① 국어 (일본어)보급을 위해 유치원 창설. || ||② 귀족 자제에 대한 정신 교육을 통해 이들의 소행이 향상되었으므로 지속적인 관심으로 인의 도덕을 갖춘 유용한 재기로 양성. || ||③ 귀족의 재산 보호를 위해 힘쓰고 이를 위해 지방 소유 전토를 시찰하는 동시에 농업 개량 장려를 주장하여 외지 농민에게 모법을 보일 것.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