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식(삼국지) (문단 편집) == 평가 == 213년 조식은 조조의 고향인 초현 주민들의 궁핍해진 생활과 황폐한 도시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부(=귀사부)를 지어 발표한 적이 있는데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당시 조조는 초현을 대규모 군사기지화한 상태였고,[* 동서 8km 규모의 거대한 지하땅굴이 발굴되었고, 발견된 것 외에 매몰된 부분이 더 있어 최대 12km 규모로 보는 주장도 있다. 이 땅굴은 군사용으로 송대까지 쓰이다 홍수로 매몰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땅굴과 약간의 건물터뿐이지만, 그 규모에 걸맞은 성벽과 군사 주둔지, 도로 등의 부대시설을 감안하면 조조 생전엔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채였을 것.] 그 규모상 1, 2년의 수탈로 완성될 정도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조식이 묘사했던 것처럼 초현의 지역 사회는 박살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조식이 이 귀사부를 발표한 것과 같은 해에 조비는 초현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하는 임와부라는 부를 지어 발표했다는 것. 시적인 영감을 어디서 얻느냐는 예술적 관점의 차이도 있겠지만, 한없이 막장스러운 인간성의 조비가 비판을 받는 21세기의 추세에 더해 조식은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자체부터 조비와 극명히 달랐다는 점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다만 이 문제가 잘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초현의 군사기지는 무슨 동탁마냥 개인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만들어진 요새가 아니라 1240년 홍수로 매몰되기 이전까지 군사용으로 계속 유용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조조 생전에 이 일대는 거대한 군사요새였던 셈인데, 지배자 개인의 안락함을 위해 축조한 동탁의 미오성과 달리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절에 요새를 건설한 것으로 국가 안보를 위한 행위에 수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고 해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것. 거기에 후대에까지 거의 천 년이 넘게 군사기지로서 효용을 발휘하고 있었다면 이는 이 지역의 군사기지를 세워 천 년 동안이나 사용한 것을 보면 언젠가는 군사기지가 되어야 했을 요충지 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단지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백성이 수탈 당했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 조조가 조식을 총애한 것이 단순히 재능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사례가 몇가지 있다. 조조 사후 한 일만 봐도 그렇다. 군사기지는 뭐 그렇다 쳐도 조비가 황제에 오른 후에 초 땅이 자신이 고향이라면서 백성들을 척박한 초로 강제로 이주시켜 둔전을 시행해 고향을 번영시키려고 하자 [[노육]]은 그 곳에서의 백성들의 빈곤한 생활을 보고 표를 올려 그들을 비옥한 양 땅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는데, 조비는 그의 말에는 따랐으나 크게 실망하고 마음속으로는 노육을 원망한다. 그리고 조비답게 그를 좌천시켜 이주한 백성들을 관리하게 하고 수양전농교위에 임명한다. 또 조비의 뒤를 이었던 조예는 초기는 잘하나 싶더니 후기로 가면 지나친 사치를 부렸다. 여러 이유가 겹쳐서 위 3대 동안 백성들은 상당히 고생했을 것이다. 조식은 시골을 전전하며 백성들의 곁에서 그걸 직접 보고 겪었으니 제법 공감이 갔을 것이다. 반면 조식은 조비 시절 '''자신의 봉국 내 영지를 지역 농민들에게 나눠 주고''' 같이 농사를 지으면서 백성들의 토지가 부족해 필요한 만큼 수확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표를 올려 농부들에게 땅을 하사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조예가 봉국의 장정들을 마구잡이로 차출해가자 이를 반대하는 표를 짓기도 했다. 이 모두가 가뜩이나 위태로운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을 감수하고 벌인 일이라, 기본적으로 아랫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매사 안하무인으로 방자하고 치졸했던 조비와는 인격 자체부터가 달랐다는 것. 조조 사후 조창의 부추김을 단칼에 거절한 것도 조식이 이토록 상식적인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딱 봐도 매우 영민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어진 군주상이 아닌가.''' 조조가 원가의 몰락을 보고도,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천재, 제왕의 인품, 그리고 의외로 대국적인 안목과 수준급 군재까지[* 바로 윗형 조창의 압도적인 무인 포스 때문에 대조적으로 문약한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 사마의의 대오전략을 비판할 정도로 문에 치우치지만은 않았고 심지어 조조가 만인지적 관우를 상대로 조식을 총사령관으로 형주에 급파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 적어도 지속적인 전쟁삽질을 한 큰형 조비보다 군략 또한 훨씬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겸비한 조식을 장자이지만 문제점이 많았던 조비를 제끼고 후계자로 세우려고 한 것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조비를 밀어줘야 했던 이유는 결국 조식이 '''장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대에 개인적인 총애 등 여러 이유로 장남이 아닌 그 이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은 유표, 원소, 손권 등의 경우엔 후대가 막장이 되었고 조비의 아들인 조예 역시도 조방이라는 근본을 알 수 없는 사람을 양자로 삼아버린 탓에 후대가 막장이 되었다. 즉 장자계승이라는 명확한 원칙을 어기고 계승을 시키려는 것은 굉장한 무리수이며 이게 문제없이 통하려면 [[양녕대군|장남에게 절대로 계승해선 안될 문제점이 있고]] [[세종대왕|장남을 대신할 확실한 대안과 그 대안에 납득할 만한 공감대가 있어야]] 가능할 일이다. 허나 조비는 조식보다 처지고 인격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후대 시대(오호십육국, 남북조시대)의 막장 황제들 만큼 문제가 심한건 아니고 그 나름대로도 지지자들도 많아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조조 세력도 원소 세력처럼 분열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미 원소와 유표의 사례를 본 이상 조조 입장에서는 안전빵인 조비가 더 나은 선택지가 될 수 밖에 없던 것. 당장에 처신에는 엄청나게 능했던 가후가 조비 편에 선 것을 생각해보자.] 밀려난 이후에도 네임밸류 자체는 워낙 거물급이었기에 행보를 쉽게 예상하기 어렵지만, [[하안]]을 필두로 조비, 조예 시대에 핍박받던 인물들이 7년 뒤인 239년, 조예 사후의 격변을 틈타 정권을 잡고 사마의와 대립각을 세웠던 것을 봤을 때 41세라는 이른 나이의 죽음은 너무 빠른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예 사후에도 살아있었으면 근왕 세력의 거두[*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조상(삼국지)|조상]] 정도밖에 안 되는 인물이 했으니 사마씨한테는 최고의 빈틈이 생긴 것.]로써 사마씨의 찬탈을 막을 수 있는 만약의 가능성을 짙게 남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조예는 조비처럼 대놓고 조식을 비롯한 다른 황족들을 갈구지 않았다 해도 의심병은 아버지 못지않게 심했다. 뭔가 제대로 홀렸는지 이해가 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예는 조방의 약한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그를 후계로 밀려는 아집을 [* 조방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부터 불확실한 상황에서 조예는 그런 짐덩이를 양아들로 세우는 자충수를 두었다.] 감안하면 더욱더 그렇다. 숙부이자 조씨 황실을 대표할 수 있는 조우와 어릴적부터 매우 친밀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조우가 정통성이 약한 후계자에게 위협 인물이라고 단정지어서 숙청하고 차라리 방계인 조상과 권신인 사마의에게 뒤를 맡길 정도였다. 조식은 조우의 형이자 한 때 조비를 앞질렀던 후계 유망주였는데 절대로 그런 실력자를 조예가 차라리 숙청하지 뒤를 맡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물론 완벽한 인간은 없듯이 조식에게도 큰 단점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위에 언급했던 음주벽. 조비의 음해공작에 보기 좋게 한번에 걸려든 것도 이 음주벽이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총애하던 자식이 겨우 한번의 술실수로 바로 쳐냈을 가능성은 낮은 만큼, 그전부터 이 문제로 조조의 속을 꽤나 썩였을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