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영길 (문단 편집) == 생애 == [[1940년]] [[5월 9일]]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어났다. [[광주숭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61년]] [[갑종간부후보생]] 172기로 지원하여 같은 해 12월에 [[소위]]로 [[임관]]한 뒤에, 수도사단(통칭 맹호부대) 소속의 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사단(군사)|사단]]이나 [[연대(군대)|연대]]에서 [[참모]]를 거치지 않은 특이경력자이지만, 베트남전에서는 최우수 중대장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당초의 임기 1년의 절반인 6개월만을 복무하고서 귀국했다. 곧바로 1970년 육군 연구발전사령부(같은 해 설립된 [[국방과학연구소]]의 모체)에 배속되어 연구분석실의 요원들과 함께 일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자주국방에 공헌할 수 있었던 계기이자 첫 기회라고 회고하였다. 1974년에는 육군대학을 졸업해 사단방어 담당 교관을 맡게 되었다. 특히 같은 시기에 박정희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자주국방 노선의 연장선상에서 육군이 진행하던 전시 방어계획의 수정, 발전안 수립에도 동참하였다. 기본적으로 앞선 1972년에 육군본부가 처음으로 세운 독자 전쟁수행 계획(일명 '태극 72')을 좀더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여기서 도출된 내용은 육군본부가 유엔사(당시에는 한미 연합사가 없어서 유엔사가 작전권을 행사)와 협조해서 "작전계획 5027-74"(즉, 1974년도판 한반도 연합방위 계획)이 세워지는 기초를 제공하였다. 마침 같은 시기에 한미 연합1군단장에 부임한 제임스 홀링스워스 중장도 공세적인 전진 방어를 주창하였고, 이러한 측면들이 반영되어 기존의 수세적인 고수 방어 개념에서 상당 부분 탈피하게 되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향토사단인 [[31사단]]의 사단장을 역임했다. 1992년 사단장 재임 당시 [[남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서울에서 열린 [[전대협]] 집회에 참석하려 했으나 대중교통수단이 경찰의 검문에 의해 모두 막히자 5월 29일 [[광주역]]에서 서울로 향하던 기차를 탈취해서 서울로 올라가버린 [[남총련 열차 강제 정차 사건]]을 겪었다. 군사정권 때였기에기무부대원들이 각 대학교에 투입되어 정보수집을 하고 있었고, 31사단 예하부대들은 다시 관내 대학들에 투입되는 것에 대비해 사격 등 전술훈련은 모두 미루고 방탄헬멧에 방석망(바이저)를 부착하고, 방석복을 입고, 충정봉[* 대형 목재 진압봉으로 박달나무, 물푸레나무, 참나무 등으로 제작되고 국방색 천으로 된 커버를 씌워 휴대했다.] , 포승줄로 무장한 채 M16A1소총에 대검을 착검한 후 여러 대형으로 전진하며 공격적으로 시위를 진압을 하는 일명 [[충정훈련]][* 매년 [[특전사]]에서 효과적인 진압 형을 연구개발을 하면 각 육군부대에서 특전사에 교관단을 파견해 교육을 받은 후 이들이 다시 예하부대에 이를 전파하는 방식으로 실시되텄다. 발구름 소리로 시위대를 제압하기 위해 특유의 무릎을 높이 들었다가 강하게 내딪는 동작때문에 영원한 무릎통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착검을 하고 전진하기때문에 보면 광장히 공격적이었다.]과 이의 측정에만 열중하던 때였기에 국가기간망인 기차가 탈취되는 상황에선 군병력이 투입되는 것이 당연시되던 때였으나 군에서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곤란한 입장에 놓였지만, 다행히 무마되었다.[* 당시 군에선 TV 아침뉴스를 보고 일이 터졌다는 것을 알게되어 "뉴스보다 빨리"라는 구호가 생겼다.] 후임 [[김영삼]] 정부에 의해 현재의 [[제2작전사령부]]인 [[2군사령부]] 사령관으로 진급했다.[* 그리고는 아침마다 '"신독립군가"를 즐겨 듣는다는 것이 알려져 예하부대 장병들에게 강제로 교육되더니 급기야는 이 "신독립군가"를 지정곡으로 하는 군가경연대회까지 열렸다.] [[제2작전사령관|2군사령관]] 시절인 1998년 [[북한군]] 반[[잠수정]] 격퇴에 공헌했다. 이듬해인 [[1999년]]에 전임 김진호(제1 연평해전 당시의 합참의장) 대장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합동참모의장]]으로 취임했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10001/2001/10/005010001200110152339081.html|합참의장 시절 인터뷰]] [[2001년]] 합참의장직을 떠남과 동시에 [[전역]]했고, [[2003년]] [[2월]]에 [[노무현]] 정부의 첫 [[국방장관]]으로 취임했다. [[2003년]] [[국군의 날]] 당시에 대통령에게 우산을 받쳐준 것을 두고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국방장관 재임 시절 원자력잠수함 개발을 추진했지만, 불과 1년 만인 2004년 초 언론에 노출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2004년]] [[5월]]에 [[북한군]] 경비정이 [[NLL]]을 넘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보고 누락을 이유로 사임했다. 군 사법 개혁 문제로 [[청와대]]와 갈등을 빚어 물러났다는 설도 있다. 군 생활을 40년 했는데[* 여기서 군 생활은 [[사관생도]]를 제외한 정식 군인을 말한다.] 17세에 입대한 [[정호근(군인)|정호근]] 대장과 더불어 [[대한민국 국군]]에서 가장 군 생활을 오래 한 사람 중 하나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