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위정통론 (문단 편집) == 남북조 시대 이후 == 이런 중국의 오랜 혼란기를 끝낸 [[당나라]] 시기에 조위·서진의 창업자 조조와 사마의에 대한 평가는 더욱 낮아진다. [[태종(당)|당태종]]은 사마의를 두고 '선제의 탁고를 받은 주제에 그 흙이 마르기도 전에 나라를 들어 엎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데 제대로 된 충신이 맞긴 하느냐?' 고 신랄하게 까버렸고 그것이 당나라가 편찬한 정사서인 진서에 남았다. 즉, 사마씨의 서진왕조 역시 제대로 된 왕조는 아니라는 식으로 냉소적인 평가가 남아버린 것이다. 반면 이 시기 이후 촉한에 대한 각종 야사나 전설들은 끝임없이 민중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서민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송나라 시기에 가면 이것이 중국 민중들 여론의 대세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탄생된 것이 바로 [[삼국지평화]] 같은 촉한 중심의 문학들이다. 이 시기 역사가들의 입장도 처음엔 '조위가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서진으로 이어졌으니 정통이 아니겠느냐'는 논리에서[* 사실 북송 초·중반은 잠깐 조위정통론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유는 송나라가 선양을 통해 건국되었고 이전의 선양들과는 달리 어쨌든간에 전 황실을 살려주었기에 조송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선양에 두었고 그랬기에 똑같이 선양-구 황실 보존을 밟은 조위를 정통으로 쳐준 거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 주장하는바와 같이 '천하를 다 온전히 아우르지도 못했는데 조위가 어째서 정통이 될 수 있느냐?'라는 무정통론으로 변했으며 남송의 학자 주자는 아예 유교적 관점에서 '조위는 제대로 된 명분이 없는 역적이 찬탈한 왕조인데 어째서 정통인가?' 라며 촉한정통론을 긍정해버렸다. 이후 주자의 영향을 받은 후대 학자들과 사가들이 이를 따르면서 조위에 대한 평가는 자연스레 박해질 수 밖에 없었다.[* 괜히 이런 기류하에서 단순 악당 두목으로 격하된 조조를 '난세의 간웅'이라며 위상을 높인 [[나관중]]이 무작정 촉빠라고만 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전근대 중국은 유교적 역사관에 입각하였기에 사회 상층부에서는 조위정통론과 촉한정통론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촉한정통론이 정론으로 정착하는 듯하였으며 여전히 민간에서는 촉한정통론이 절대적으로 우세였다. 결국 이렇게 부정적인 평가가 시대를 거지면서 계속 쌓이고 쌓인 것으로 인해 중국 민중뿐만 아니라 지배층 및 사회 상층부에 해당하는 정치인이나 학자들조차도 조위의 정통성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보게 된 것이다. 민중은 민중 나름대로 조위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상류층의 여론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에서 조위정통론은 크게 후퇴하게 되어 촉한정통론이 확고해지게 되었고 결국 후일 동아시아 사회에서 유교정치가 무너지고 근대화에 들어서게 될 때까지 조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주류가 되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