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태조어진 (문단 편집) == 다른 어진 == ||<-2> [[파일:b9q6wTs.jpg|width=276]] ||<-2> [[파일:attachment/taejo123.jpg|width=276]] || ||<-2> 2011년 복원한 조선 [[태조(조선)|태조]]의 어진 ||<-2> 반쯤 타버린 원본 || 원본은 위에 나온 청포 어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존하는 다른 조선 시대 [[어진]]들과 마찬가지로 [[6.25 전쟁]] 기간 동안 [[부산 용두산 대화재|부산에 옮겨져 있던 중 화재]]로 얼굴을 포함한 절반이 탔다. 그래도 태조는 위의 [[어진]]이 남아 있었던 덕분에 얼굴은 그대로 옮겨서 그릴 수 있어서 붉은색 용포 버전의 어진은 복원할 수 있었다.[* [[순조]]와 [[효명세자|문조]]는 두 점 모두 얼굴을 포함한 절반이 타서 복원이 불가능하다. [[철종(조선)|철종]]은 구군복본 얼굴이 남아서 복원할 수 있었다.] ||<-2> [[파일:EBeYnnj.jpg|width=276]] || ||<-2> 준원전의 어진과 같은 얼굴[* [[http://blog.naver.com/sepoapool/220603144454|출처]] ] || 신숙주가 쓴 《영모록(永慕錄)》에 따르면 당시 선원전이라는 [[경복궁]]내 열성어진 봉안처에 받들던 태조 어진이 무려 26축[* 개수를 뜻하는 단어.]이나 있었으며 그중에는 말을 타고 있는 태조의 어진도 있었다고 한다. 반쯤 타버린 홍룡포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있는 청룡포 어진을 참조해 복원한 것이다. 청룡포 어진 원본은 태조가 승하한지 2년뒤인 태종 10년(1410년)에 이성계가 64세 때 모습이 담긴 경주 집경전 어진을 모사해 제작되었다. 여러가지 일을 겪으며 현재까지 남았는데 한반도에 있었던 주요 사고들을 볼 수 있다. *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엔 전주 지역 선비들이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전란을 피해 의주를 거쳐 [[묘향산]]으로 이안되었다. * [[묘향산]]에 있던 어진은 1614년에 불에 타 없어졌던 [[경기전]]을 다시 세우면서 [[전주]]로 돌아왔다. * 1636년 [[병자호란]]때는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졌고 이듬해인 1637년에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 1688년 [[한성부]]의 [[영희전]]에 모실 어진모사를 위해 한성으로 옮긴적도 있다. * 1763년엔 한 차례 수리를 했고, 1767년에 일어난 전주성 대화재 당시엔 전주향교로 옮겨지기도 했다. * [[동학농민운동]] 당시 위봉사 법당으로 이안된 뒤 다시 돌아왔다.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고종 9년이던 [[1872년]] 당시 경기전에서 받들던 어진이 오래되고 낡아서 영희전에 있던 태조의 어진을 화사 박기준, 조중묵, 배은배 등 8명이 4월 22일부터 5월 4일까지 모사 한 것이다. 모사본이 완성되고 [[1410년]]에 제작된 원본은 세초한 후 [[백자]] 항아리에 넣어 경기전 본전 뒤편에 있는 북쪽 계단 위에 묻었다고 한다.[* 세초란 실록이나 어진을 새로 작성한 뒤 오래된 기존의 어진이나 실록을 파기하는 것이다. 즉 모두 물로 빨아 내용이 보이지 않게 한다. 실록의 경우 물에 씻어서 글을 지우거나 불에 태우는 방법으로 세초를 했다. 하지만 어진의 경우 어떻게 세초하고 매안 했는지 구체적 기록은 없다. 다만 태조의 어진을 고종 때(1872년) 세초하여 백자 항아리에 넣고, 경기전 북편에 묻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 항아리를 발굴하면 자세한 방법을 알 수 있을 듯 하다.] 청룡포의 어진의 경우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은 물론 양쪽 트임새로 보이는 내공(內工)과 첩리(帖裏)의 형태가 조선 초기 초상화법을 닮았으며, 정면관을 훌륭히 소화해 낸 작품으로 보(補)와 견룡(肩龍)의 이금(泥金) 효과에 의하여 왕의 품위가 돋보이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태조 이성계의 최초 어진은 [[1389년]] 고려 [[공양왕]]이 왜구 토벌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성계의 공적을 치하하면서 그의 초상을 벽화로 그리라는 명에 따라 그려진 벽화다. 조선 왕으로써 그려진 어진은 [[1398년]]으로 왕위에 오른지 7년째 되던해에 그린 어진인데 그해 함주(함흥)의 준원전에 자신의 진영을 봉안토록 하였고 8월에는 계림(경주)의 집경전, 문소전, 장생전 등에 봉안되었는데 이는 고려를 무너트리고 세운 조선 왕실의 권위와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현재 경기전 정전의 어진의 원본은 2008년 보존 처리후 2010년 부터 경기전 경내 어진 박물관에 있으며 1999년 전주시가 권오창 화백에게 모사를 의뢰해 제작된 모사본은 어침실 문앞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는 전주시에서 어진 원본을 박물관으로 옮기고 모사본을 배치하려 했으나 [[전주 이씨]] 종친회의 강력한 반발로 모사본과 원본 2개를 보유하게 되었다. 붉은색 홍룡포 어진은 1837년 [[영흥본궁]] 준원전에 있던 어진을 모사한 것인데, 헌종이 용포의 색깔을 붉은 색으로 바꿔 채색하도록 지시하여 홍룡포로 채색되었다. ||<-2> [[파일:/image/028/2006/03/13/114224267111_20060314.jpg|width=552&height=368]] || ||<-2> [[영흥본궁]] 준원전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조선 [[태조(조선)|태조]] 어진 || [[함흥본궁]]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 위의 어진보다는 이전 시기에 그려진 듯한 모습이며, 곤룡포에 가려져 있지만 기골이 가려지지 않아 왕년의 역전의 용장 포스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성계가 태조가 됐을 때 나이가 50대 후반이라는 것과 당시 평균 체격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타고난 체격.] 이 어진은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함흥본궁이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고 전해진다. 따로 들고 나오지 않았다면 소실됐을 확률이 높다. --북한은 [[도서정리사업]]도 했다-- [[1913년]], 일본인 순사가 촬영한 사진이다. [[영흥본궁]] 준원전 어진은 전주 경기전 어진과 마찬가지로 전란을 피했던 어진이었기에 [[1398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당시 이성계의 나이는 64세가 되었을 때다. 저 얼굴이 예순넷이라면...(아닌게 아니라 저그림 그릴시점에 이성계는 딸(숙신옹주)도 하나 만들었다.) ||<-2> [[파일:6Hik4M3.jpg|width=276&height=368]] ||<-2> [[파일:PbRb1YM.jpg|width=276&height=280]] || ||<-2> 사진을 토대로 복원한 젊은 태조 어진. ||<-2> 확대 모습 || [[2013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영흥본궁]] 준원전 태조어진을 복원하였는데 일본인 순사가 남긴 준원전의 태조 어진 사진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2> [[파일:PJPIqI5.png|width=276&height=368]] || [[파일:WIuChNj.png|width=276&height=368]] || ||<-2> 열성어진에 실린 [[태조(조선)|태조]] 모습 ||<-2> [[출처]][* [[1926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태조 어진 사진이다. 일제강점기 기록에 따르면 선원전에 태조의 어진 3축에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흐릿한 형상이지만 현재 전주 경기전에 남아 있는 어진과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영흥 준원전 어진과 모습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선원전에 모셔졌던 3축의 어진이 각각 전주와 함흥의 어진을 이모한 것이라 해도 나머지 1축은 분명 다른 어진 있었을 확률이 있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선원전에 봉안 되어 있던 어진이 아닐까 싶다.]. ||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열성어진에 실린 태조의 모습이다. 매우 간략한 그림이지만 복식이나 수염의 형태를 보면 실제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이 있어보인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초기에는 정면상이었다가 중기로 접어들면서 묘사가 쉬운 측면상으로 바뀌었고, 조선말에 이르러 서양식 화법이 가미되어 정면상으로도 충분히 개성을 나타내기 쉬워지면서 정면상으로 회귀했다. 열성어진의 다른 초상과는 달리 조선초기 양식대로 태조만은 정면상으로 그려진 것으로 볼 때 최소한 열성어진을 그렸을 때 뭔가 보고는 그렸을 확률이 있어보인다. 다만 어떤 어진을 보고 그렸을지는 짐작하기 힘들다. 열성어진이 편찬될 당시에는 전주 경기전, 함흥 준원전, 한성 선원전에 각각 태조의 어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참고해 그렸을 것이다. 우측에 있는 초상화와 매우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초상화를 보고 그렸을지도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