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준(조선) (문단 편집) === 정도전과의 관계 === 두 사람은 철저하게 직업적인 사이로 사적인 친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정도전이나 육룡이 나르샤 같은 2010년대 사극에선 실권이나 건국과정 공적에서 한 수 처지는 3인자 내지는 아예 정도전 아래사람으로 그리고 있는데 실제 이 둘은 이성계라는 1인자 아래에서 대등한 2인자로 각자의 분야에서 낸 성과를 내세워 경쟁하던 사이였다. 회사로 비유하자면 회장 아래서 자기 기획안 내세우며 박터지게 경쟁하는 이사들. 실무담당 조준과 사상가 정도전이 함께 추진했다고 잘못 알려진 고려말 전제개혁은 철저하게 조준의 작품이었고 정도전의 계구수전은 개혁파들 사이에서조차 이슈가 되지 못해 정도전은 존재감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정도전이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며 부각되는 시기는 전제개혁보다 이후에 척불 운동을 주도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정도전이 조준의 전제개혁 논의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것과 동일하게 조준도 정도전의 척불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고 관련 논의에 끼어들지조차 않았다. 또한 정도전과 조준의 시문을 보아도 둘 사이에 이렇다할 교우관계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정도전은 조준의 전제개혁 논의가 진행 될 때까지도 반대파인 이숭인, 권근과 친하게 지냈다. 그 둘과 사이가 멀어진 건 자신이 주도한 척불운동 때부터였다. 그리고 정도전의 척불론은 정도전 개인의 사상에 기인한 바가 가장 크지만, 이걸 현실정치에서 적용하는 와중에서 척불론 주장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목적도 있지 않았느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즉. 조준이 전제개혁 논의를 주도하며 이성계 다음가는 개혁파의 이인자로 부상하자 정도전은 자신의 위상을 다시 높이고 주도권을 놓지 않기 위해 척불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이를 위해 교우관계까지 끊어버리는 열성을 보였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토지개혁이 최대 화두였던 '''[[공양왕]] 시기의 이성계 일파의 2인자는 정도전이 아니라 조준이었다.''' 정도전의 존재감과 권력이 조준을 넘어서는 것은 조선 건국 이후 천도를 비롯한 각종 개국 청사진을 그려나가고, 이성계에 의해 세자로 책봉된 이방석의 후견인이 되었을 시점부터다. 이럼에도 정도전이 다한 것처럼 대중들이 곧잘 오해하는건 조준이 실무관료 성향이 강해서 앞에서서 거창하게 떠들기 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행정실무에 전념하길 선호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큰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꺼려서 조선 건국 이후 태조가 군권을 맡기자 애써 사양하려 했고, 식읍도 거부했다. 이성계가 주는거 다 받아먹으며 주변의 원한을 사든 말든 자기 소신껏 밀고나가려 했던 정도전과 정반대의 모습인데 이런 성향 차이로 '''여말선초에도 조준이 한 일을 정도전이 주도했다고 여기는 시선들이 많았다.''' 오죽했으면 정도전 본인이 내가 안했는데 왜 싸잡아 욕하냐고 투덜거릴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