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식(조선) (문단 편집) == [[야사(역사)|야사]] 및 [[야담]] == * 한 번은 화담 서경덕, 대곡 성운, 토정 이지함과 함께 만나서 누가 더 잠을 오래 참을지 시합을 벌였다는 야담이 있다. 화담과 대곡은 1주일을 버티다 잠에 들었고, 토정은 보름을 버티다 16일 만에 잠이 들었으나, 남명은 20일까지 버티다 잠에 들어 결국 승리했다. 이는 위에도 나오는, 남명이 어릴 때부터 담력을 기르기 위해 극기훈련을 했다는 내용과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로 보인다. * 화려하게 수놓은 [[솜]]이불을 수집하여 이를 전부 깔아놓고 관상하길 즐기는 [[癖|벽]]이 있었다고 하는 야담이 있다. 어느 날 친구 [[서경덕]]의 제자로 알고 지내던 [[이지함|토정 이지함]]과 고청 서기가 남명이 출타한 사이에 찾아왔는데, 이들은 남명의 이불을 보고 일부러 그 위에서 냅다 뒹구는 등의 기행을 벌였다고 한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조식의 방이 지나치게 화려한 것을 본 토정 이지함과 고청 서기가 흙이 잔뜩 묻은 신발로 방석을 짓밟고 돌아갔다거나 방에 똥을 누고 이부자리에 발라버렸다는 버전도 있다.] 집에 돌아온 조식은 지저분해진 방을 보고 화내긴커녕 역시 토정이 한 짓이 분명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고. 이는 위의 기타 문단에서 적힌 『고청유고』의 일화가 야담으로 일부 각색된 듯하다. * [[이덕무]]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577A_0680_010_0200_2000_012_XML|『한죽당섭필』]]에 따르면 본래 남명은 매우 검소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평소처럼 거친 베옷과 꾸미지 않은 말을 타고 외출했는데, 어느 장사꾼과 길을 비키라고 말다툼을 벌이다 그만 말 아래에 굴러떨어져 욕지거리를 듣는 굴욕을 당했다. 이에 남명은 "사군자가 옷차림이 허술하니 장사하는 놈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는구나"라고 탄식하면서 그 뒤부터는 화려한 옷을 입고 좋은 말을 타며 수행하는 종을 다 호걸스럽고 건장한 사람들로 뽑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길을 양보하고 감히 거스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를 본 남명은 또 다시 탄식하면서 "사군자는 외모 꾸미기를 응당 이와 같이 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 뒤로는 너무 사치한 것으로 소문이 나서, 당시에도 진주(晉州)ㆍ단성(丹城) 사람들이 성대하게 의복과 말을 단장하는 것은 대개 그의 유풍(遺風)이라고 전하고 있다.[* 제자 겸 큰외손녀 사위인 김우옹이 기록한 남명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145A_0070_010_0020_2003_A031_XML|「행록」]]을 보면 실제로도 이와 비슷한 면모가 있었던 듯하다. 남명은 말년에 거처하던 산천재에 사치품이었던 [[단청]]을 칠했는데, 김우옹이 이를 보고 "벼슬하지 않는 가난한 선비에게 단청은 마땅치 않은 것 같습니다"라 하자, 웃으며 "나는 본디 부귀의 상을 타고나서 그대들처럼 담박하지는 않을걸세"라 답했다고 한다.] * [[꺽지]]와 관련된 민담이 있다. 한 번은 남명이 친구인 [[http://www.nammyung.org/bbs/board.php?bo_table=man&wr_id=7&page=10|도구 이제신]]의 초대를 받고 덕천강에 갔다가 꺽지회를 대접받았다. 남명이 꺽지를 집어 한 입 깨물려 할 때 [[중종(조선)|중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래 국상 때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예법이었기에 남명은 입에 깨물던 꺽지를 바로 뱉어 강가에 던졌는데, 그로 인해 살아난 꺽지가 이후 새끼를 많이 쳐서 덕천강의 꺽지는 머리에 이빨자국이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뼈대 위에서 승하한 임금이 [[명종(조선)|명종]]이고 [[꺽지]]가 깨물린 자리는 [[아가미]]라고 기록된 버전도 있다. * 꺽지와 관련된 또 하나의 민담. 남명과 퇴계가 꺽지를 먹다가 뱉어 강으로 던졌는데, 남명이 뱉어 낸 꺽지는 완전한 모습으로 헤엄을 치며 갔으나 퇴계가 뱉어 낸 꺽지는 이에 미치지 못하고 눈이 하나 돌아가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이 민담은 당시 경상도권을 중심으로 한 남명 문하와 퇴계 문하의 경쟁구도를 꺽지를 통해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 퇴계 이황과의 라이벌 플래그에 관련된 또 하나의 [[http://gubi.aks.ac.kr/web/VolView1_html5.asp?ur10no=tsu_2404&ur20no=Q_2404_2_03A&dbkind=1|민담]]. 공부를 마친 [[숫돌]]장수 남명이 어느 날 숫돌을 팔러 단성과 [[의령]], 합천을 오가던 중 솟을령 꼭대기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때마침 [[솥]]장수 퇴계가 의령에서 산청으로 가던 중 솟을령에서 남명과 마주쳤다. [[도술]]을 부릴 줄 알았던 퇴계는 남명에게 자신의 도술을 뽐냈지만, 마찬가지로 도술을 부릴 줄 알았던 남명이 더욱 수준 높은 도술을 보여주자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이는 바로 위에 언급된 꺽지의 민담과 마찬가지로 남명과 퇴계 및 그 문하 간의 라이벌 구도를 반영한 이야기로 보인다. * 이와는 반대로 남명이 솟을령에서 큰코 다치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남명이 합천에서 덕산으로 이사를 하는 도중 경사가 급한 솟을령을 넘을 때 무거운 솥을 등에 지지 않고 끌고 다녔다. 마침 솟을령을 [[지나가던]] 등짐장수(또는 소금장수)가 남명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회초리를 가져와 자신의 무거운 [[지게]]를 때리며 "[[지게|너]]는 나하고 무슨 원수가 졌길래 [[주야장천]] 내 등에 업혀다니느냐"라고 책망했더니, 그 지게가 스스로 걸어다녔다고 한다. 등짐장수의 뛰어난 도술을 본 남명은 [[요령#s-1|요령]]을 피우는 자신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며 반성하였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그 등짐장수는 남명을 깨우쳐주기 위해 나타났던 솟을령의 [[산신#s-1|산신]]이었다고 한다.[* 위 야담의 출처 [[http://gubi.aks.ac.kr/web/VolView1_html5.asp?ur10no=tsu_2134&ur20no=Q_2134_1_01A&dbkind=1|0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7461|02]].] * 『[[어우야담]]』에는 남명과 퇴계가 서로 [[여색|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에피소드가 있다. 퇴계가 "술과 여색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인데, 술은 그래도 참기가 쉽지만 여색은 가장 참기 어렵다." 라면서 소강절(邵康節)의 시를 인용하자, 남명은 자기 스스로를 여색에 있어서는 전쟁터의 패장과 같다고 응하였다. 이에 퇴계는 자신은 젊었을 적에는 아무리 해도 참을 수 없었는데 중년 이후에 제법 참을 수 있게 됨은 정력(定力) 때문인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이때 동석하였던 [[송익필|구봉 송익필]]이 두 사람에게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올렸다. >'''玉盃美酒全無影''' >옥 술잔과 좋은 술 모두 그림자가 없는데,[br] >'''雪頰微霞乍有痕''' >눈처럼 흰 뺨에 엷은 노을은 살짝 흔적이 남았네.[br] >'''無影有痕俱樂意''' >그림자가 없건 흔적이 있건 모두 즐길 만한 것.[br] >'''樂能知戒莫留恩''' >즐거움을 경계할 줄 안다면 은애는 남기지 마소서. >---- >송익필이 지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197A_0010_060_0020_2002_A042_XML|「추야련당(秋夜蓮堂)」]] 제 4수 [[주색잡기|주색]]을 경계하는 구봉의 이 시[* 추야련당 제 4수에 달린 주석은 다음과 같다. "오랜 친구가 주색을 이야기하는 것을 두고 은근히 경계하여 말한 것이다(謂微戒故人以酒色云)"]를 보고 퇴계는 "시가 좋다"며 칭찬하고, 남명은 "시가 패군지장에게 경계가 되겠다"며 웃었다고 한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되었듯 실제로는 남명과 퇴계가 서로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고, 그들보다 33살 연하인 구봉 송익필이 갑자기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책의 제목대로 야담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 마찬가지로 여자에 얽힌 야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6844|『동패락송(東稗洛誦)』]]에 적힌 이야기이다. 젊은 시절 [[보검]], [[명마|준마]], [[미녀]]에 뜻을 두었던 남명은 보검과 준마는 얻었으나 오직 미녀만을 얻지 못하였다. 어느 날 [[강원도]]를 지나가다 빨래하는 예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는 남명에게 "진짜 절세미인을 보고 싶으면 나를 따라오라"고 하였다. 그녀를 따라간 곳에는 웬 [[승려|중]]과 음란하게 놀아나는 미녀가 하나 있었고, 남명은 두 사람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칼을 뽑아 그들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빨래하던 여자가 남명에게 고맙다고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자초지종을 들어본즉, 남명이 죽인 여자는 본래 빨래하던 여자가 모시던 집안의 며느리였는데, 중과 눈이 맞아 [[불륜#s-2|불륜]]도 모자라 함께 시집 일가를 몰살시키는 [[패륜]]까지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이에 느낀 바가 있던 남명은 말을 놓아주고 칼을 부러뜨린 후 공부에만 매진하여, 훗날 대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 [[황진이]]와 얽힌 야담 하나. 어느 날 황진이가 지리산으로 유람을 왔다가 덕산에 살고 있는 남명을 찾아 왔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황진이가 돌아가자 제자들이 남명에게 따져 물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는데 왜 황진이의 방문을 물리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였다. 이에 남명은 "세상에서 가장 굳센 [[관문]]이 바로 [[여색|화류관문]]이지. 나는 이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는지 시험해 본 것이라네. 그대들은 스스로 지조가 굳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여색|이 관문]]에 들어선다면 다 녹아 없어질걸세!" 라 답하였다. 이 야담은 황진이를 통해 남명의 철저히 수신하는 태도와 여색의 유혹에 대한 어려움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인다.[* 참고로 이 야담의 원형은 남명이 제자 김우옹과 정구에게 남긴 말에서 비롯된 듯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자 김우옹과 정구에게 이르시길, "세상에서 가장 굳센 관문(鐵門關)이 바로 화류관문(花柳關)이라네. 그대들은 이 관문을 넘었는가 그러지 못했는가? 이 관문은 금석(金石)도 녹여버리지. 그대들이 평상시에 절조를 가지고 있다해도, 여기에 이르면 남김없이 녹아 흩어지고 말걸세!" 라 하셨다(謂宇顒,逑曰。天下第一鐵門關。是花柳關也。汝等能透此關否。因戱言此關能銷鑠金石。汝軰平日所操。到此想應消散無餘矣。)" 출처는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145A_0070_010_0020_2003_A031_XML|『남명집』 권 4, 「행록(行錄)」]].]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9533|『문소만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GO_1345A_0010_000_0010_2004_014_XML|원문]]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45A_0010_000_0010_2002_014_XML|번역문]]]에는 청소년기의 남명과 정이 깊었다고 하는 [[단천시|단천]]의 [[관비]](官婢: [[관청#s-1|관청]]에 소속된 [[노비|여종]])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저자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2234|윤국형(윤선각)]]은 [[정해#s-1|정해년]]에 공무로 단천에 갔다가 자신이 17세 때부터 5년간 남명을 모셨다는 80대의 관비를 만나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기록했다.[* 참고로 이 관비는 남명과 같은 1501년생이었다고 하는데, 그녀가 윤국형과 만났을 시점의 정해년이면 1587년이니 대략 85~6세 즈음의 고령이었을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남명의 부친이 단천군수를 그만두면서 남명과 헤어졌고, 이후에는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남명만을 생각하며 살다가 [[정신질환|광증]]까지 생긴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녀는 윤국형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는 손뼉을 치며 젊은 시절 남명이 지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다만 남명의 연보에 따르면 그가 부친을 따라 단천에 있었던 것은 15~18세 사이였으므로 그녀의 증언과는 상충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야담으로 분류하였다.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6542|『청야담수』]]라는 책에서는 남명이 그의 [[처제]]와 [[호랑이]]의 중매를 섰다는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14&cp_code=cp0512&index_id=cp05120054&content_id=cp051200540001&search_left_menu=2|야담]]이 전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의 남명은 처제와 호랑이의 사이에서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1898|조석주]]가 편저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2212|『백야기문』]]에 실린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4&cp_code=cp0521&index_id=cp05210864&content_id=cp052108640001&search_left_menu=4|야담]]에서는 배를 타고 가다가 [[윤원형]]에게로 가는 [[철(원소)|철]]과 [[구리]]를 강에 내다 버리게 하는 패기를 선보인다. 이 야담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홍명희|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소설)|임꺽정]]』에서도 나오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아래의 [[조식(조선)#s-7|대중매체]] 문단 참고. * 이이의 『[[석담일기]]』와 그 내용을 인용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남사고|격암 남사고]]가 "올해는 [[작은사자자리|처사성]][* [[작은사자자리]]에 해당되는 별자리로, 동양 [[고천문학]]에서는 달리 소미성(少微星)이라고도 부른다. 삼원(三垣) 중 태미원(太微垣)에 소속된 이 별자리에 대한 『[[천문유초]]』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소미성은 [[사대부]]의 별자리로 달리 처사라고도 부르며, 별들의 이름은 맨 아래로부터 처사, 의사, [[박사(동음이의어)#s-2|박사]], [[대부#s-8|대부]]이다(少微 士大夫之位也 一名處士 一曰 南第一星處士 第二星議士 第三星博士 第四星大夫)"]에 광채가 없다"라 예언하였고 오래지 않아 조식이 죽었다고 한다.[* [[http://yulgok.co.kr/book/ilgi/ilgi08.htm|『석담일기』 상권, 「융경 6년 임신(1572)」]],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120_010_0150_2000_003_XML|『연려실기술』 권 11, 「명종조고사본말」]]] 비록 이 내용이 그 당시를 살았던 율곡이 지은 『석담일기』에 들어있다고는 하나, 남사고는 남명보다 2달 전인 1571년 음력 12월에 죽었기 때문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1214A_0140_010_0010_2018_B128_XML|『시암집』 권 14, 「격암남선생묘갈명(格庵南先生墓碣銘)」]], 선조 초기 관상감 천문교수로 임명되어 벼슬에 나아갔다가 병이 들어 사망했으니, 이 때가 [[융경제|융경]] 신미년(1571) 12월 3일이요 향년 63세였다.(穆陵初除天文學敎授。就職尋病卒。卽隆慶辛未十二月三日。而壽六十三。)] 여기서는 야담으로 분류하였다. * 처사성과 관련된 또 다른 야담. 천문을 잘 보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1220|수암 박지화]]가 처사성이 빛을 잃어가는 것을 보고 동문인 토정 이지함에게 변고가 생길 것이라 생각하여 그의 집에 찾아갔다. 이에 이지함은 "내가 아니라 남명 조처사의 변고를 나타내는 것"이라 답했고, 얼마 안 있어 남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천문과 관련된 또다른 야담. [[허봉(조선)|허봉]]이 1571년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어느 명나라 사람이 그에게 "내가 천문을 보니 그대 나라의 고결한 은일지사에게 장차 재난이 있을 것이오"라 이야기하였다. 허봉이 귀국한 후 이 일을 이야기하자, 남명의 제자인 덕계 오건이 "우리나라의 [[남사고]]도 올 겨울에 천문을 보고는 [[작은사자자리|소미성]]의 빛이 점점 흐려지니 필시 처사에게 재난이 있을 것이라더라"고 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명의 병이 깊어지더니 다음해 2월 8일에 사망했는데, 그 소식이 서울에 도착하지 않았을 때 남사고가 천문을 보고 "소미성의 정기가 모두 사라졌으니 이미 처사에게 흉한 일이 일어났을 것" 이라 하였다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145A_0070_010_0040_2003_A031_XML|『남명집』 권 4, 「부기(附記)」]], 융경 4년(1571)에 허봉이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입조했을 때, 명나라 사람이 그에게 "그대 나라의 고결한 은일지사께 장차 재난이 있겠소. 내가 (천문에서) 자미원을 보니 알겠더이다." 라 하였다. 허봉이 돌아와 이를 이야기하자 덕계 오건이 "우리나라의 남사고가 천상을 잘 보는데, 그도 올 겨울에 그런 이야길 하더이다. 소미성의 빛이 점점 흐려지고 있으니 필히 처사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요." 라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의 병이 깊어졌다. 임금께서 이를 들으시고 한양에서 의원을 보내 선생의 병세를 살피게 하셨으나 선생께서는 다음해 2월 8일 돌아가셨다. 선생의 부음이 서울에 닿지 않았을 때 남사고가 "소미성의 정기가 모두 사라졌으니 필시 처사께 이미 흉한 일이 일어났을 것" 이라 하였는데, 잠시 후에 부음이 도착했다. 아, 선생이 돌아가심에 하늘이 동요하였고, 철인이 시들어가매 진실로 기이한 일이 생긴 것이로다. 문인 진극경이 기록하다.(隆慶四年辛未。許篈以書狀官入皇朝。華人言汝國高遯之士。將有身災。余觀紫微垣知之。許篈歸言吳德溪云。我國南師古善觀象。是冬。亦曰。小微精薄。必於處士有災。未幾。先生病亟。上聞。自上遣醫馳視。越明年二月初八日。終。訃未入京。南師古又曰。小微全無精。處士必已凶。俄而訃至。嗚呼。先生之歿。天象爲動。哲人之萎。固有異矣。門人陳克敬。記。)] 『남명집』에 실린 이 기록은 남명의 제자 [[http://www.nammyung.org/bbs/board.php?bo_table=man&wr_id=47&page=7|진극경]]이 남긴 것인데, 역사적 사실과는 여러모로 어긋나기 때문에[* 먼저 앞에서 언급하였듯 남사고는 남명이 죽기 두달 전에 이미 고인이 되었으므로 남명의 부음이 들려오는 시점까지 살아있을 수가 없다. 두 번째로 허봉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남명이 죽은 해와 같은 1572년(임신년)이고,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갔던 것은 1571년(신미년)이 아니라 1574년(갑인년)이므로 진극경의 기록은 말이 되질 않는다. 그랬기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670|김시양]]은 자신의 저술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4A_0010_000_0010_2002_017_XML|『부계기문』]]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서 진극경을 비판하는 동시에 "우리나라와 같은 변방의 절개있는 선비에게까지 별자리가 응하여 움직인다면 하늘이 참으로 수고가 많겠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여기서는 율곡이 『석담일기』에 남긴 내용과 같이 야담으로 분류하였다. * [[풍수지리]]와 관련된 [[http://gubi.aks.ac.kr/web/VolView1_html5.asp?ur10no=tsu_2096&ur20no=Q_2096_1_01A&dbkind=1|야담]]. 말년에 덕산으로 이주한 남명은 자신이 죽은 뒤에 묻힐 곳을 미리 정해놓았는데, 친구가 그 자리를 자신에게 달라고 부탁하자 이를 양보하였다. 그리고 그 친구는 남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양보받은 그 자리에 묻혔다. 뒤에 남명이 죽고 그의 상여를 옮기려고 했는데 땅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남명에게 묻힐 곳을 양보받았던 친구의 영혼이 자기 아들의 꿈에 나타나 "남명이 내가 묻힌 자리에서 비켜달라고 하니, 나를 다른 곳으로 [[이장#s-2|이장]]하고 그 자리에 남명을 묻도록 해라. 이장할 자리는 남명이 따로 알려주었으니 그곳에 나를 묻거라"고 말했다. 꿈이 너무도 생생했기에 친구의 아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꿈에서 점지받은 곳으로 이장하였고, 움직이지 않던 남명의 상여도 그제야 땅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서 남명은 본래 자신이 정했던 묘자리에 묻혔다고 하는 이야기. * [[하동군|하동]]에 있는 [[회남재로|회남재]]와 관련된 야담. 남명이 말년에 은거할 곳을 찾아 청학동을 거쳐 하동의 [[악양면|악양]] 일대를 둘러보았는데, 딱히 마땅한 곳이 없었기에 고개를 넘어 다시 덕산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때문에 그 고개에는 '남명([[南]][[冥]])이 다시 돌아온([[回]]) 고개([[岾]])'라는 뜻에서 '회남재(回南岾)'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남명의 맏아들인 조차산에 대한 야담. 차산은 도술에 뛰어난 아이였는데, 자식이 이를 악용할 것이라 염려한 남명은 아이를 김해 집 뒷산에 굴을 파 감금하였다. 굴 속에 갇힌 차산이 탈출하려고 온갖 꾀를 쓰자 산도 함께 부풀어 올랐고, 이를 본 사람들이 갇혀있던 아이의 이름을 산에 붙여 조차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물론 이는 야담일 뿐으로, 실제의 조차산은 위의 여담 문단에도 적혀있듯 9세에 병으로 요절하였다. * 외손녀들의 혼인에 대한 야담. 남명의 맏딸은 만호 김행에게 시집가 두 딸을 낳았는데, 이들은 남명의 중매로 각기 김우옹과 [[곽재우]]에게 시집갔다. 헌데 중매를 설 때마다 남명이 외손녀들을 두고 했던 말은 "족히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였다. 헌데 이 외손녀들의 외모와 성격, 살림 솜씨에 약간 모가 났는지라 결혼생활에서 꽤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버티다 못한 김우옹과 곽재우 두 사람은 스승인 남명을 찾아가 왜 이런 결혼을 주선했는지 따져 물었다. 이에 남명이 한 대답이 걸작이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그렇게 거칠고 솜씨 없는 아이니까 군자다운 사람이라야 데려다 살 수 있는 거지.]] 내가 그대들을 군자 같은 사람으로 인정했으니까 이 혼사가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옛 경상우도 지역에 남아있는 "중매할 적에는 [[조식(조선)|건중]]이도 거짓말 한다" 라는 속담의 유래라는 일화.[* 출처: 허권수,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한길사] * 외손녀들의 혼인에 대한 또 다른 야담. 맥락은 거의 같으나 내용이 조금씩 다른 관계로 나누어서 서술한다. * 큰외손녀가 결혼할 때가 되자, 외조부인 남명은 사위후보로 정인홍과 김우옹을 점찍고 그들을 시험하려 했다. 그 방법이란 [[소태나무]]의 껍질로 국을 끓여서 마시게 하는 것이었다. 이때 정인홍이 소태국을 뱉은 반면 김우옹은 쓴 맛을 참으며 남김없이 다 마셨는데, 남명은 시험을 통과한 김우옹을 큰외손녀의 남편으로 삼았다고 한다. * 작은외손녀가 결혼할 때가 되자 남명은 주변에 외손녀사위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러자 여러 사내들이 작은외손녀의 남편이 되기 위해 그의 집에 몰려들었고, 남명은 이들을 시험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소태나무 껍질로 끓인 국을 먹게 했다. 그 결과 곽재우 한 사람만 국을 다 마시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탈락했다. 남명이 곽재우에게 "어떻게 그 쓴 국을 다 먹었느냐?"고 묻자, 그는 "국과 밥은 서로 섞여야 하기 때문에 입에 써도 다 먹은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남명이 곽재우를 작은외손녀의 남편으로 삼았다고 한다. * [[구렁이]]와 관련된 야담이 있다.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이를 각각 소개한다. * 남명이 어릴 적 글을 읽고 있는데, 그 목소리에 반한 이웃집 처녀가 담을 넘어 몰래 찾아갔다. 이를 본 남명은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사내의 방에 들어오느냐고 하면서 [[회초리]]로 처녀의 종아리를 때린 후 내쫓았다. 매를 맞고 쫓겨난 처녀는 곧 [[상사병]]에 걸려 죽었고, [[환생]]하여 구렁이가 되었다고 한다. * 남명이 어렸을 적 이웃집 처녀가 그에게 연모의 정을 품었다. 이를 알고 있던 남명은 부모에게 처녀와의 혼인을 요청하였으나, 신분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허락받지 못했다. 그 후 처녀는 절망 속에 자살했고, 구렁이로 환생하여 남명을 찾아갔다. 그 구렁이가 처녀의 환생임을 알아본 남명은 측은함에 구렁이를 벽장 속에 넣어두고 먹을 것을 주며 길렀다고 한다. * 남명이 서울로 올라가다 어느 집에 들어갔다. 그 집에는 처녀 하나만 있었는데, 부모는 외조부의 장례를 치르러 갔다고 했다. 그날 남명은 그 집에서 묵다가 처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였고, 다음 날 길을 떠나며 보름 후에 다시 오기로 약조하였다. 헌데 남명은 보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처녀는 그를 기다리다 상사병으로 죽어 구렁이로 환생하였다. 상을 치르고 집에 돌아온 처녀의 부모는 구렁이가 자신의 딸임을 알아보고 자초지종을 물은 후 남명을 찾아가 사연을 이야기했다. 이에 죄책감을 느낀 남명은 그 구렁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 와 벽장 안에 넣어두고 음식을 주며 길렀다. 어느 날 남명이 출타를 하게 되었는데, 평상시 스승이 벽장에 숨겨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던 한 제자가 벽장문을 열었다가 그 안에 있던 구렁이를 죽인 후 땅에 파묻었다. 귀가한 남명은 벽장에 구렁이가 없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자신과 구렁이의 사연을 이야기한 후 그 행방을 물었다. 그러자 구렁이를 죽인 제자가 사실을 고백했는데, 남명은 제자와 그 가족의 안위가 걱정된다고 말하면서 귀가토록 했다. 제자가 헐레벌떡 집에 도착했더니 갑자기 [[천둥|뇌성]][[번개|벽력]]이 쳐서 제자와 그 가족들이 모두 함께 죽었다고 한다. * 남명이 젊었을 때 한양에 과거보러 가다 어느 주막에 들렀는데, 젊은 여주인이 그에게 반해 상사병을 앓다 죽었다. 여인은 구렁이로 환생하여 남명의 집을 찾아왔고, 남명은 그 구렁이를 측은히 여겨 벽장 속에 넣어서 길렀다. 하루는 남명이 제자들을 [[가야산]]으로 소풍을 보내고 집에서 쉬었는데, 벽장의 구렁이가 나와 그를 괴롭혔다. 이때 소풍 가있던 제자 정인홍이 하늘을 보더니 스승이 뱀으로 인한 곤란에 처해 있음을 알고 남명의 집으로 가서 그 구렁이를 죽였다. 그로부터 1년 후, 정인홍의 삼촌(또는 동생)이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그 구렁이의 환생이었다.[* 이때 정인홍이 숙모(또는 제수)에게 아들을 갖다 버리라고 하고 했다는 버전도 있다. 이 버전에 따르면 숙모(또는 제수)는 처음에는 정인홍의 말을 따랐으나, 다시 아들을 낳은 후에는 육친의 정에 이끌려 정인홍의 부탁을 거절하고 아이를 계속해서 길렀다고 한다.] 훗날 정인홍은 합천에 낙향했고, 구렁이가 환생한 사촌은 정인홍으로부터 학문을 배워 어느 고을의 사또가 되었다. 어느 날 조정에서 인목대비의 폐출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합천에 있는 정인홍에게도 의견을 묻는 편지가 내려왔는데, 그는 왕이 처리할 문제라는 의견을 적어 인편에 부쳤다. 이때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서 사또를 하던 정인홍의 사촌이 먼저 답장을 열어보고 인목대비를 폐출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위조#s-1|위조]]했는데, 훗날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정인홍은 이 위조된 편지로 인해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이렇게 해서 구렁이는 자신을 죽인 정인홍에게 복수를 했다는 이야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