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성민 (문단 편집) ==== 고려대학교 시절 ==== [[박찬호]](한양대), [[임선동]](연세대) 등과 함께 '황금의 92학번'[* 이외에 타자로는 [[박재홍(야구)|박재홍]](연세대), [[김종국(야구선수)|김종국]], [[송지만]](인하대), [[이영우]](건국대) 등이 대표적이다.][* 간혹 정민철을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정민철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으므로 '92학번'이라는 분류는 사실관계상 부정확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같은 연도에 졸업한 선수라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중 하나였다. [* 고려대 92학번 동기로는 [[손혁]], [[홍원기]](이상 공주고), [[김종국(야구선수)|김종국]], 김선섭(이상 광주제일고), 김지훈(신일고), 유진호(중앙고)가 있다. 이들 중 유진호만 프로에 입단하지 않았다. 자신을 포함한 7명이 동기회 '칠갑산회'를 만들었다. 김선섭과 유진호는 광주제일고와 중앙고에서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2학년 시절인 [[1993년]] [[9월]] [[영남대]]와의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하계리그|추계리그]] 경기에서 7회까지 [[노히트 노런]]을 이어가다가 안타를 맞아 깨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최남수[* 고려대학교에서만 17년이나 감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김경문]], [[양상문]], [[선동열]], [[박노준]], [[김응국]], [[박동희(야구선수)|박동희]],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 등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 고려대 출신의 스타 선수들은 모두 그의 제자였고 이들만 모아놔도 [[국가대표]]급이다. 그리고 무섭기로 소문난 감독이었다. 이상훈이 괜히 도망다닌게 아니다.] 감독이 조성민의 노히트 노런이 깨지는 순간, 안타깝게도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48세를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다. 결국 고려대는 10여일 후 열린 연세대와의 정기전을 감독 없이 치렀고, 끝내 승리하여 은사의 영전에 승리를 바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