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위정통론 (문단 편집) === 남조 === 한편 서진이 멸망하고 사마씨는 건강으로 이주해 동진을 새로 세우지만 황제의 권위는 이미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심지어 동진의 [[원제(동진)|중종 사마예]]는 통치 과정에서 [[왕도]]의 도움을 많이 받아 옥좌에 같이 앉자고 제안한 적도 있어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공유한다(王與馬 共天下. 심지어 사마씨보다 왕씨가 앞에 쓰여있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군권은 이미 각지의 군벌이나 호족들이 나누어 가진 상태에서 황권은 약하고 서진 멸망 이후 북쪽에서 도주한 명문귀족들이 사실상 정치를 좌지우지하였으며 동진의 황제들 역시 일찍 요절하거나 혼군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이은 북벌에서 뛰어난 군사적 실적으로 추락한 한족의 명예를 드높힌 동진의 명장이자 권신인 [[환온]]은, 뛰어난 군사적 역량과 실적으로 새왕조를 개창한 조조와 사마의와 마찬가지로 대놓고 사마씨의 왕조를 찬탈하고 자신이 황제에 오를 것을 적극적으로 도모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론의 형태로 촉한정통론의 입장을 최초로 개진한 [[습착치]]의 《한진춘추(漢晉春秋)》가 나왔다. 《한진춘추》는 후한 광무제로부터 서진 민제까지의 역사가 저술된 역사서이다. 《한진춘추》의 핵심 논리는 삼국시대 때 조위는 후한 헌제를 협박하여 거짓 선양을 받은 역신 조비가 세운 나라이므로 사마염이 조위로부터 선양받아 진나라를 세운 것 역시 정통성에서 유효하지 못하며, 오히려 사마소가 [[촉한멸망전|촉한을 평정함]]에 따라 한이 완전히 멸망했고 그걸 이어받은 진나라가 흥했다고 평가하여 하늘의 뜻은 세력이 있다고 권위를 강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책의 이름도 한나라와 진나라의 역사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한진춘추》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동진의 신하 습착치는 권신 환온의 찬탈을 막기 위해 그 당시 기존의 주류 입장인 조위정통론을 부정하고, 민중 사이에선 긍정적으로 보였을지언정 지배층에선 명백히 비주류 이론이었던 촉한정통론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단순히 생각해보면 동진은 조위의 계승자 서진의 후신이다. 따라서 후한-조위-서진-동진이라는 연결고리를 정통으로 보는 기존의 주류 정통론인 조위정통론의 논리를 그냥 답습하고 이론적으로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동진을 찬탈하려는 환온은 이러한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천인공노할 역적이라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도출된다. 이런 단순명쾌한 논리를 놔두고 습착치는 왜 후한과 진나라 사이로 다른 나라인 촉한을 끌어와 기존에 주류로 취급되던 계보를 비틀어버리는 복잡한 논리적 곡예를 시도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조씨와 사마씨의 왕업이 너무나도 부도덕하고 탈법적인 과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마씨는 조위에게 선양을 받는 과정에서 황제를 멋대로 폐위시키고 [[조모(삼국지)|현위 황제]]가 백주대낮에 정권의 수하에 의해 시해당했다는 충공깽의 사태를 일으켰다. 한마디로 시작부터 정권의 명분, 이미지나 정통성은 그야말로 시궁창으로 처박히고 말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조위 역시 실상 말이 선양이지 후한 황실을 겁박하고 후한의 충신들을 도륙하여 반대 세력을 없애고 그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애시당초 황제의 선양이라는 방식 자체가 전근대 시기 만고의 역적 '''[[망탁조의]]'''의 선두에 서는 왕망이 처음으로 시도한 방식으로 위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을 쓴 찬탈을 미화하기 위해서 본래 '덕이 있는 자에게 자발적으로 군주가 자리를 양보한다(고 일단은 알려져 있던)' 개념인 선양의 의미를 변질시킨 것이며 당장 조씨와 사마씨의 행적부터가 이런 변질된 선양이라는 의식의 본질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사실 사마씨의 찬탈 자체가 명분이 없었다. 사마사의 경우에는 대놓고 일찍부터 조씨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다고 나오며 이 때문에 조위를 옹호하던 아내 하후휘와 갈등하던 끝에 '''그녀에게 독을 먹여 죽였을 정도'''였다. 사마의까지 정말 충심이 없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사마사는 명분이 있고 없고에 관계 없이 그냥 조위의 자리를 찬탈하고 싶었다. 이러니 사마씨 찬탈 과정이 후세의 눈으로 보기에 지극히 비정상적인 건 오히려 당연하다.] 본래 군웅할거 시기 최고의 실력자인 원소 산하의 그저그런 군벌에 불과했던 조조는 [[순욱]]이 제안한 협천자 이념을 등에 업고 후한 황실을 보위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헌제 황실을 [[동탁]]의 괴뢰로 규정한 원소를 꺾고 패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말기의 조조는 협천자로 후한 황실을 되살리려 한 순욱을 숙청하고 위공·위왕에 연달아 오르면서 자신을 있게 해준 협천자 논리를 사실상 스스로 부정해버렸고 후한 황실은 조조에게 망한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 유비의 한중왕 선포가 먹힌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사마씨는 아예 백주대낮에 황제를 죽였다.[* 후손인 동진의 2대 황제 사마소조차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나라가 오래 갈 수 있겠냐'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전대의 왕조들이 보여준 것들이 이런 상황인데 '''사마씨의 위상과 세력이 땅에 떨어진 이 상황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한족의 자존심을 세워준 능력자 환온이 새 왕조를 개창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외려 환온은 보는 관점에 따라선 조조와 사마의 이상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민족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조조나 사마의는 어디까지나 한족 내부의 분열기 때 군공을 쌓은 케이스지만 환온은 한족을 핍박한 외부의 이민족을 상대로 군공을 올린 케이스라 훨씬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습착치는 사마씨 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새로운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제로는 조위와 서진 둘 다 개판이었지만, 저술에서 조위는 개판이 맞다고 기록하고 서진은 개판이 아니라 정통성 있는 국가라고 띄워 주었다. 조조는 백성들과 한실을 겁박했던 간적이라는 명분으로 협천자 논리를 부정했다. 결국 한나라가 조위에게 멸망당하자, 그 옛날 한고조·광무제처럼 유비를 중심으로 역적들과 난신적자들을 토벌해 한실을 부흥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새롭게 일신된 제3의 한나라[* 전한과 후한이 같은 유씨 왕조라도 그 성격이 상당히 다르듯이 유비가 세운 촉한 역시 한나라이긴 하나 후한과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즉 촉한의 성립은 그저 후한의 부활이 아닌 새로운 형태로의 재생인 것이다.]인 촉한이야말로 진정한 한나라의 정통인데, 사마씨가 이를 정복해 정통 한나라의 권위가 진나라로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촉한을 멸망시킨 사마소는 이런 명분으로 진나라를 봉국으로 세워 진왕이 되었고 사마염은 이 진왕의 자리를 이어받고 선양받아 황제가 되었다. 즉 촉한이 멸망하고 2년 뒤에 그 정통성을 흡수해 진나라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습착치의 저서가 배송지 주석의 주요 사료 중 하나로 자주 채록된 것은 습착치가 분명 진나라를 위해 쓴 사서임에도 진나라 건국의 치부를 상세하고 공정하게 서술하고 정사 삼국지마냥 사마씨의 문제를 아예 없애거나 미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조위는 당연히 촉한의 주장대로 후한 황실을 찬탈한 역적이 되기 때문에 조위의 정당성과 정통성은 부정된다. 적어도 후한 황제의 목숨은 살려줬던 조위와는 달리 사마씨가 조위 황실을 겁박하고, 심지어 황제를 백주대낮에 비명횡사하게 만들었다 해도 그것은 애초에 조위 자체가 제대로 된 정통이 아닌 이단이고 역적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는 얘기다. 즉 촉한을 흡수해 정통성이라는 바통을 이어받은 서진 황실이 정통성이 결여된 조위 황실을 핍박한 것이기 때문에 황제가 시해당했든 어쨌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논리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기존의 후한-조위-서진이 아니라 후한-촉한-서진으로 정통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서진이 촉한을 흡수통일하여 정통을 이은 것이니 비록 서진이 조위에서 선양받아 비롯되어더라도 조위는 정통과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결국 애초에 조위나 서진이 제대로 된 대의명분이나 정당성·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거나, 혹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천하를 올바르게 통치해서 중원을 온전히 보존했다면 이런 논리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제 발등 찍는 격인 조위정통론의 부정은 조위-서진 정권의 자업자득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습착치식 논리도 결코 완벽하진 않다. [[진태조]]가 조조-조비-조예-조방 라인까지 섬겼기 때문. 어느 쪽으로도 사마씨의 집권 명분에 흠은 생긴다. 그나마 조조 같은 역적 집안에게서 물려받은 명분보다는 정통 통일 왕조인 한나라를 멸하고 얻은 명분이 더 먹히니까 그쪽을 택했을 뿐.] 이런 면에서 환온의 찬탈을 막기 위해서 노력한 동진의 재상인 [[사안]]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사안은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은 환온에게 그런 불온한 야심을 접고 동진의 신하로 남아달라는 부탁을 하며 "제갈무후가 되어 달라"고 말한다. 조위와 서진, 동진에도 많은 신하들이 있었을 텐데 사안은 왜 오래 전에 사라진 촉한의 재상인 제갈공명을 굳이 범례로 들 수밖에 없었을까? 조위의 공신들은 후한 황실을 버리고 권신 조씨를 따라 위나라를 세웠고 그들의 자손은 조위 사직이 위태로워지자 바로 조위를 버리고 [[권신]] 사마씨에게 협력해 서진의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나라 꼴이 어떻게 되던 말던 흥청망청 황음무도를 달리다 중화의 중심지인 화북을 이민족에게 빼앗기고 강남으로 달아나기에 급급했고, 강남으로 처박히고서도 끝까지 정신을 못 차렸다. 반면 제갈공명은 선황제가 황제가 되어도 상관 없다는 유조까지 내렸고 막대한 권한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멸사봉공하여 한실부흥이라는 대의명분을 지키고 사직과 유씨 황실의 권위를 살리고 한황실을 복권시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한 인물이었다. 또한 제갈공명의 아들과 손자는 끝까지 촉한의 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또 그의 후계자(장완, 비의, 동윤, 강유)들은 모두 촉한이라는 국가를 위해 진력하다가 힘이 다해 스러질망정 촉한이라는 국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흥시키고자 했다. 한마디로 조위-서진(그리고 동진) 사직엔 능력이 있고 권력을 가졌을 망정, 나라와 백성·사직에 정성과 의리를 다하는 자세를 가진 모범적인 신하의 사례로 '''다른 나라의 명신을 내세워야 할 정도로 거론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얘기다.[* 굳이 충신을 들자면 왕도 같은 인물이 있기는 한데 인지도가…뭣보다 업적이 떨어진다.] 물론 동시대 전진의 명재상인 왕맹을 두고 촉한의 제갈량과 같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제갈량이란 인물이 삼국시대가 끝난 이 시대쯤 오면 나라와 나라 사이를 초월해 과거의 위대한 인물로서 평가가 정립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동진은 환온의 아들 [[환현]]에 의해서 사실상 멸망하고 [[송무제]] 유유에 의해 그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찬탈당하고 만다. 송무제는 자신을 한나라 황족인 초원왕 유교(劉交)[* [[고제(전한)|한고제 유방]]의 동생]의 후예로 칭하면서 촉한정통론을 떠받들었으며 이후 남조의 역사가들은 더 이상 굳이 조위정통론을 내세울 이유도 없어졌고 그에 따른 조위-서진에 대한 미화를 할 이유가 없어졌다. [[배송지]]는 황제의 명을 받아 정사 삼국지에 여러가지 다른 시각을 가진 사서들을 주석으로 달아 진수가 조씨와 사마씨를 위해 숨기거나 미화한 부분, 사서들의 잘못된 부분들을 비판했으며 습착치의 사론을 주석으로 달아 조위와 서진이 부정하려고 했던 촉한이라는 국가의 대의명분에 대해 다시 평가했다. 또 청나라의 고증학자 조익이 그의 저서 22사차기에서 지적했듯이 이보다 좀 더 후에 지어진 범엽의 [[후한서]]는 정사 삼국지가 미화하거나 얼버무리거나 숨기려 한 조조의 여러 행적들을 노골적으로 가감 없이 드러내 조조의 행동이 정권찬탈을 위한 목적이었음을 확실하게 기술하고 있다. 통일 제국이었던 서진이 북조에게 수도를 비롯한 주요 지역을 빼앗기고 멸망했고, 서진의 방계 황족이 간신히 남쪽으로 도망쳐 동진을 세우고 진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수도를 먹었으니 정통이라는 주장이 포함된 조위정통론을 인정해 버리면, 구 서진의 중심지역을 장악한 북조에 정통성이 있다고 해도 할 말 없어지는 상황이 되는지라 남조 입장에서는 조위정통론을 내세우기가 곤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