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총독부 (문단 편집) == 조선[[총독]] == 조선총독의 위상은 매우 높았다. 명목상 의전도 1926년 [[일본 황실]] 의제령에 따른 궁중 석차 의전상 조선총독은 제6위에 해당하고, 대만총독은 제11위에 해당하는 친임관이다. 친임관은 천황이 직접 임명하는 직위로, 현재로 치면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장관급 이상의 최고위직 관료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 일본 제국 특성상 천황이 친임식을 통해 직접 임명한 관료와 그렇지 않은 관료의 차별성은 더욱 높았다. 참고로 1위는 대훈위 국화장 수여자 즉 황족들이고 제2위는 내각총리대신, 제3위 추밀원 의장, 제4위 [[원로(일본)|원로]], 제5위 국무대신 및 원수, 제7위 전임의 내각총리대신·추밀원 의장, 제10위 육·해군 대장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정치적 위상이나 실권 면에서는 오히려 의전서열보다 더 높았고, 총리대신 바로 다음가는 직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실제로 조선 총독은 천황을 제외한 본토의 모든 간섭을 피하면서 조선 내 모든 권한을 틀어쥐고 있었다. 마치 유럽 식민제국의 국왕 밑에서 거대 식민지를 다스린 [[부왕]]에 비견될 만한 수준이었다.[* [[대한민국]]의 [[국가공무원]] 직급에 비유하면, 조선총독은 [[부총리]]급이고, 정무총감은 [[장관]]급, 경무국장은 [[차관]]급이다. 반면에 대만총독은 장관급이니 격이 다르다.] 정치적 위상이 높은 만큼 조선총독을 역임하고 일본 본토의 총리로 올라가는 케이스도 많았다.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한국통감부]]의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아예 초대 총리대신을 포함하여 총리직을 세 번이나 역임하고 부임했다.[* 물론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직을 설령 안 했더라도 이미 당대에 일본 정계의 거물로 인정받았다.] [[아베 노부유키]] 같은 경우에도 짧게라도 총리직에 있다가 부임했고,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토 마코토]], [[고이소 구니아키]]는 역으로 총독을 하다가 나중에 총리대신으로 영전했다. 물론 [[우가키 가즈시게]]는 덴노에게 지명은 받았으나 육군의 반발[* 육군 출신이 왜 같은 육군에게 반대를 당했냐면, 우가키가 육군 내에서는 비교적 온건파에 속해서 군축을 단행해 육군 내 강경파들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로 취임하지 못하였고,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3.1 만세 운동의 영향[* 1904년 대장 진급과 8년간의 조선 주차군 사령관, 참모총장을 거쳐서 총독까지 오르면서 승승장구하였으나 결국 몰락.]으로, [[야마나시 한조]]는 부정부패와 타이완에서의 의거로 정계 은퇴 등으로 마무리되는 케이스도 있긴 했다. 역대 조선[[총독]]은 모두 현역 [[일본 육군|육군]], [[일본 해군|해군]] 대장 계급이었는데, 특히 해군 대장이었던 [[사이토 마코토]]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육군 출신이었다. 1919년 [[3.1 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여파로 일본 본토에서 '무력 통치'에 대한 반발이 일었다.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3.1 운동을 전후로 격동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중국에선 [[5.4 운동]]이 터졌고, 일본은 한창 [[다이쇼 데모크라시]] 바람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 갔고 군부에 대한 대립이 극심해져 있었다.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민간인인 문관 출신도 [[총독]]이 될 수 있도록 법령이 개정되었다. ' '''실제로 3대 총독으로 문관을 고려하고''' 당시 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있었던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후보자로 정했으나([[http://dk01337.egloos.com/v/4207921|#]]) [[일본 육군]], 그중에서도 조슈 번의 수장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무산되었다. 그런데 이사부로는 아리토모의 양자였다. 즉 자기 파벌의 이익을 위해 아들의 출세도 포기한 것이었다. 겨우 타협점을 찾아서 선출된 인물이 상대적으로 리버럴한 해군 출신이었던 [[사이토 마코토]]. 이마저도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해군 출신이란 이유로]] 조슈 번의 반대가 극심했었다. 이후 일본 제국이 패배하는 그날까지 단 한 번도 문관 출신이 총독으로 부임한 적이 없다. 이 점은 실제로 문관 출신 [[총독]]들이 부임하였던 [[대만총독부]]와 구별된다. 다만 대만도 식민통치 말기에는 다시 무관총독이 부임하였다. 일본(특히 육군)에게 대륙 진출의 지정학적 핵심지였던 조선의 가치가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군부의 집착도 그만큼 심했던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