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조/생애 (문단 편집) === 완 전투([[장수(삼국지)|장수]]와의 대결) === 조조는 먼저 남양을 점거하고 있던 군벌 [[장수(삼국지)|장수]]에게 선공을 개시했고, 장수의 배후에는 유표가 있었다. 당시 유표는 형주를 점거하여 안정된 강역을 유지한 채 중앙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았고, 장수는 유표의 사주로 막 남양을 점거한 채 전적으로 유표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남양이 남으로는 한수를 경계로 형주 본토와 맞닿고, 북으로는 허도와 지근거리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유표의 존재는 조조에게 심각한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순유는 유표와 장수의 결속이 아직 깊지 않으니, 직접적인 개입에 나서며 결속의 명분을 주기보다는 느슨히 내버려 두면서 이들의 분열을 유도해야 한다는 요지의 진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조의 군대가 도착하자 장수는 의외로 맥없이 항복했는데, 장수가 부득이하게 유표의 수하 노릇을 하고는 있었지만 장수에게 유표는 숙부 [[장제(후한 군벌)|장제]]의 원수이기도 했다.[* 장제가 유표와의 싸움에서 죽고 장수가 군권을 물려받자 유표가 장수를 회유해 남양에 주둔시켰다.] 이미 장수와 유표의 결속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않기 때문에 이를 흔들면 무너뜨릴 수 있다는 조조와 참모진이 의도했던 바에 가까워 보이며,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순유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지만, 결국 장수가 맥없이 항복했기 때문에 이는 기우에 그치는 듯 했다. 그러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고, 이는 철저히 조조 개인의 방심과 추태로 인해 비롯되었는데 조조는 장제의 처이자 장수의 숙모인 추씨를 범해 장수의 격분을 샀고, 장수가 이를 원망하는 것을 알고는 그 참에 장수의 측근들까지 회유해 장수를 숙청하려 했기 때문이다.[* 장수전에서는 추씨의 일로 장수가 원한을 품었고, 조조가 이를 알고 은밀히 장수를 죽이려다 누설되어 습격을 당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배송지의 주석으로 조조가 호거아에게 금을 내리자 장수는 측근들을 매수해 자기를 치려 한다고 여기며 분노했다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모욕에 가까운 조조의 노골적인 무시와 추태에 격노한 장수는 모반했고 조조는 장수의 습격을 받는다. 조조가 타고 있던 말의 이름은 [[절영]]이었는데 날아온 화살에 맞아 뺨과 다리에 상처를 입었고 아울러 조조의 오른쪽 팔에도 화살이 적중했다고 한다. 아들 [[조앙]]이 말을 탈 수 없어 조조에게 말을 바치니 조조는 살았으나 조앙은 죽었다. 이 사건으로 [[조안민]], [[조앙]], [[전위(삼국지)|전위]] 등이 희생되었다.[* 이일로 조앙을 친아들로 여겼던 정실 정부인과 이혼했다.(정부인이 조조를 떠난거지만 훗날 조조가 재결합을 하려고 했지만 문전박대만 당한다.) 그리고 조앙의 죽음으로 인해 조위 황조는 정통성이 완벽한 후계자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서 계속 후계자와 관련된 정통성 문제로 고통받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에 조조는 군을 이끌고 무음(舞陰, 남양군 무음현)으로 돌아갔는데, 장수가 기병을 이끌고 와서 노략질하자 조조가 이를 격파했다. 장수는 양(穰, 남양군 양현)으로 달아나 유표와의 연대를 공고히했다. 조조는 제장들에게 >"내가 장수 등을 항복시켰으나 실수로 인질을 잡아 두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소. 내가 패한 이유를 알만 하오. 제경(諸卿)들은 이를 잘 살펴 지금 이후로 다시 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라고 말하곤 허도로 돌아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