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식(조선) (문단 편집) == 생애 == [[연산군]] 7년(1501) 음력 6월 26일 진시[* [[육십갑자]]로 환산하면 [[신유]]년 [[을미]]월 [[임인]]일 [[갑진]]시(辛酉年 乙未月 壬寅日 甲辰時)이다. 그가 태어난 날이 임인일임은 제자 [[정인홍]]이 쓴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199A_0120_060_0010_2015_002_XML|남명의 행장]]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199A_0130_010_0020_2015_002_XML|신도비문]]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그가 태어난 날의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706026_001|『조선왕조실록』 기사]]와 [[한국천문연구원]]의 [[https://astro.kasi.re.kr/life/pageView/8|천문우주지식정보 음양력변환계산]]을 통해서도 교차검증된다. 또한 그가 태어난 시간은 제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997|김우옹]]이 쓴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145A_0070_010_0010_2003_A031_XML|남명의 행장]]에 나온 "선생은 [[홍치제|홍치]] 신유년 6월 26일 진시생(先生以弘治辛酉六月二十六日辰時生)"이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삼가현 토동에 있는 외조부 이국(李菊)의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375|조언형]]이고 모친은 인천 이씨[* 인천 이씨의 모친은 조선 전기 4군을 개척한 [[최윤덕]]의 손녀.]이다. 어릴 때에는 벼슬하던 부친의 영향으로 [[한양]]과 [[단천시|단천]] 등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이 시기 [[유교]] 경서 이외에도 스스로 [[제자백가]], [[불교]], [[도가|노장사상]], [[고천문학|천문]], [[풍수지리|지리]], [[한의학|의학]], [[삼십육계|병법]], [[활쏘기|궁]][[승마|마]]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25세 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302|『성리대전』]]에서 [[원나라]]의 유학자 [[http://s-space.snu.ac.kr/bitstream/10371/64274/1/%EF%A4%B9%E9%BD%8B%20%E8%A8%B1%E8%A1%A1%281209~1281%29%EC%9D%98%20%EC%83%9D%EC%95%A0%EC%99%80%20%EC%B2%A0%ED%95%99%EC%82%AC%EC%83%81.pdf|노재 허형]]의 글[* 해당 부분은 "[[이윤(상)|이윤]]의 뜻을 뜻으로 삼고 [[안회|안연]]의 학문을 배움으로 삼아서 출사하면 경륜을 펴야 하고 재야에 있으면 지조있게 지켜야 한다. 대장부는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나니 출사해서 한 것도 없고 재야에 있으면서 지조가 없으면 뜻하고 배운들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志伊尹之志 學顔淵之學 出則有爲 處則有守 大丈夫當如此 出無所爲 處無所守則 所志所學將何爲)"이다.]을 읽고 학문의 방향과 출처관[* 여기서의 [[출처]]란, 벼슬에 나아가는 출(出)과 정치에 나아가지 않고 퇴처하는 처(處)를 합친 것으로, 달리 출처진퇴(出處進退)라고도 한다. 남명의 출처관은 앞서 인용한 노재 허형의 글 중 "출사하면 경륜을 펴야 하고 재야에 있으면 지조있게 지켜야 한다(出則有爲 處則有守)"로 요약된다. 남명은 허형의 글에서 깨달음을 얻어 학문관과 출처관을 확립했으나, 역설적이게도 허형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말한 출처관에서 벗어났다 하여 못마땅하게 여겼다.]을 정한 후부터 [[성리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고, 경의검(敬義劍)이라는 [[도검|칼]][* 여기에는 "안으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결단케 하는 것은 의이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칼을 수양 도구로 삼아 안으로는 거울과 같은 마음(敬)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과단성 있는 실천(義)을 이룩하고자 하는 각오를 보여주는 것이었다.]과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s-2|방울]][* 거동할 때 들리는 방울소리를 통해 늘 깨어있는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주자(철학자)|주희]]의 스승인 연평 이통(延平 李侗, 1093~1163)이 방울을 차고 다니며 늘 자신의 행동을 성찰했던 전례가 있다.] 1쌍을 차고 다니며 늘 자신의 행동을 단속하였다. 이러한 내외의 공부를 통해 그는 내면의 수양(敬)과 수양한 바의 실천(義)을 함께 중시하는 학풍을 함양해 나갔다. 부친이 사망하고 [[삼년상]]을 치른 후인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시|김해]]로 거처를 옮겼다.[* 관련 유적으로는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에 위치한 [[https://place.map.kakao.com/7909237|산해정]](山海亭)이 있다.] 이 시기에 [[과거 제도|과거시험]]을 단념하여 스스로의 학문에 힘쓰기로 결심한다. 그러다 모친상을 치른 후인 48세 때 고향인 합천으로 거처를 옮겨 61세 때까지 머물렀다.[* 관련 유적으로는 학생들을 가르쳤던 [[https://place.map.kakao.com/11760024|뇌룡정]](雷龍亭)이 있는데, 이름의 유래는 『[[장자#s-5]]』에 나오는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레처럼 소리친다(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라는 구절이다. 인근에 계부당(鷄伏堂)이란 거처용 건물도 지었지만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그 사이에 높은 학문으로 여러 번 벼슬길에 오를 것을 권유받았으나, 자신의 출처관에 따라 평생 한 번도 [[출사#s-3|출사]]하지 않고 재야에서 산림처사로 일관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시사]]에 관심을 거두지 않았던 그는 현실정치에 많은 비판을 가했는데, 대표적인 글이 55세 때 [[명종(조선)|명종]]에게 올린 「[[단성소]]」이다.[* 본래 이름은 '단성 현감의 벼슬을 거절하면서 올린 상소문'이란 뜻인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인데, 이 상소문을 쓴 해가 을묘년(1555)이었으므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라고도 부른다. 상소 자체는 대단한 명문으로 그 날선 비판은 요즘 [[정치]]판에 대입해도 [[싱크로율]]이 잘 맞아서 선거철이 되면 회자되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조식은 상소문에서 명종을 "[[중종(조선)|선왕]]의 [[고아|외로운 후사]](孤嗣)", [[문정왕후]]를 "깊숙한 [[궁궐]]의 한 [[과부]]"라고 공개 비판하였는데, 친구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9400|성수침]]조차 아직 학문이 원숙하지 못해 이런 과격한 글을 올렸다고 평을 할 정도였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120_010_0150_2000_003_XML|『연려실기술』 권 11, 「명종조고사본말」]], 성수침 또한 [[조식(조선)|공]]과 뜻이 같아 서로 사이가 좋았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5873|청강 이제신]]이 두 선생께서 서로 존중하는 뜻을 (성수침의 아들인) [[성혼|우계 성혼]]에게 물으니, 성혼은 "아버지께서 「[[단성소]]」를 보시고는 '(글의) 날카로움이 크게 드러났다' 하시며 '오래도록 [[조식(조선)|건중]]과 떨어져 사는 동안 (사람들이) 그가 크게 진보하여 큰 성과를 얻었다고 이야기하던데, [[단성소|글]]의 기세가 이와 같다면 (학문이) 오히려 미진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 하였다(成守琛亦與公同志相善 李濟臣問兩先生相推重之意於成渾 渾曰 家公見南溟丹城疏則 鋒銳太發露 乃曰 久與楗中違離 謂其大進已混成果 如此辭氣則猶未盡耶)] 당시 서슬시퍼런 [[문정왕후]]의 권세와 전횡을 보면 이러한 일침은 용감한 것을 넘어 '''"죽여달라"''' 는 말을 한거나 마찬가지다.[* 요즘으로 치면 [[명예훼손죄]], [[모욕죄]], [[정통법]] 위반에 해당된다. 즉 걸고 넘어지면 처벌을 피할 수가 없다.] [[명종(조선)|명종]]이 하도 기가 차서 "아무리 [[임금]]이 어질지 못하기로서니 욕을 퍼부어서야 되냐?"며 분개해 조식을 죽이려 들었지만, "[[합천군|시골]]의 [[조식(조선)|무식한 선비]]를 함부로 죽이면 언로가 막힌다" 하여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명종실록]]』에 기록된 조식은 찬양 일색인데, 「단성소」가 올라갔을 때 [[사관]]이 논한 내용을 보면 당시 관직도 마다했던 조식의 평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다. >당시 유일(遺逸: 재야에 은거하면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란 명성에 기대면서 공로와 명성을 도둑질하는 자가 많았다. 어질도다, 조식이여!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고 절개를 지키면서 초야에 묻혀 있었으나, [[난초]]의 향기가 저절로 퍼지듯 그 명망이 조정에 전달되어 이미 [[능참봉|참봉]]에 임명되고[* [[중종(조선)|중종]] 34년(1539) [[이언적]]의 추천으로 [[헌릉(조선 태종)|헌릉]]참봉에 임명되었던 일을 말한다.] 또 [[주부(동음이의어)#s-2|주부]]에 임명된 것이 두 번 세 번에 이르렀지만[* 명종 3년(1548)과 명종 6년(1551), 명종 8년(1553)에 각각 전생서 주부와 종부시 주부, 사도시와 예빈시의 주부에 임명된 일을 말한다.] 이미 모두 머리를 저으며 거절하였다. 지금 오마(五馬)의 직위[* [[태수]]의 이칭으로, 태수의 수레에는 사두마차(駟馬)에 말 1필을 더하였기에 오마(五馬)라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에서는 [[수령]]의 이칭으로 쓰였으며, 본문에서는 조식이 「단성소」를 쓴 계기가 된 단성현감의 직위가 내려진 것을 뜻한다.]에 임명된 것은 영광스러울 뿐만 아니라 이를 제수한 (임금의) 은혜가 특별하다고 말할 만한데도 [[안빈낙도|안빈함을 스스로 즐기며]]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그럼에도 조식은 과감하게 세상을 잊어버리지 못하였기에 상소문을 올려 절개를 가지고 항의하며 당시의 폐단을 극력 논하였다. 글이 매우 간절하면서도 뜻이 곧았을 뿐만 아니라 시대와 변란을 근심하여 우리 임금의 덕을 밝히고 백성들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고[* 원문에서는 明新之地라 하였는데, 이는 『[[대학(경전)|대학]]』 첫 머리에 나오는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며 지극한 선에 머물게 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는 구절을 이야기한 것이다.], 풍속과 교화가 [[왕도#s-1|왕도정치]]에 이르기를 바랐으니, 나라를 걱정하는 그 정성이 지극하다 하겠다. >---- >[[http://sillok.history.go.kr/id/wma_11011019_001|『명종실록』 19권, 명종 10년(1555) 11월 19일 경술 첫번째 기사]] 이같은 대범한 행동으로 조식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고, 할 말 못하고 숨죽이던 선비들에게 큰 반향을 얻었다. 그리하여 재야에 있던 그에게 더 많은 인재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했고, 마침내 경상우도 일대에는 [[이황|퇴계]]학파와 더불어 [[경상도|영남]]의 학풍을 양분한 '''남명학파'''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환갑이 되던 해에 덕산의 사륜동으로 이주하여 산천재를 짓고 10년 동안 강학에 힘썼다.[* 현재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61세부터 남명이 별세하는 72세까지 머물렀다. 관련 유적으로는 [[https://place.map.kakao.com/10444383|산천재]](山天齋)와 [[https://place.map.kakao.com/7835985|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다.] 이 기간 중인 명종 21년(1566),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죽은 후 친정을 하던 [[명종(조선)|임금]]의 부름을 받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7770|임훈]], [[이항#s-1.2|이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2019|남언경]], 한수(韓修) 등과 함께 상경하여 학문과 정치의 도를 논하였으나[* [[http://sillok.history.go.kr/id/kma_12110007_001|『명종실록』 33권, 명종 21년(1566) 10월 7일 갑자 첫번째 기사]]], 상서원판관의 벼슬을 사양하고 7일 만에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조선)|선조]]도 즉위 직후부터 조식을 초빙하였으나[* 즉위한 1567년만 해도 11월과 12월 2차례에 걸쳐 그를 부르는 교서를 내렸고, 그 후 1570년까지 매년 한 차례씩 벼슬을 내렸다.], 그는 그때마다 벼슬을 거절하고 상소로 일관하였다. 이 시기에 적은 상소문 중 선조 1년(1568)에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는 [[아전|서리]]들의 폐해를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으로 유명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민의 정치와 나라의 여러 사무가 모두 [[아전|도필리]](刀筆吏)의 손에서 나옵니다. 이들은 [[뇌물|대가]]를 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으로 재물을 모으면서 밖으로는 백성들을 흩뜨려 열에 하나도 남지 않게 만듭니다. 심지어 이들은 각자 주와 현을 나누어 사유물로 삼고 이를 [[문서|문권]](文券)으로 만들어서 자기 자손들에게 전하기까지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공납으로 바치는 토산물들도 모두 물리쳐서 납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공납품을 바치는 사람들은 구족의 것을 모으고 가업을 모두 팔아넘겨 관아가 아닌 (아전들의) 사삿집에 내는데, 이때 본래 값의 100배가 아니면 받지도 않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이렇게 납부할 수 없게 되니 빚을 지고 도망가는 사람이 줄을 잇습니다.[br] >조종(祖宗)의 주현 백성들이 바치는 공납을 [[아전|날다람쥐 같은 놈들]]이 나누어가질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선조(조선)|전하]]께서 누리시는 온 나라의 부(富)가 [[아전|이들]]이 [[방납]]한 물자에 의지한 것일 줄 어찌 상상이나 하셨겠습니까? [[왕망]]이나 [[동탁]]처럼 간악한 놈들도 이러지는 않았고, 망할 나라의 세상이라도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이들은 이러고도 만족하지 못해서 국고의 물건까지 다 훔쳐내니 비축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라꼴은 말이 아니게 되었으며 도성에는 도적들이 가득합니다.[br] >나라가 한갓 텅 빈 그릇처럼 앙상하게 서 있습니다. 온 조정의 사람들은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아전|이들]]을 쳐야 할 것이며, 힘이 모자라다면 사방에 명령을 내리시어 사람들을 불러모아 침식의 겨를도 없이 분주하게 임금님을 돕게 하시옵소서. >---- >[[http://sillok.history.go.kr/id/kna_10105026_001|『선조실록』 2권, 선조 1년(1568) 5월 26일자 기사]],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145A_0050_080_0020_2003_A031_XML|『남명집』 권 2, 「무진봉사(戊辰封事)」]] 「무진봉사」를 올린 해에 남명은 진주에서 일어난 옥사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 이 옥사를 다룬 논문 [[http://scholar.dkyobobook.co.kr/searchExtDetail.laf?barcode=4010023039930&vendorGb=01&academyCd=20057|01]], [[http://s-space.snu.ac.kr/bitstream/10371/75973/1/03%20%EC%9D%B4%EC%88%99%EC%9D%B8.pdf|02]],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572556|03]]] 이 사건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5795|이정]]이 죽은 친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729|이희안]]의 첩을 음행죄로 고발한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남명은 사건을 증언하는 과정에서 문제에 휘말렸고[*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0538|박계현]]은 이 사건을 [[김해]] [[부사#s-3|부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5888|양희]]에게 인계하였고, 양희는 사위 [[정인홍]]을 통해 남명에게 자문을 얻고자 했다. 남명은 이정과 이희안 두 사람 모두와 친구였으므로 이 사건에 대해 잘 알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때 남명은 "이정이 이희안 집안의 일을 고발한 것은 [[http://www.nammyung.org/bbs/board.php?bo_table=man&wr_id=112&page=3|하종악]]의 후처이자 자신의 인척인 함안 이씨의 음행을 감추기 위함이다"라고 증언하였다(여담으로 하종악의 전처는 남명의 형의 딸이었는데, 이를 두고 남명이 조카를 위해 의도적으로 함안 이씨를 모함한 것이 아니냐는 풍설도 함께 떠돌았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기록된 저술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2058|유희춘]]의 『[[미암일기]]초』이다). 이로 인해 수사는 이희안의 첩에서 함안 이씨에게로 전환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인해 무혐의로 끝났다.] 친구였던 이정과 절교하였다.[* 제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145A_0050_010_0150_2003_A031_XML|정탁과 오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남명은 "이정이 이 문제에 대해 3차례나 말을 번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정 측은 이를 부인하였고,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이후 조식과 이정 두 사람의 자손 간에도 계속되었다. 다만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이 일은 이후 남명의 제자 [[http://www.nammyung.org/bbs/board.php?bo_table=man&wr_id=117&page=2|각재 하항]]이 사건과 관계된 함안 이씨의 집을 헐어 그들을 쫓아내는 훼가출향을 저지르면서 전국적으로 공론화되었다. 남명 또한 사람들의 구설에 올랐고[* 퇴계의 제자인 [[기대승]]이 "함안 이씨 사건과 훼가출향 사건 모두 조식이 떠들어서 생긴 일"이라고 [[http://sillok.history.go.kr/id/kna_10205021_001|언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신을 옥사의 배후라 여기는 사건 관련자들로부터의 흉사를 피하기 위해 덕산과 김해를 오가며 지냈다. 이 사건은 남명의 사후 그의 학파가 분열하는 동시에 퇴계학파와의 갈등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고[* 진주에서의 옥사와 관련하여 퇴계가 이정에게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144A_0220_010_0230_2004_A030_XML|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이 편지에는 이황이 조식을 폄하하는 내용이 실렸고, 이러한 이황의 조식에 대한 인식은 퇴계학파를 통해 사림의 여론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1600년에 『퇴계집』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이 편지가 세상에 알려지자, [[정인홍]]은 1604년 『남명집』을 간행할 때 이황을 비난하는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145A_0060_030_0240_2003_A031_XML|「발남명집설」]]이라는 글을 짓고 이를 『남명집』의 발문으로 삼으며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인홍은 동문인 [[정구(조선)|정구]]와 갈등을 빚는다. 남명과 퇴계 두 사람 모두에게서 수학한 정구가 「발남명집설」을 『남명집』의 발문으로 삼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이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감정싸움 끝에 절교하면서 남명학파는 분열에 이른다.] 훗날 [[허목]]이 쓴 남명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778|신도비]]인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344A_0410_010_0010_2003_A098_XML|덕산비]]의 철거 문제와도 연관되는 등 오래도록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인조반정]] 이후 남명의 후손들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199A_0130_010_0020_2002_A043_XML|정인홍이 비문을 쓴 남명의 신도비]]를 철거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명망가들에게 새로 세울 [[신도비]]의 비문을 부탁하였다. 이때 남인 측에서 비문을 부탁받은 사람 중 하나가 남명의 제자 한강 정구의 학맥을 이은 미수 허목이었다.[br]그러나 허목은 남명보다는 이정에 대해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생 허의가 이정의 손자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570_005679&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이곤변]]의 손녀사위라는 인척관계로 맺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허목은 위 사건과 관련하여 남명과 이정의 후손 사이에 일어난 논쟁에서도 이정의 편을 들었고, 이런 심리가 반영된 탓에 그가 쓴 조식의 신도비문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367A_1560_010_0040_2003_A113_XML|송시열이 쓴 조식의 신도비문]]에 비해 그 내용이 조금 상세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남명의 후손들은 내심 불만을 갖고 있었다.[br]그러다가 미수의 저작인 『미수기언(眉叟記言)』이 간행될 때 그 안에 수록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344A_0750_010_0100_2003_A099_XML|「답학자서(答學者書)」]]라는 글에서 허목이 남명과 정인홍을 비판한 내용이 발견되었다. 이에 19세기 말부터 남명의 후손들과 노론계 학자들이 덕산비의 내용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고, 1926년에 이르러 남명의 후손들은 덕산비를 철거하여 땅에 묻었다. 남인계열의 후손들은 조식의 후손들을 성토하면서 소송을 제기했지만 3심에서 법원이 조식 후손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덕산비는 다시 서지 못했다. 현재 남명의 신도비는 [[송시열]]이 비문을 쓴 것만 세워져있고, 덕산비는 행방이 묘연한 채 비석받침인 [[귀부#s-1|귀부]]만 남아있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28711|관련된 내용을 다룬 논문]]] 선조 5년(1572) 음력 2월 8일, 덕산의 산천재에서 7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으로부터 약 2개월 전에 발병한 [[종기|등창]]이 직접적인 사인이었다. 죽음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후 칭호를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산 선비라는 뜻의 '''처사(處士)'''라고 할 것을 당부하였으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145A_0070_010_0020_2003_A031_XML|『남명집』 권 4, 「행록(行錄)」]], 김우옹이 "만약에 돌아가신다면 스승님을 무엇이라 칭해야 마땅할까요?"라고 묻자, 남명이 말했다. "처사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이것이 나의 평생 뜻이다. 만약 처사라고 하지 않고 관직으로 나를 칭한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宇顒請曰。萬一不諱。當以何號稱先生乎。曰。用處士。可也。此吾平生之志。若不用此而稱爵。是棄我也。)"], 방의 벽에 붙여두었던 경(敬)과 의(義) 두 글자를 가리키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145A_0070_010_0020_2003_A031_XML|『남명집』 권 4, 「행록(行錄)」]], "벽에 써놓은 경의(敬義) 두 글자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니 배우는 사람은 여기에 숙달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 되면 마음 속에 무엇 하나 걸림 없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書壁敬義二字。極切要云云。學者要在用工熟。熟則無一物在胸中。吾未到這境界以死矣。)"] 남명이 죽은 직후 선조는 그에게 [[http://sillok.history.go.kr/id/kna_10502008_002|제문]]을 내리면서 [[사간원]] [[대사간]]에 추증하였고, 광해군은 1615년에 남명을 [[영의정]]에 추증하면서 시호인 문정(文貞)을 내렸다. 후학들은 덕천[[서원]][* 조식이 말년에 은거한 [[https://place.map.kakao.com/7835985|산청군 시천면]]에 있으며, 1576년에 세워지고 1609년에 사액되었다. [[정조(조선)|정조]] 때에는 [[채제공]]이 이곳의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없어졌다가 1926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회산서원[* 본래는 1576년 조식의 고향인 [[합천군]] 삼가현에 세워진 서원으로, 회현서원이라고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후 장소가 협소하다 하여서 1601년에 인근 황강에 있는 향천서원으로 옮겨졌고, 이곳이 1609년에 용암서원(龍巖書院)이란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용암서원도 덕천서원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이후 서원이 있던 터가 1987년 합천댐 공사로 수몰되자 2007년 [[https://place.map.kakao.com/22959856|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이 복원된 서원의 옆에는 남명이 합천에 머무를 때 학생들을 가르치던 뇌룡정이 있다.], 신산서원[*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소재. 본래 이곳은 산해정이라 불리웠는데, 조식은 김해에 머무르던 48세 때까지 여기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588년 서원으로 착공되었다가 전쟁으로 중지되었고, 1609년 완공되면서 신산서원이란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덕천서원, 용암서원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었다가 이후 일부가 복원되었고, 1999년에 이르러 전체가 복원되었다.], 백운서원[* [[북한산]] 백운봉 아래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1616년에 건립되어 같은 해에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811010_002|사액]]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철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을 건립해 스승의 업적을 기렸다. 이후 남명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건의도 몇차례 올라왔지만[* 1616년 진주의 생원 하인상을 시작으로 영남에서 7번, [[충청도|충청]]에서 8번, [[전라도|호남]]에서 4번, [[성균관]]의 사부학당에서 12번, [[개성시|개성]]과 [[홍문관]],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각각 한 번씩 조식의 문묘종사를 건의하였다.]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이 다수 참여한 [[북인]]의 주도로 지은 『[[선조실록]]』에 실린 조식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folding [ 『선조실록』에 실린 조식의 졸기 ] 처사 조식이 죽었다. 조식의 자는 건중으로, 승문원판교 조언형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여 어른처럼 정중하였고 장성하여서는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는데, 특히 『[[춘추좌씨전|좌전]]』과 [[유종원]]의 글을 더욱 좋아하였다. 저술에서는 기발하면서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형식에 구애되지 않았다. [[성균관|국학]]에서 선비들에게 시무책을 주문하였을 때 담당 관리에게 올린 글이 여러 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 명성이 사림들 간에 크게 알려졌다. 하루는 글을 읽다가 노재 허형의 '[[이윤(상)|이윤]]이 뜻했던 바를 뜻하며 [[안연]]이 배웠던 바를 배운다'라는 말을 보고 비로소 자기가 전에 배운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과감하게 실천하여 다시는 세속의 학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경의(敬義)' 두 자를 벽 위에 크게 써 붙여놓고 '우리 집에 이 두 자가 있으니, 하늘의 해와 달이 만고를 밝히며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현의 천만 가지 말이 귀납되는 취지를 요약하면 이 두 자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라 말하였다. 일찍이 문인들에게 '학문을 함은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예(禮)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에 힘쓰지 않고 갑자기 성리의 오묘함을 궁리하려 한다면, 이는 사람의 일에서 하늘의 이치를 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 마음에는 아무런 실지 소득이 없을 것이니 깊이 경계하여야 한다'라 하였다. 천성이 효도함과 우애에 돈독하여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상복을 벗지 않고 여막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우 조환(曺桓)과 숙식을 같이하며 따로 거처하지 않았다. 지식이 고명하고 출처진퇴의 도리에 밝아서, 세상의 도의가 쇠퇴하여 현자의 행로가 기구해지자 도를 만회해 보려는 뜻을 두었으나 끝내 때를 못 만났음을 알고 시골로 돌아갈 생각을 품었다. 만년에는 [[지리산|두류산]] 아래에 터전을 닦고 별도로 [[정사#s-6|정사]]를 지어 산천재라 이름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중종(조선)|중종 임금]] 때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명종(조선)|명종 임금]] 때 초야에서 은거하는 선비들을 등용하고자 할 때 천거되어 여러 번 6품관에 올랐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상서원판관으로 불러들여져 대전에서 임금을 대하였는데, 임금이 치란의 도와 학문하는 방법을 묻자 '군신 간의 인정과 의리가 서로 믿게 된 연후라야 잘 다스릴 수 있고, 임금의 학문은 반드시 자득해야 하는 것이므로 남의 말만 들으면 무익합니다' 말하고 끝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조(조선)|지금의 임금]]께서 보위를 이으신 후 교서로 불렀으나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고, 계속하여 부르는 명이 내리자 상소를 올려 사양하면서 '구급(救急)'이라는 두 글자를 올려 자기의 몸을 대신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당시의 폐단 열 가지를 낱낱이 열거하였다. 그 뒤 또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사양하고 상소문을 올렸으며, 다시 종친부전첨에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1571년|신미년]]에 흉년이 크게 들어 임금께서 곡식을 하사하자 사례하고 상소를 올렸는데 언사가 매우 간절하였다. [[1572년|임신년]]에 병이 심해지자 임금께서 전의를 보내어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죽으니 향년 72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께서는 크게 슬퍼하여 신하를 보내 제사를 내려주고 곡식을 내려 부의하였으며, [[사간원]] [[대사간]]으로 추증하였다. 친구들과 제자 수백 명이 사방에서 찾아와 조상하고 [[유학(학문)|우리 학문]]을 위하여 애통해 하였다. 조식은 도량이 맑고 고결했으며 두 눈에서는 빛이 나 바라보면 세속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말과 글은 재기가 번뜩여 마치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듯 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이욕의 마음이 사라지도록 하였다. 평상시에는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게으른 용모를 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칠십이 넘도록 언제나 한결같았다. 배우는 이들이 남명선생이라 불렀고, 문집 3권을 세상에 남겼다. ---- [[http://sillok.history.go.kr/id/kna_10502008_001|『선조실록』 6권, 선조 5년(1572) 2월 8일 을미 1번째 기사]] }}}|| 그리고 [[인조반정]]으로 북인 세력이 몰락한 후, [[서인]]과 [[남인]]이 주축이 되어 지은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조식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folding [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조식의 졸기 ] 처사 조식이 죽었다. 조식의 자는 건중이며, 그 선대는 [[창녕군|창녕]] 사람으로 합천의 삼가현에서 자랐다. 어릴 적에 호방하고 용감하여 잗단 예법에 구애받지 않아 스스로 그 재주를 과시하는가 하면 문장은 기이하면서도 예스럽고 고아함을 지향했는데, 내심 과거 급제나 공명(功名)은 손쉽게 이룰 것으로 여겼다. 그러던 중 일찍이 친구와 『성리대전』을 읽다가 노재 허형이 말한 '이윤이 뜻한 바를 뜻하고, 안자가 배운 바를 배우며, 세상에 나가면 공을 세우고 들어앉으면 절조를 지킨다'는 대목에 이르러, 장부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여겨 크게 마음을 가다듬고 실학에 뜻을 독실히 하였으며 아울러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그만두었다. 일찍이 서울에 갔다가 성수침을 방문했는데 그가 [[북악산|백악산]] 밑에 집을 짓고 세상사와 인연을 끊은 것을 보고는 마침내 그와 벗이 되었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벼슬하지 않고 지리산 아래에서 살았다. 취사(取捨)를 함부로 하지 않아 남을 인정해 주는 일이 적었고, 항상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칼로 턱을 고이는가 하면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여 밤에도 정신을 흐트러뜨린 적이 없었다. 한가로이 지낸 세월이 오래되자 사욕과 잡념이 깨끗이 씻겨져 천 길 높이 우뚝 선 기상이 있었고, 꼿꼿한 절개로 악을 미워하여 선량하지 않은 사람들을 마치 자기를 더럽히는 것처럼 봤기 때문에 그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오직 학도들만이 종유하였는데 모두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명종 때 [[이항#s-1.2|이항]]과 함께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대하여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 매우 소략하게 대답하였다. 물러나 이항과 술을 마시고 취하여 "그대는 가장 우두머리 도적이고 나는 다음가는 도적이다. 우리같은 도적은 남의 집 담장을 뚫는 부류가 아니겠는가"라 농담하였다. 그리고 그 길로 하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청백한 이름이 더 한층 소문이 났다. [[선조(조선)|임금]]께서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나자 임금께서 의원을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의원이 도착하기 전에 졸하였다. 나이는 72세였다. 조정 대신이 시호를 내려 칭찬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니 임금께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은 대신, [[대사헌]]에 추증하고 부의로 쓸 물품들을 하사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 조식의 학문은 마음으로 도를 깨닫는 것을 중시하고 치용(致用)과 실천을 앞세웠다. 시비를 강론하거나 변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학도를 위하여 경서를 풀이해 준 것은 없고, 다만 자신에게서 돌이켜 구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였다. 그 정신과 기풍이 사람을 격려하고 움직이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를 따라 배우는 이들의 공부가 열리는 일이 많았다. 『참동계』를 자못 즐겨 보면서 좋은 곳이 매우 많아 학문을 하는 데 도움이 있다고 했고, 또 [[석가모니|석씨]]의 최고 경지는 우리 [[유가(제자백가)|유가]]와 일반이라고도 하였다. 일찍이 '경의(敬義)'라는 두 글자를 벽에 써 두고 학인들에게 보였는데, 임종할 때 문인에게 "이 두 글자는 해와 달처럼 폐할 수 없다"라 하였다. 조식의 저서는 없고 약간의 시와 글들만 세상에 나돌 뿐인데, 학자들이 남명선생이라 불렀다. ---- [[http://sillok.history.go.kr/id/knb_10501001_001|『선조수정실록』 6권, 선조 5년(1572) 1월 1일 무오 1번째 기사]]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