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준(조선) (문단 편집) === [[우왕]] 시기 === 1374년 정당문학 이무방(李茂芳), 밀직부사 [[염흥방]]이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한다. 조준은 정5품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로 [[강원도]] 안렴사가 되었는데, 백성들에게 두려움과 신뢰를 모두 얻는 동시에 사납고 간사한 무리를 없앴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 무렵 [[정선군]]에서 남긴 시다. >'''오래지 않아 동쪽 명주(溟州)땅을 깨끗이 씻으리니, 이 땅의 백성들이여 눈을 씻고 맑아질 날을 기다리라.''' 조준은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있다가 감문위(監門衛) 대호군(大護軍)으로 옮기면서 「기양소(祈禳䟽)」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이 상소에 '''정직하고 성스런 사람을 소외시키고 아첨배와 사악한 무리를 좋아한다'''라는 강한 구절이 있었는데, 이를 본 김주(金湊) 등은 "이거 위험하다."고 여겼는지 고쳐쓰게 한 일도 있었다. 그 무렵부터도 이미 슬쩍슬쩍 강한 개혁적 성격이 나온 듯. 이후 조준은 순조롭게 승진하여 법률의 일을 맡는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이 당시는 [[한반도]] 전역을 유린하던 [[왜구]]의 공세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 왜구들은 1380년의 [[황산대첩]]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나, 1383년 [[정지(고려)|정지]]의 관음포(觀音浦) 전투 전까지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특히 [[경상도]] 지역은 왜구의 기세가 심하여 초토화가 될 판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은 사기가 엉망인데다 장수들도 도저히 왜구와 싸우려고 하질 않았다. 고민하던 [[최영]]은 조준을 천거하여 체복사(體覆使)[* 고려시대 지방에 보내던 임시 사행.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공민왕 및 우왕 연간에 집중적으로 파견되었다. 왜구가 침입한 지역의 민정을 살펴 보고하고, 전투를 독려하며, 그 상황을 점검하는 일을 맡았다.]로 삼았다. 일종의 감찰관으로 지방에 내려간 조준은 왜구가 와도 머뭇거리며 싸우지 않은 도순문사(都巡問使) 이거인(李居仁)을 불러 '''"너 이색히 이 따위로 할거야?"'''라고 다그치고, 병마사(兵馬使) 유익환(兪益桓)을 불러다 '''아예 참수해버렸다.''' 그러자 이거인 등은 공포에 질려 '''"차라리 적과 싸우다 죽지 조준 공의 위세를 거스르면 안되겠다."''' 하고는 힘껏 싸우니 '''연이어 승전보가 울리며 경상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때가 1382년이었다. 전투 이후에 조준은 효자와 열녀로써 적과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도당(都堂)에 올려 그들이 표창을 받게 함으로써 뒷처리도 깔끔하게 했다. 왜구의 준동을 병사를 더 보낸 것도 아니고, 막장인 군사들을 독려한 감찰관 하나로 돈 한 푼 더 안 쓰고 막아내게 되자, 우왕은 대단히 기뻤는지 "양광도와 경상도에 왜구가 무지하게 날뛰잖아. 근데 군대 사기가 막장이라 애들이 잘 싸우지를 않아. 그러니 네가 계속 감찰관으로 뛰면서 겁먹고 안 싸우는 원수들하고 도순무사들 좀 닥달해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준은 우선 어머니의 나이가 여든 세를 넘었다고 발을 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왕이 계속해서 권고하자 '''"정 그러면 내가 두 개 도를 관할하며 패전한 장수를 마음대로 처결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한 번 맡아보겠다."'''고 말했다. 헌데 무인 세력들이 이 제안을 대단히 껄끄럽게 여겨 우왕에게 말해 이를 취소시켰다. 이 임명은 백지화 되었지만, 조준은 도검찰사(都檢察使)가 되고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의 호를 내려받는 등 [[이인임]] 등에게 물을 먹은 적이 있었던 다른 [[신진사대부]]들과 다르게 비교적 순조로운 관료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에 조준은 별다른 탄핵을 받지 않았는데도 조정의 상황이 혼란스럽자 '''"에라, 더러워서 더 못보겠네!"'''라는 식으로 '''그냥 낙향해서 4년 동안 방콕 생활을 했다.''' 그 동안 조준은 지저분한 정치판을 멀리하며 경서와 사서 읽기만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때 조준은 처제의 남편이었던 김지 등과 함께 국가 조세제도 및 행정체계, 지리, 예술, 문학등을 집대성하는 공부를 한다. 요즘의 집권 스터디라고 할까. 조준은 이 결과물을 주관육익이라는 편찬물로 펴내는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밑에서 나오는 조준의 토지개혁안은 이 스터디의 결과물에서 나온 것.] 이후 최영이 [[임견미]], [[염흥방]] 등을 제거하고 이름이 있던 조준을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 다시 삼겠다고 했지만, 당시 조준은 모친상이라 이를 핑계로 그냥 조정에 나가지를 않았다.[* 이는 고려사의 기록인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해 조준이 밀직제학(密直提學)이었다는 언급도 있다.] 이 당시 조준이 [[윤소종]], 허금, 조인옥, 유원정, [[정지(고려)|정지]], 백군녕 등과 친구로 지내며 [[신돈]]의 자손을 몰아내고 왕씨의 자손을 다시 세우자고 맹세했다고 고려사에 있는 그의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아무래도 우왕 신씨설이 윤색의 느낌이 강하게 나는 설이기에 이는 후대의 윤색으로 보인다. [[위화도 회군]] 직전에 이성계가 사불가론을 주장했을 때 우려했던 대로 제2차 [[요동정벌]]이 시작되자 왜구가 쳐들어왔고, 이에 양광도 안렴사인 전리가 보고를 하자 조정에서는 도흥, 김주, 곽선, 김종연 등 5명의 원수를 급히 파견하여 이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 조준도 원수 자격으로 출전했다고 나와있다. 이후 최영이 실각한 뒤 새로이 관리들이 임명될 때,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라는, 현재로 보면 거의 비서관+검찰총장이라는 상당히 큰 관직에 임명되었다. 물론 권문세족 출신의 신진사대부라는 중립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라든지, 여태까지 큰 흠이 없었고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기에 임명이 된 것일 수도 있다. 이 해에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그동안 쌓인 여러 폐단을 혁파해야할 필요성을 느꼈지만, 무장인 이성계 혼자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조준이 인물이라는 말을 들은 이성계는 조준을 불러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야기를 해보니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닌듯하자 이성계는 크게 기뻐하며 '''조준을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것처럼''' 대하였고, 자신을 그렇게 후하게 대접해 주자 조준도 기뻐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성계를 위해 적극 협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