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용필 (문단 편집) == 여담 == *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1981년에 [[http://blog.daum.net/634756/17203847|그 사랑, 한이 되어]]라는 로맨스 영화[* 내용에 로맨스가 들어가긴 하는데, 실상은 조용필의 노래를 소재로 만든 음악 영화이다.]에 주연으로 나온 바 있다.[* 상대역은 [[유지인]]이고, 위대한 탄생 멤버들도 출연했다. 훗날 조용필은 이때의 경험이 너무나 쑥스러워서 두 번 다시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http://blog.naver.com/grappler39/10025604352|다른 포스터]] 이 영화는 이후로 묻혀져서 그야말로 보기 어려운 영화가 되었다가 2009년에 팬들이 소규모 재상영을 가졌다. 그래도 [[한국영상자료원]]이 필름을 보관하고 있어 이따금 틀어주기도 한다. 근래 상영은 2017년 10월 18일과 20일로 되어있다.[[https://www.koreafilm.or.kr/movie/PM_007081|#]] * 트로트 가수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원래 [[락 밴드]]로 미8군 무대에서 음악을 시작한 사람이다. 이는 초기 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용필의 음악은 락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엄연히 말해서 지금도 본인의 락 밴드인 [[위대한 탄생]]의 [[보컬리스트]] 겸 세컨 [[기타리스트]](리듬 기타리스트)이다. 반 세기를 해 온 만큼 기타 실력 또한 뛰어나며, 2000년대 이후에는 기타리스트임을 강조하지 않고 있지만, 기타 연주(특히 [[전기 기타]]) 잘 하는 가수로 알려져 있던 80-90년대 앨범이나 위대한 탄생 공연 포스터에는 대부분 기타를 들고 있다. 물론 현재도 공연 중에 자주 기타를 든다. * 조용필의 노래 허공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뮤직비디오를 찍은 노래'''며 이 뮤직비디오에는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혜수]]가 출연'''했다.[[http://www.youtube.com/watch?v=NC1OrPvK7us|#]][* 상대역은 조용필 본인이다.] *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을 때 [[신해철]]이 속해있던 [[무한궤도(밴드)|무한궤도]]의 곡 '[[그대에게]]'의 강렬한 전주에 꽂혀 바로 대상감으로 점찍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실제로 무한궤도가 대상을 거머쥐었다.]]''' [[그대에게]]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그대에게'의 전주는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끌기 위한 [[신해철]]의 전략이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왕'''에게 먹혔으니 제대로 성공한 셈이다. [youtube(SaSK2pEbkgY, width=400, height=300)] *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조용필도 이를 염두에 두고 '서울 서울 서울'을 만들었으며 본인이 직접 88올림픽 D-100기념 축제에서 밝혔다. 다만 1988년 서울 올림픽 주제곡을 노리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곡 자체는 주제곡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조로 구성되어있다. [youtube(zNXctKc4gkA, width=400, height=300)] * 한때 일본에서도 가수로 왕성하게 활약했다. [[1990년대]] 초, [[한류]]라는 단어조차 형성이 안 됐을 때, 이미 조용필은 일본인에게도 잘 알려진 한국의 가수였다. [[엔카]], [[록 음악]], [[발라드]] 등의 뮤지션으로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일본에서는 주로 엔카 가수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조용필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想いで迷子(오모이데마이고, 추억의 미아)'[* 이 곡의 작사가와 작곡가는 [[めだかの兄妹]]로 유명한 아라키 토요히사(荒木豊久)와 미키 타카시(三木たかし, 본명 渡邊匡)다. 이 곡 외에도 조용필이 일본에서 발표한 곡들의 작사와 작곡을 맡았다.]는 전국적으로 대히트, 일본 내에서 100만장 이상을 판 플래티넘이 되었다. [[1994년]] 기준으로 일본 내 조용필의 음반 누적 판매량은 공식적으로 600만장, 비공식적으로는 800만장이라고 하나, 이는 과장된 면이 많다. 우선 조용필의 일본 내 최대 히트곡인 '想いで迷子'는 1986년에 발표된 후 1987~1988년에 걸쳐 꾸준히 사랑받은 히트곡은 맞다. 오리콘 주간 최고 순위는 13위이지만 1988년까지 꾸준히 팔려 1988년 오리콘 싱글 연간 차트 35위를 차지하였다.[* 1980년대 당시는 오늘날처럼 온라인 예약이 활성화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주간 최고 순위는 그저 그렇지만 꾸준히 팔려서 연간에 드는 경우도 흔했다. 엔카 음반은 오늘날에도 비슷한 추이를 보이는 음반들이 꽤 된다.] 그러나 100만 장이 팔렸다는 것은 과장이 심하게 들어간 것이다. 일단 1988년 연간 차트에서 '想いで迷子'가 기록한 판매량은 [[http://the-musicbox.net/japan_singles_1988.html|21.8만 장]]이다. 그런데 '想いで迷子'는 1986~1987년 연간 차트에는 못 들어갔고, 1986년, 1987년 연간 차트의 50위 작품 판매량은 19.3만 장과 15.3만 장이다. 즉 '想いで迷子'가 1986~1987년에 연간 50위권에 아슬아슬하게 못 들어갔다고 가정해도 총 판매량이 19.3+15.3+21.8=56.4만 장을 넘을 수가 없다. 최대 히트곡인 '想いで迷子'가 이 정도고, 또다른 대표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26만 장 정도가 팔렸다고 하니, 조용필의 총 음반 판매량이 600만 장을 넘었다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상 조용필의 소속사 측이 일본 내 인기를 과장/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일본에서의 음반 판매 기록으로는 [[김연자]]가 더 많이 팔았다. 1980년대까지 국내와 일본에서 잘 알려진 남성 트로트 장르 가요는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는데, 조용필 이후 일본에서의 인지도 1위 남성 트로트 가요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뀌었다. 국내에서도 김정구 사후 '눈물 젖은 두만강'이 점점 잊혀 가고 있는 데 비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아직도 줄기차게 불리고 있다. 그 외에 조용필은 '想いで迷子' 외에도 '夢夜舟(꿈의 밤배)', '愛の共犯者(사랑의 공범자)', '紅い落葉(붉은 낙엽)', '悲しみのゆくえ(슬픔의 행방)' 등의 여러 곡을 발표했다. || [[파일:DdymRZGVQAA-qZ2.jpg|width=100%]] || || 일본 활동 당시 1987년 KBS 가요대상에서 [[마츠다 세이코]]와 인터뷰하는 조용필 || * 다만 일본 활동 당시 판매량 문제와는 별개로 한국을 대표하는 인기 가수로서 사실상 국가대표급 대우를 많이 받았다. 특히, 한국 쪽의 푸시도 엄청났는데, 당시 일본 인기 엔카 가수들을 한국에 초청해 합동 공연을 열기도 했고 한국 지상파에도 나왔다. 그리고 인기 엔카 가수들이라고 보기도 무리도 많은게 가장 친했던 [[타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나카지마 미유키]]와 같은 장르를 하는 뮤지션이다. 본의 아니게 엔카 느낌의 노래를 만들기는 했지만, 본질은 [[사다 마사시]]와 나카지마 미유키처럼 포크 가수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라 당시 일본 가수에겐 상상도 못할 일이라 임팩트가 컸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임팩트가 컸는지 반대로 일본 문화가 다시 한국을 파고든다며 이를 비난하는(...)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그리고 조용필이 초청한 일본 가수들과 친분이 있는 일본 가수들은 일본 내에서도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고 또한 추억의 가수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절친인 타니무라 신지의 경우는 'いい日旅立ち(좋은 날의 여행)', '昴(묘성)'과 같은 세기의 명곡들을 남겼으며, 특히 'いい日旅立ち'는 불세출의 가희인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장 대표적인 곡으로 꼽히며[* 1979년 [[일본국유철도]]의 DISCOVER JAPAN 캠페인의 BGM으로 쓴 노래로 유명하다.], 그 작사 작곡을 맡은 게 다름아닌 타니무라 신지였었고 또한 조용필도 'いい日旅立ち'를 불렀다. 또한 호리우치 타카오, 모리 신이치, 후세 아키라[* [[올리비아 허시]]의 두 번째 남편으로 유명하고, 재일교포설도 있던 가수다. 'カルチェラタンの雪(카르체라탕의 눈)'을 불렀는데, 조용필이 음반으로 발매한 적이 있다.] 등과도 친했으며 탁월한 음악적 재능과 가창력을 보인 가수들이었다. 그로 인해 조용필을 좋아하는 노인들 중에서 조용필로 인하여 일본 노래를 접한 사람들도 많아지기도 했다. 현재도 한류가수들의 인기의 척도로 종종 거론되는 [[NHK]] [[홍백가합전]]에 4년 연속(1987~1990년)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최후의 출연이던 1990년 같은 경우 서울 [[롯데월드]] 현지 중계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부른 곡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참고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 [[기네스북]]에서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외국 가수의 노래' 로 등재되었으며, (약 30회 이상) 일본 내에서도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일본에 진출한 한국배우/한국가수를 통틀어 가장 높은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다. 2002년 20대를 겨냥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위였다.[* 그리고, [[배용준|욘사마]]가 [[겨울연가]]로 센세이션하게 유명해지고 K-POP이 일본을 강타하면서 이제는 후배들에게 1위 자리를 내줬다.] * [[천재]]라고 불리는 비운의 가수 [[유재하]]의 최고의 [[히트곡]]이자 명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사실 조용필 음반에 먼저 수록되어있다. 위대한 탄생의 멤버였던 당시 새파란 20대의 청년이던 유재하의 재능을 꿰뚫어보고 ''''너 곡 좀 써봐라'''' 라고 부탁을 했고 유재하가 감격해서 1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한 곡만 쓰여서 유재하가 실망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 유재하가 참여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도 똑같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 좀 써오라고 하니까 혼자서 있는 곡 다 가져다줬는데 형평성 맞춘다고 멤버당 한 곡씩만 넣어서 유재하가 삐져서 봄여름겨울을 나갔다고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 김현식 특집에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밝혔다. 이때 김현식에게 가져다준 곡은 명곡인 '가리워진 길'이다. 그 10곡은 이후 유재하 1집의 수록곡이자 그의 유작 음반이 된다. * 조용필은 대중문화에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아이들이 보는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서도 조용필의 '[[친구여]]' 가 배경음악으로 나온다.[* 2화 초반의 장면에서 '조용팔'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그리고, 친구여 이후에 [[전영록]]의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도 나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이 노래도 한 시대를 대표할 정도로 유명했던 대히트곡이었다.] 그 노래를 들은 둘리는 크게 기뻐하고 감격하면서 노래를 따라부르며 눈물을 쏟는다.[[https://youtu.be/6_O5gHgxJ0Y?t=1125|#]] * 1980년대 엄청난 인기 가수였지만 당시 연예인을 무시하던 사회풍조 탓에 황당한 시비도 많이 당했다.[* 지금은 작고한 중견가수였던 고 박상규 역시 경험했던 적이 있다. 공연이 끝나고 한적한 곳에서 식사중 그 지역 불량배가 와서는 너 혼자 쳐먹냐는 식으로 반말짓거리로 시비를 걸어서 그냥 무시하고 식사를 계속했는데 그래도 시비를 계속걸자 홧김에 주먹을 날렸더니 마치 고목나무가 쓰러지듯 넘어졌다고 한다. 후일 후배들이 이 사건을 얘기하면서 '대단하다'고 하니 박상규 왈, "그 친구가 약하니까 단방에 간거지 뭐." 라고 했다. 지금이야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연예인이란 직업은 그야말로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 풍토가 만연했었다. 만에 하나 자녀들이 장래희망을 연예인이라고 했다가는 '미쳤냐!?' 아니면 [[뿌리깊은 나무(SBS)|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대왕이 일갈할 때 쓴 표현이 나올정도로 험악한 반응을 각오해야 했다. 연예인을 일컫는 멸칭이 '딴따라'였고 오죽하면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주일]]이 '딴따라가 무슨 정치를 한다고'란 세간의 조롱을 받지 않기 위해서 의정활동을 열심히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1985년에는 카페에서 함께 술 마시자는 제안을 거절했다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전치 5주의 부상을 입기도 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072900209211006&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07-29&officeId=00020&pageNo=11&printNo=19637&publishType=00020|#]][* 바로 위에서 설명한 영화에도 이런 장면이 등장했다.] * 1991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KBO 리그]] 개막전에 초청되어 [[애국가]]를 열창하다가, 마지막의 '길이 보전하세'를 '우리나라 만세'로 잘못 부른 적이 있다. 본인은 '카메라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서'라고 해명했지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어쨌는지 이후 애국가를 부르는 초청 자리에는 가지 않고 있다. * 1993년 해운대 콘서트에서 1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적으로 치러냈으나, 1992년 서태지의 등장과 더불어 "슬픈 베아트리체", "고독한 러너" 등이 실린 14집과 "남겨진 자의 고독"의 15집이 흥행 실패하며 일시적인 침체기에 돌입했었다. 조용필 본인도 신해철의 음악도시에 출연해 이 시기를 가장 아쉬운 시기로 언급하기도 했다. 94년 안진현과 재혼 및 전담 밴드인 위대한 탄생과 재결합하며 비로소 방송 활동을 재개하며 16집 "바람의 노래"로 모처럼 대중의 반응을 얻었다. 이후 1998년 올림픽공원에서 30주년 공연 콘서트 및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 공연이 흥행하며 다시금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고, 1999년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첫 공연(대중가수로는 처음)을 치르며 "가왕" 이미지를 굳혀가기 시작한다. 한동안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을 연말 마무리 콘서트장으로 삼았다. * 2003년 데뷔 35주년 공연부터 잠실 주경기장 공연을 즐겨(?) 개최하기 시작한다. 2005년에 북한 공연 이후 다시 잠실 공연을 하게 되는데 공교롭게 2003년과 2005년 모두 제대로 비를 만나는 바람에 관객들은 우비를 입고 스탠딩으로 물 반 땀 반 야광봉을 흔들었다. 조용필 본인도 05년 공연은 특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중간에는 스스로 신난 나머지 "비 상관없지 않아요??" 드립을 시전하시다 "비가...음... 조금 덜 오네요" 라고 민망해하며 수습하기도 하였다. (팬들에게는 이런 썰렁함이 매력이기도 하다.) 뒤로는 다행히도 비는 피했으나 2018년 5월 12일 50주년 콘서트때 [[http://entertain.naver.com/ranking/read?oid=052&aid=0001144859|하루종일 비가 왔다(...).]] * 2010년 5월 28~29일 열린 콘서트(Love In Love) 에서 잠실 주경기장에 10만명의 관객을 모으며[* 하루에 5만명씩 총 1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60세의 나이에도 라이브로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역시나 황제라는 것을 보여줬다. 관객들은 대부분이 4~50대였지만, 노래를 부를 때 열광하는 건 20대로 돌아간 듯 했다고 한다. 특히나 본 공연의 수익금은 소아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기부했는데, 그 액수만도 수십억원대에 달한다.[[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0&no=310644|#]] * 어쩌다보니 군가 [[진짜 사나이]]를 널리 알린(?) 가수이기도 하다. 1980년대 당시에는 음반 발표시 꼭 [[건전가요]](...)를 넣도록 되어있었는데, 7, 8, 9집에다가 건전가요로 진짜 사나이를 자신이 직접 불러넣어둔 것이다. 다만 재발매본에서는 빠져있다.[* 지금으로선 이해가 안되지만 당시엔 가요 음반마다 널리 알려진 가곡이나 동요들이 1곡씩은 꼭 들어 있었다. 조용필의 경우에도 [[겨울나무]]가 있었던 적이 있고, [[변진섭]]의 1집에도 [[과수원 길]]이 수록되어있었다.] * 조용필 콘서트에 갔었던 아티 콘펠드의 말로는, 조용필의 [[우드스탁]](미국 오리지널 말고 한국에서 개최된 우드스탁을 말한다)의 참가는 그의 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가수 가운데 이 사람한테 뭐라고 할 수 있을만한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한국 락의 대부인 [[신중현]]이나 조용필 스스로도 존경하는 가수라고 밝힌 [[패티 김]] 정도다.[* 한국 스탠더드 팝 최고의 디바로 불린 가수로 197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최초로 공연을 했다. 조용필 이후 한국인 두 번째로 미국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한 가수로 최근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줬지만 2012년 2월 15일에 은퇴 기자회견을 가지고 6월부터 은퇴 공연을 갖는다. 대표곡만 해도 600곡 이상이 되는 가수.] 재미있는 사실은 패티 김은 자신에게 국민가수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진정한 국민가수는 조용필과 [[이미자]]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는 것이다. * 1980년대 후반 '''연말 시상식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이유는 알다시피 '''조용필의 독주 체제에 제동을 걸만한 가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 조용필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KBS, MBC의 가수왕자리를 계속 차지했는데[* 당시 KBS는 전년도 대상 수상자가 나와서 발표를 했는데, 3년 연속 대상을 타던 1983년에는 본인도 헛웃음을 지으면서 [[http://youtu.be/ee3RCWSf_X4?t=5m10s|"접니다...조용필"]]이라고 발표했다.], 예외적으로 MBC에서 1982년 [[이용(가수)|이용]][* 이때 이용의 가수왕 수상이 말이 많았다. MBC에서는 팬들의 우편에 의한 투표로 비밀집계로 가수왕을 뽑았는데, 성난 조용필의 팬들이 투표 공개를 요청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MBC는 말도 안되는 해명을 하는데, 그 이유가 조용필은 너무 많은 상을 탔기 때문에 다른 가수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조작을 했다는 것을 MBC가 인정했던 셈이다.], KBS에서 1984년에 [[김수철(가수)|김수철]], 1986년에 [[전영록]]이 가수왕을 차지했다. 또한 이것은 스스로의 의지기도 했다. *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대표주자였던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우승자에게 골든컵을 준 다음 명예 졸업을 시키는 시스템은 조용필의 히트곡이 1위를 너무 독주해서 그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사실상 그 이유가 맞다고 봐야 한다. 골든컵이 처음 도입될 때는 5주가 아니라 10주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 2011년 4월 15일엔 작년에 한 약속[* 영국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소록도에 방문 공연을 했었다. 조용필은 약속된대로 그 연주에 맞춰 본인의 잔잔한 대표곡 2곡만을 불렀는데, 노인들이 너무 아쉬워하자 곧 다시 공연을 하러 오겠다고 약속했다.]을 지키기 위해서 '''[[소록도]]'''를 방문해 공연을 했다. 2009년 전남 고흥과 소록도를 잇는 다리가 완공된 이후 많은 가수들이 위문차 방문하였고, 그 때마다 다시 오겠다는 [[개드립|약속]]을 했는데, 진짜 다시 방문한 사람은 조용필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는 소규모 강당에서 즉석에서 요청곡을 받고 중간에는 무대에서 내려와 같이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노래를 부르는 등 주민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10416031525565&p=chosun&scrollTo=writeForm|#]] * 2011년 5월 7일 서울 [[올림픽공원(서울)|올림픽공원]] 콘서트를 시작으로 2개월간 전국 투어를 열었다. 이번에는 관객 앞으로 움직이는 무대를 선보였다. 그리고 2011년 [[http://sports.donga.com/Feed/EnterKisa/3/02/20111228/42933940/3|올해의 콘서트 티켓 최다 판매 가수]]의 기록을 세웠다. 2위는 [[이승철]]인데 이승철이 29회 공연한 반면 조용필은 이에 절반인 14회 공연만으로 티켓 파워에서 앞섰다. * 2013년 4월 23일 정규 19집 [[Hello(조용필 음반)|Hello]]의 발매가 확정되었다. 4월 16일 선공개곡 'Bounce'가 발표되었는데 발표되자마자 음원차트 1위를 찍었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은 가수가 차트 1위를 탈환한 케이스 자체가 국내에 전무하다. 진짜로 '''살아있는 전설이다.''' [[LP]]로 데뷔하여 [[카세트테이프]]와 [[CD]]를 거쳐 디지털 음원까지 석권한 가수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음원 소비 연령대를 분석한 [[http://star.mk.co.kr/new/view.php?mc=ST&no=298911&year=2013|멜론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의 여타 [[히트곡]]과 비교해도 소비자층의 분포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즉 조용필의 [[히트곡]]을 듣고 자란 4~50대에 한정된 호응이 아닌, 음원 차트의 주요 소비자이면서 조용필을 잘 모르는 10~20대가 듣기에도 충분히 먹히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인 셈. 말 그대로 국민가수다. * 2013년 4월 23일 19집 전곡을 발표하면서 쇼케이스가 진행되었으며, 이때 오프닝으로 [[국카스텐]]이 '[[모나리자]]'를 불렀고, [[박정현]]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자우림]]은 '[[꿈]]'을 열창하면서 가왕의 귀환을 축하했다. * 2013년 5월 3일. 23년 전 가요톱10에서 1위를 차지한 이후로 23년 만에 지상파 가요 프로그램으로서 [[뮤직뱅크]] 1위를 차지했다. 그의 나이가 2013년 기준으로 '''63세라는 진갑을 넘은 나이'''인데다가 '''아이돌들이 강세를 보였던 가요프로'''에서 60대 최고령 가수로서는 최초로 1위를 차지하게 된 이례적인 사례다. ※날짜순 정렬 || 날짜 || 곡명 || 방송사/방송명 || 비고 || || 1981.02.10. ||<|7> '''촛불''' || KBS 가요톱10 || (모든 방송사 통틀어) 순위제 신설 이후 초대 1위 || || 1981.02.17. || KBS 가요톱10 || - || || 1981.02.24. || KBS 가요톱10 || - || || 1981.03.10. || KBS 가요톱10 || - || || 1981.03.17. || KBS 가요톱10 || - || || 1981.03.24. || KBS 가요톱10 || - || || 1981.03.31. || KBS 가요톱10 || 7주 1위 || || 1981.10.13. ||<|6> '''미워 미워 미워''' || KBS 가요톱10 || - || || 1981.10.20. || KBS 가요톱10 || - || || 1981.10.27. || KBS 가요톱10 || - || || 1981.11.03. || KBS 가요톱10 || - || || 1981.12.22. || KBS 가요톱10 || - || || 1982.01.05. || KBS 가요톱10 || 6주 1위 || || 1982.08.18. ||<|10> '''못 찾겠다 꾀꼬리''' || KBS 가요톱10 || - || || 1982.08.25. || KBS 가요톱10 || - || || 1982.09.01. || KBS 가요톱10 || - || || 1982.09.08. || KBS 가요톱10 || - || || 1982.09.15. || KBS 가요톱10 || - || || 1982.09.22. || KBS 가요톱10 || - || || 1982.09.29. || KBS 가요톱10 || - || || 1982.10.06. || KBS 가요톱10 || - || || 1982.10.27. || KBS 가요톱10 || - || || 1982.11.03. || KBS 가요톱10 || 10주 1위 || || 1983.01.12. ||<|5> '''비련''' || KBS 가요톱10 || - || || 1983.01.19. || KBS 가요톱10 || - || || 1983.01.26. || KBS 가요톱10 || - || || 1983.02.02. || KBS 가요톱10 || - || || 1983.02.16. || KBS 가요톱10 || 5주 1위 || || 1983.08.28. ||<|5> '''나는 너 좋아''' || KBS 가요톱10 || - || || 1983.09.11. || KBS 가요톱10 || - || || 1983.09.18. || KBS 가요톱10 || - || || 1983.09.25. || KBS 가요톱10 || - || || 1983.10.02. || KBS 가요톱10 || 5주 1위 || || 1984.02.12. ||<|5> '''친구여''' || KBS 가요톱10 || - || || 1984.02.19. || KBS 가요톱10 || - || || 1984.02.26. || KBS 가요톱10 || - || || 1984.03.04. || KBS 가요톱10 || - || || 1984.03.11. || KBS 가요톱10 || 5주 1위 || || 1984.08.05. ||<|5> '''정의 마음''' || KBS 가요톱10 || - || || 1984.08.12. || KBS 가요톱10 || - || || 1984.08.19. || KBS 가요톱10 || - || || 1984.08.26. || KBS 가요톱10 || - || || 1984.09.02. || KBS 가요톱10 || 5주 1위 || || 1984.11.04. ||<|3> '''눈물의 파티''' || KBS 가요톱10 || - || || 1984.11.11. || KBS 가요톱10 || - || || 1984.11.18. || KBS 가요톱10 || 3주 1위 || || 1985.06.19. ||<|5> '''어제 오늘 그리고''' || KBS 가요톱10 || - || || 1985.06.26. || KBS 가요톱10 || - || || 1985.07.10. || KBS 가요톱10 || - || || 1985.07.17. || KBS 가요톱10 || - || || 1985.07.24. || KBS 가요톱10 || 5주 1위 || || 1985.10.23. ||<|7> '''그대여''' || KBS 가요톱10 || - || || 1985.10.30. || KBS 가요톱10 || - || || 1985.11.13. || KBS 가요톱10 || - || || 1985.11.20. || KBS 가요톱10 || - || || 1985.11.27. || KBS 가요톱10 || - || || 1985.12.04. || KBS 가요톱10 || - || || 1985.12.11. || KBS 가요톱10 || 7주 1위 || || 1986.03.19. ||<|5> '''허공''' || KBS 가요톱10 || - || || 1986.03.26. || KBS 가요톱10 || - || || 1986.04.02. || KBS 가요톱10 || - || || 1986.04.09. || KBS 가요톱10 || - || || 1986.04.16. || KBS 가요톱10 || 5주 1위 || || 1986.11.05. ||<|3> '''바람이 전하는 말''' || KBS 가요톱10 || - || || 1986.11.12. || KBS 가요톱10 || - || || 1986.11.19. || KBS 가요톱10 || 3주 1위 || || 1988.01.20. ||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 KBS 가요톱10 || - || || 1988.10.05. || '''서울 서울 서울''' || KBS 가요톱10 || - || || 1989.05.21. || '''Q''' || KBS 가요톱10 || - || || 1990.08.24. ||<|6> '''추억 속의 재회''' || MBC 쇼 네트워크 || - || || 1990.09.07. || MBC 쇼 네트워크 || - || || 1990.09.14. || MBC 쇼 네트워크 || - || || 1990.09.21. || MBC 쇼 네트워크 || - || || 1990.09.28. || MBC 쇼 네트워크 || - || || 1990.10.05. || MBC 쇼 네트워크 || 6주 1위 || || 2013.05.03. ||<|3> '''Bounce''' || KBS 뮤직뱅크 || 23년 만에 가요프로 순위제 1위 || || 2013.05.04. || MBC 쇼 음악중심 || - || || 2013.05.10. || KBS 뮤직뱅크 || 2주 1위 || * 조용필의 가요프로 1위 횟수는 (지상파 3사 기준[* 참고로 KBS는 1981년 2월 '가요톱10'으로부터 순위제가 시작되었고, MBC는 1989년 10월 말 '쇼 네트워크'로부터, SBS는 대충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 음악방송 1위 기록을 모두 포함해 다음과 같이 무려 78회로 모든 가수들중 가장 많은 수상을 하였으며, Hello도 케이블 채널 MBC뮤직 '쇼 챔피언'에서 1위를 차지 했다. 1981년 mbc 밤의 힛트쇼 라는 순위 프로가 있었는데 고추 잠자리가 1위를 했으나 몇 주간 인지는 정확히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 [[불후의 명곡|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선 2018년 4월 21일부터 3주 간 그를 직접 전설로 모셔서 특집 방송을 했다. * 특이하게도 노래방에서조차 본인 노래만 부른다고 한다. 실제 조용필과 노래방에 가본 연예인들의 말에 의하면 하나같이 조용필은 본인 노래만 부른다고 한다. 아예 2시간 동안 노래방에서 본인 노래만 콘서트 수준으로 부른 적도 있다고 한다. * 2013년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그룹]]의 신경영 20주년 기념만찬 축하무대에 초대되어 당해 나온 신곡을 비롯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노래를 불렀다. 그 후 이건희 회장과 포옹을 하기도 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5/0002971676?sid=101|#]] * 2013년 Hello 투어는 전반기와 후반기 투어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는데, 전반기는 주로 실내 체육관이였고 후반기는 야외 경기장 중심이였다. Hello 투어를 통해 그동안 방문이 뜸했던 지역에서도 엄청난 관객을 모았다. 아마 국내에서의 전국투어 단위로는 역대 최다 규모, 역대 최고령 전국투어 기록을 또다시 조용필이 거머쥐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반기 투어가 끝나고 쉬었다가 연말에 앵콜 투어로 또 공연을 가졌다. * 2014년에는 활동을 쉬었다가 건강회복 이후 2015년 11월부터 전국투어 공연을 다시 가진다. * 배우 [[안성기]]와 중학교 동창으로 서로 집에도 놀러갈 정도로 절친이다. 조용필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중학교 때 같이 앉는 짝꿍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안성기 曰, '그 친구 키가 중학교 때 키 그대로'라고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중학교 동창인 [[안성기]]와 나란히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인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 외 구봉서와 패티 김도 받았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96&aid=0000272343|#]] [[2003년]] 보관[[문화훈장]] 수훈 이후 개인 통산 두 번째 훈장이다. [[파일:attachment/dkstjdrlwhdydvlf.jpg|width=500]] * 꽤나 [[동안]]이다. 1950년생으로 곁에 있는 배우 [[안성기]]는 조용필보다 프로필 상 2살 연하다.[* 다만 위에서도 기술되었듯이 실제로는 동갑이다. 출생 기록 처리가 전산화되기 전에는 호적상 나이와 실제 나이가 들쭉날쭉한 경우가 꽤 있었는데, 안성기가 1950년생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고 조용필과 중학교 동창이었으니 안성기의 실제 나이가 1950년생 또는 빠른 1951년생일 가능성이 있다.] 사실 젊은 시절에는 노안에 가까웠지만[* 조용필 1집의 커버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조용필의 나이는 30살이었다.] 이후 나이를 먹었음에도 얼굴이 거의 안 바뀌며 동안이 된 케이스. * [[유카와 마나부]]로 유명한 가수 겸 배우인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한국에서 제일인 가수가 조용필이라고 말한 바 있다. *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비산초등학교의 교가를 작곡한 이가 바로 조용필이다. 1978년 설립 이래 교가가 없다가 조용필의 조카인 조수지[* 10집의 'I Love 수지'의 모티브다.]가 이 학교에 재학할 당시 학교 측에서 조용필에게 교가의 작곡을 부탁했다고. 작사자는 초대 교장이었던 전정술 교장이다.[[http://anyangbank.tistory.com/393|#]] * 1953년생으로 알려진 가수 [[태진아]]보다도 3살 연상이다. 동안이다보니 태진아보다 아우가 아니냐, 태진아보고 형님이라고 불릴만 하겠다는 일설도 있으나 실제 연년상으로는 '''조용필이 태진아보다 3살 연상'''이고 태진아가 '''조용필 선배'''라고 부른다. 1952년생인 배우 [[이덕화]], [[이계인]]보다도 2살 연상이다. 무엇보다 상술했듯이 조용필과 함께 방송 출연이 뜸하기로 유명한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와 동갑이다. * [[엑소]], [[방탄소년단]], [[BIGBANG]]의 음악은 물론 공연도 [[유튜브]]를 통해 접하고 있고, 외국 뮤지션으로 [[Sia|시아]], [[Alan Walker|앨런 워커]]도 즐겨 듣는다고 했다.[* http://archive.is/JonOT] 운전을 할 때에는 차 안에서 AFKN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고 하는데, 외국의 최신 팝음악을 들으면서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 기존 곡을 O.S.T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잘 허락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사용을 허락한 영화들은 전부 천만영화에 등극했다.([[택시운전사]] '단발머리', [[신과 함께 인과 연]] '돌고 도는 인생') 게다가 18집 수록곡 '태양의 눈'을 이미지 송으로 사용했던 [[실미도]]는 한국 최초의 천만영화라는 기록을 남겼다. 뒷 사정은 31곡에 대한 저작권이 본인에게 없었던 문제도 있는데, 나중에 음반사에 넘어간 권리를 본인이 다시 찾을 수 있어서였다. * 다만 최초로 허락을 받고 O.S.T로 사용된 곡은 단발머리가 아닌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라디오 스타(영화)|라디오 스타]])이다. 사실 천만 대박을 못 쳤을 뿐이지 나름 중박 흥행은 하고 관객 인지도도 높은 영화다. 당장 그 예능 '라디오 스타'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원전은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맞지만 이걸 다시 대중의 기억 밖으로 끄집어 낸 단초는 여기 서술된 동명의 한국 영화이다.] 게다가 주연배우인 [[박중훈]]과 [[안성기]]는 이 영화로 그 해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하기도 했다. 이 곡은 허락 당시 본인에게 저작권이 없었던 31곡이 아니었으며, 동창인 안성기와의 우정 역시 영화 삽입에 한몫했다.[[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0043344|#]] *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개회식 때, 조용필의 노래 '[[단발머리]]'가 EDM 풍으로 편곡되어서 선수단 입장곡으로 나오기도 했다. * [[계몽사]]의 '학습만화세계사'에 패러디되어 등장했다. [[카스트 제도]]의 유래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수드라 계급의 할아버지와 손자가 수레를 몰고 가는데, 할아버지가 [[리그베다]]의 노래 한 구절을 부른다. 손자는 그 노래를 듣고 '가수 '''용피르'''가 부른 건가요?'라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 한창 활동하던 1980년대 당시 본인이 이끄는 밴드 인원들의 실수에 대해 대단히 엄격했다고 한다.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 2009년 11월 11일 방송에서 조용필과 직접적인 접점이 없는 [[윤종신]]이 조용필이 본인의 밴드 일원들에게 무서웠다는 얘기를 들은 것을 말하자, [[봄여름가을겨울]]과 [[이승철]]이 바로 긍정을 했다.[[https://youtu.be/wIDVeUU9wyg?t=767|#]] 또한, [[한밤의 TV연예]] 2010년 03월 21일 방송에서 조용필 특집으로 출연한 [[유영석]]이 한 일화로 조용필에게 "라이브에서 틀릴 수도 있는거 아닙니까?"라고 묻자 그 질문에 대해 조용필은 "그게 무슨 프로야?"라고 답했다고 한다.[[https://www.youtube.com/watch?v=thvl3cFDsJc&t=306s|#]] *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68년에 비틀즈 등의 팝 그룹에 빠져 살다시피 했는데[* 멘토 52 책에서 소개된 내용에 의하면 그러하다.], 대학 진학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을 뿌리치고 음악을 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는 말이 존재한다. * 한때 "기도하는"으로 시작하는 [[비련]]에 관련된 일화가 인터넷에 돌아다녔는데 당시 매니저였던 최동규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조용필의 팬이라는 14살 지체장애아에게 노래를 들려달라는 의사의 의뢰를 받자 일정이란 일정은 전부 캔슬하고 그 지체장애아가 있는 병원에 찾아가 비련을 불러줬다는 일화인데, 이때 노래를 들은 아이는 처음으로 펑펑 울으며 감정을 폭발시켰고, 이에 감명한 부모가 사례비를 주며 감사를 표하자 '“따님 눈물이 제 평생 벌었던, 또 앞으로 벌게 될 돈 보다 더 비쌉니다'라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며 최동규란 매니저와 병원에서 노래를 불러줬다는 이야기는 허구이며, 오히려 병원에 찾아가 앨범을 주거나 팬의 손을 잡아주고 위로해주는 등의 실존 일화가 와전되었던 것이다. 조용필의 소속사 역시, 뒤늦게 이런 과장된 이야기가 퍼진 것에 대해 당황했다고 한다.[[https://dailian.co.kr/news/view/356145s|#]] * 20집은 19집이 발매된 이후 콘서트를 하면서 작업하고 있다고 하는데 신곡이 6~7개 나온 상태라고 한다. 19집과 달리 자작곡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작업이 매우 더디게 진행된데다 [[코로나19]]로 인해 [[베이퍼웨어]]가 되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11542413|#]][[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80412/89571201/1|#]] 이후 2022년 4월 경부터 올해 안에 내는 것을 목표로 20집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온 상황이다. [[http://m.site.naver.com/17xUO|#]]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20420/112978908/1|#]] 정규 20집은 오는 2023년 말 발매 예정이며 그에 앞서 4월 26일 선공개 싱글 '로드 투 20 - 프렐류드 2'(Road to 20- Prelude 2)를 발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https://www.yna.co.kr/view/AKR20230424044000005|#]],[[https://www.yna.co.kr/view/AKR20230426036700005|#]] * [[가족오락관]]의 MC로 유명한 [[허참]][* 2022년 2월 1일 사망하였다.]이 생전에 [[간암]]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3명 중 1명이었다.[* 나머지는 [[강진(가수)|강진]], [[이홍렬]]이었다.] * [[릴 웨인]]이 Original Silence라는 곡에서 조용필의 물망초를 샘플링해가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