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준(조선) (문단 편집) === [[공양왕]] 시기 === 조민수, 이색 일파가 거의 제거되면서 조민수 등이 추대한 창왕도 [[폐위]]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양왕이 즉위하게 되었는데 조준은 이성계의 뜻과는 달리 의외로 공양왕의 즉위를 반대했다. 그 이유라는게 "정창군(定昌君)[* 공양왕]은 부귀한 [[환경]]에서 자라나 [[재산]] 모으는 일이나 잘하지 [[나라]] 다스리는 일은 모른다."라는 것. 그러나 어찌되었던 공양왕은 왕으로 즉위했는데 처음부터 조준과 공양왕은 사이가 전혀 좋지 못했다. 본래 공양왕은 즉위 이전부터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땅이 많았는데 토지 개혁을 하게 되면 자신의 땅이 그 대상 중 하나가 되게 되니 좋아하지 못했던 것. 어차피 공양왕 역시 좋은 뜻으로 이성계가 자신을 즉위시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테지만 "[[돈]]이나 잘 모을줄 아는 작자다."라고 자신을 디스하며 즉위를 반대한 조준을 좋아할리도 만무했다.[* [[왕위]] 책봉에 대한 논의는 이성계 일파끼리의 논의였지만 정몽주가 공양왕에게 "조준은 전하의 즉위를 반대했다."고 일러바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준은 공양왕이 즉위하기가 무섭게 또다시 3번째로 토지 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지금 6도 관찰사가 보고하기에 개간된 토지의 수는 50만결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공상(供上)은 풍족해야만 하므로 그 중 10만 결을 우창(右倉)72)에 소속시키고 3만결은 4고(庫)에 소속시키고 있습니다. 녹봉은 충분해야만 하므로 10만 결을 좌창(左倉)에 소속시키며 조사(朝士)를 우대해야 하므로 경기의 토지 10만결을 잘라 나누어 주니 결국 남은 것은 17만결에 불과합니다. 6도의 군사와 진(津)·원(院)·역(驛)·시(寺)의 토지나 향리(鄕吏)·사객(使客)·늠급(廩給)·아록(衙祿)의 용도로도 오히려 부족한데 군대에 쓸 물자가 나올 땅은 으레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지방의 토지를 사전으로 나누어 주려고 하시니, 황실에 쓸 물자와 녹봉의 비용도 나올 데가 없는 판에 진·원·역·시 등 여러 명목의 토지는 어디서 나올 수 있으며 방진(方鎭)의 병사와 해도(海道)의 군인에게는 무엇으로 공급하겠습니까? 만일 홍수나 가뭄의 재해가 3~4년 계속된다면 무엇으로 진휼하며, 수많은 병사의 군량은 무엇으로 충당하시렵니까? 결국 공양왕 2년, 공(公)·사(私)의 토지대장들은 시가지에서 불태워졌는데 어찌나 많은 [[문서]]를 태우는지 그 불씨가 며칠간이나 갔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공양왕은 "내 통치기에 와서 토지 제도가 이렇게 바뀌다니!"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점점 조준은 공양왕에게 있어서 가장 밉상인 놈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정몽주는 조준이 사실은 공양왕의 즉위를 반대했다는 사실을 공양왕에게 알렸다. 이후 조준이 [[우현보]]를 공격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공양왕은 우현보의 편이었으므로 우현보를 공격하는 조준은 너무나 밉기만 했다. 계속 이렇게 서로 사이가 안 좋다 보니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조준이 돌아올 무렵이 되자 공양왕은 "아, 내가 또 조준 그 인간 [[얼굴]]을 봐야겠네."라고 불평을 했을 정도.[* 이 때 조준은 훗날의 [[영락제]]인 연왕 주체를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저 사람 보통 사람은 아니니 계속 저러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준을 보고 싶지 않아도 공양왕은 매일 매일 조준의 일을 접하고 살아야 했다. 개혁에 대한 열의에 불타는 조준이 거의 미친듯이 일을 하며 매일 상소를 올려댔기 때문인데, 당시 조준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조준이 헌사(憲司)에 있으면서 올린 건의가 엄청나게 많았다'고 표현할 정도다. 당시 조준은 평리(評理) 겸판상서시사(兼判尙瑞寺事)로 [[승진]]해 [[관리]]의 선발과 임명을 관장했으며 토지 개혁에 대한 상소는 물론 난잡한 호구 체계의 재정리, 정치 폐단에 대한 항의, 부역의 폐단에 대한 대책, 관리 임명에 대한 절차, [[법]] 시행의 절차, 과도한 이자에 대한 제한, [[재판(법률)|재판]] 절차에 대한 번거로움 철폐, [[연좌제]]에 대한 항의, 심지어 [[백성]]들에게 [[가축]]을 징발하는건 폐단이니 궁중에 사육장을 만들자는 등 그야말로 전방위에 걸쳐 거의 미친 사람 마냥 엄청난 기세로 온갖 건의를 올려대고 있었다. 공양왕의 입장에서는 여기를 봐도 조준, 저기를 봐도 조준이 보이는 환장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개혁파의 의지가 모조리 관철되려는 찰나 마지막 저항이 나타났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이성계가 낙마 사고로 와병하여 잠시 정계에서 물러난 것을 계기로 반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정도전과 남은 등은 [[유배]]형을 받았는데 조준 역시 [[김진양]](金震陽)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김진양의 이 상소에서는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종 등이 모두 디스를 당했으나 그 중에 조준에 대한 [[죄]]가 가장 상세했다.[* 정도전은 출신에 대한 죄, 남은은 변란을 선동한 죄, 윤소종은 후설을 만들어낸 죄를 열거하는데, 조준에 대해서는 변란을 선동하고 권세를 농단하며 여러 사람을 꾀어내 협박했으며 관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건달 무리와 비위를 맞추어 향응했다며 맹렬한 공격을 가한 것 뿐 아니라 조준이 공양왕 옹립에 반대했다는 소문을 공론화시켜서 조준에 대해서만큼은 공양왕이 사면하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낸다.[[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itemIds=kr&sort=levelId&dir=ASC&limit=20&page=1&pre_page=1&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A%B9%80%EC%A7%84%EC%96%91+%EC%A1%B0%EC%A4%8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A%B9%80%EC%A7%84%EC%96%91+%EC%A1%B0%EC%A4%80&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Detail/kr/kr_117_0010_0020_0020/6/2/6/o|#]]] 또 이를 모의한 정몽주 등은 "먼저 이성계의 [[보좌]]역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 이성계를 도모해야 한다."하며 가장 먼저 제거해야할 대표적인 사람으로 조준을 꼽았다. 그 당시 반대파들에게 있어 조준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결국 조준은 [[감옥]]에 들어갔으나 이 모의는 이성계의 귀환으로 싱겁게 막을 내렸고 정몽주 역시 [[태종(조선)|이방원]]에게 참살되어 실패했다. 감옥에서 나온 조준은 다시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곧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마침내 [[조선]]의 건국이 실현되었고 이성계를 추종하는 문무 신료들은 모두 모여 엄청난 행렬을 이루면서 이성계의 집으로 가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 때 유독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만이 [[고려]]의 종말을 슬퍼하며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자 고깝게 여긴 남은이 민개를 죽이려 한 것을 조준이 만류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