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족 (문단 편집) === 정체성의 혼란 === 많은 조선족은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낀다. 이러한 혼란은 사실 [[재미동포]]든, [[재일동포]]든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고, 타국에서 사는 이민자 2세대~3세대에게는 공통적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국계라고 다른 사람과 같게 보지 않고,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왔다고 다르게 보는 식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에 있을 때는 [[친한]]적으로 보이고, 한국에서는 [[친중]]적으로 보인다. 하여 많은 한국인들은 조선족이 필요에 따라 한국인과 중국인의 정체성을 오가는 기회주의자로 오해하기도 한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연변, 만주 등에 살고 있는 조선인의 조국관은 여전히 한반도에 있었다.''' 이는 자기가 태어났거나 혹은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한반도라는 지역에 대한 자연적인 감정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이후 연변, 만주로 이주해 정착하게 된 조선인의 경우 자연스레 조국을 한반도라고 생각하기 마련일 것이다. 19세기 중반 한반도, 특히 북부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해 굶주림을 피하고자 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 1910년 일본제국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이후 일제강점기 시기 위안부, 강제징용 등을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그리고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 '만주개척운동'에 의해 끌려간 조선인 등은 태어난 곳이 본래 한반도였지만 타의로 강제이주가 이루어져 정착한 분들이기에 한민족이라는 조국관이 강하게 남을 수 있었다. 물론 17세기 명, 청 전쟁 당시 강홍립의 투항으로 인해 만주에 남게 된 조선인 군대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때 볼모로 끌려간 백성의 경우 정착 이후 여러 세대가 거쳐졌기 때문에 해방 시점 당시 태어난 곳이 한반도는 아니었지만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언어, 문화적인 환경을 구축하며 살아왔기에 그들 또한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해방 이후 연변 조선인이 조국을 한반도라고 생각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당시 연변에서 발행되었던 <연변신문>(延邊民報)과 북한과의 교류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신탁통치]]가 실시된다는 소식이 퍼진 이후 1946년 1월 8일 <연변신문>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연변 조선인의 생각을 옅볼 수 있다. 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외에 있는 우리들인들 어찌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가만히 있으며 또 어찌 가만히 있게 되랴".[* ≪延邊民報≫ 1946년 1월 8일자] 또한 1948년 3.1절 기념행사가 연길시 2중에서 개최된 당시 그때 기록된 <북조선 인민위원회와 인민군에 보내는 멧시지>에서 다음의 문구를 살펴볼 수 있다. "연변에 사는 백만 조선 동포는 평화롭고 자유롭게 조선민족의 명절! 3.1운동 29주년을 기념한다."고 하였다.[* <북조선 인민위원회와 인민군에 보내는 메시지>≪吉林日報≫ 1947년 3월 날짜 미상] <연변신문>, 연변에서 진행된 3.1절 기념행사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연변 조선인은 한반도를 조국으로서 생각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연변 조선인의 한반도 조국관은 김일성 등 북한에 의해 강화되기도 하였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정부가 수립된 이후, 북한은 연변에 있던 대리인들에게 만주 각지에서 북한 수립 기념 행사를 추진하도록 지시함으로써 동북 지역의 경축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했고, 또한 조국정부 수립 경축단을 결성해서 북한에 방문하게끔 하였다. 만주 내에서 펼쳐진 북한 정부 수립 경축행사는 다음과 같다. 1948년 9월 19일 연길시, "연변문화잡지사의 주최로 시내 2중 강당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정부 수립 경축좌담회를 개최하였는데, 참석한 각 정부 기관 군중단체 학교대포와 각 계층의 인사 1백 50여 명은 조선 민족으로서 천추의 열망이던 조국의 건국을 끓어 넘치는 열정으로 경축"하였다고 전해진다.[* ≪延邊日報≫ 1948년 9월 21일자] 이뿐만 아니라 1948년 9월 25일 길림시에 사는 조선인 300여 명은 "조선인민 민주공화국 정부 설립경축대회"를 거행하였고, 하얼빈의 조선인들 역시 조린극장에서 모여 경축 대회를 개최하였다.[* ≪延邊日報≫ 1948년 10월 4일자, 8일자] 또한 북한 정부수립을 축하하는 조선인 대표단이 경축단을 결성해서 북한에 방문하였다. 1948년 11월 10일 경축단은 평양에 도착한 후 15일에 김일성과 만나며 다음과 같은 말로서 북한 정부수립을 지지하였다. "조국 강토를 멀리 떠나 중국 동북에서 조국의 통일 독립을 갊아하는 중국 동북 조선동포 150만을 대표"하여 주덕해는 "독립적 민족으로서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게 된 광영을 깊이 감사하는 동시에 국장과 국기를 우리 해외 동포들도 함께 지지 옹호"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와 같이 만주 내에서 펼쳐진 기념행사와 북한 정부수립 경축단의 북한 방문은 연변, 만주에 사는 조선인들의 한반도 조국관을 강화시켰다. '''한편 연변 조선인들의 조국과과 더불어 연변 영토 귀속 문제 또한 조선족의 정체성 혼란과 결부될 수 있는 사안이다.''' 연변의 영토 귀속은 언뜻보면 민족정체성과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연변 영토가 중국에 완전히 귀속됨으로써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은 점차 변화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연변이 북한의 영토로 편입되었다면 연변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 문제는 제기될 필요조차 없어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연변, 그리고 현재의 연변 지역 일부를 가리키는 간도의 영토귀속 문제에 얽힌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1882년 청나라가 간도를 개간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정부에 조선인들의 철수를 요청하였지만, 조선 정부는 이중하를 보내어 백두산정계비의 비문에 경계로 되어 있는 토문강이 송화강의 상류이므로 간도는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며 간도를 지켜내었다. 이후 1900년에는 러시아가 간도를 강제 점령하자 조선 정부는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해 주민들을 안정시켰고, 이듬해에 그를 다시 간도관리사로 보내어서 간도를 함경도의 행정구역에 포함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간도 영토 문제는 일제강점기로 넘어와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이 통감부에 간도 파출소를 설치함으로써 간도를 본인들이 관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1909년 청과의 간도 협약을 체결하으로써 철두 부설과 탄광 개발을 목적으로 조선인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간도를 청의 영토로 선언하였다. 이렇듯 결과적으로 1909년 이후 간도는 청의 영토로 인정된 채 이어졌지만, 해방 이후 국공내전 기간에 연변 귀속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이때 연변의 조선인 지도자들과 북한이 연변을 자신들의 영토에 편이시키고자하는 시도가 있었다. 1947년 4월 길림성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었던 김광형은 "김일성의 지시를 몰래 받고 공개적으로 연변을 조선에 획분하여 달라는 황당한 착론을 제출"했다고 알려졌다. 이때 김광협은 다음의 말을 내뱉으며 연변의 한반도 편입을 주장하였다. "연변을 일본제국주의 침략 중에서 해방시키고, 많은 동지들이 자기 생명을 희생하였고, 이들 동지들의 선혈의 대가로 연변은 응당 민족자결을 실행해야 하고, 아울러 조선족의 사회주의 국가인 조선에 합병시키야 한다."[* 연변대학 신8,27혁명조반단 002전안조 유영준전투대, 앞 글, 11] 또한 1948년 11월 북한 정부수립 경축 동북조선인대표단이 북한에 입북할 때,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임민호는 "앞으로 민족자결을 쟁취하고, 가맹공화국을 건립해 연변을 조선에 떼어 넣음으로써 두만강 압록강의 경계를 없애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위 글, 13] 그리고 1948년 2월경 목단강시에서 유엔 조선위원단의 활동을 반대하는 군중집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북한에서 온 인사인 북조선 노동당 중앙총무부장 장도지로부터의 보고에서 북한이 연변을 한반도에 편입시켜야한다는 주장을 살펴볼 수 있다. "이역에서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위해 분투하는 해외동포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하며 만주와 조선이 역사적으로나 또는 지리적으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동북은 조선 혁명의 근거지이며 또는 우리 조선의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숨낳은 조선의 애국지사들이 이 땅에서 피를 흘리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인 연변의 북한 귀속을 주장했던 북한이나 만주 조선인 최고 간부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연변을 한반도의 한 연장으로서 생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이 국경을 분명히 하고, 소수민족에 대한 통제를 가함으로써 연변은 완전히 중국의 영토로서,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후 조선족은 6.25 전쟁과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 북한과의 대립을 이유로 점점 민족정체성이 흐려지지게 되며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게 된다.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6.25 전쟁]] 직전에 중국에서 귀국한 조선족으로 편성된 [[조선인민군]]. 6.25 전쟁 당시 상당한 전투력을 자랑했다.]이나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소속이었다는 점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조선족들 중 6.25 전쟁 참전자는 고령층의 소수에 불과하므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뒷 세대의 조선족들에게까지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 않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일본 같은 나라라도 이런 과거사를 부정하는 부류, 역사를 왜곡하려는 기성세대 극우를 비판하지 일반적인 일본인은 수많은 일본인이 매체에 등장하듯 강경한 사상을 가지지 않는한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연히 조선족이 중공의 만행에 동조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아무리 당대 조선족의 정체성이 모호했다 해도 6.25 전쟁 자체는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침략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독일 국방군]] 참전자들이 [[나치]]에 복무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받진 않지만 과거를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과오로써 반성하며 살아가듯, 국가의 잘못된 명령을 당시엔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치더라도 침략전쟁에 동조한 과오를 과오로 여기지 않는 조선족 참전자들 다수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다만,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인들의 한국 전쟁에 대한 절대적인 인식은, 북한이 먼저 침략한 것은 인정하더라도 남한도 미군을 등에 업고 북한 영토까지 들어가 통일을 시도했으니, 미군 포지션으로 중국이 개입하여 북한이 망하지 않게 도왔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점을(항미원조) 감안하기는 해야 한다. 물론 아예 북한군으로 참전해서 침략전쟁의 선봉을 맡았던 이들은 이런 허울뿐인 변명도 안먹힌다. 설령 중국의 교육이 그렇다할지라도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한국인들은 왜 대륙의 중국은 대만과 통일하려고 하는데 자신들의 통일은 방해하는가, 통일 한국에게 잘 대해주며 자신의 편으로 만들 생각은 안하는가([[저우언라이]]가 이 입장과 비슷했고,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도 그가 예견한 것과 유사하게 미국이 소련을 침공하지는 못했다.), 교역을 거부하는 북한 때문에 만주의 자기 땅이 가난해지는 것을 딱히 제대로 처리하지는 못하는 것이 이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특히 자신은 통일하고 싶어하지만 남의 나라의 통일은 방해한다는 인식이 한국에서 반중감정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 중국·북한을 아무리 옹호하려고 해도, 군공을 더 많이 세우고 중국에 친밀한 [[연안파]] 같은 세력을 숙청시키고 자신과 같은 조선족이 된 [[독립운동가]]의 공적마저 도둑질한 [[김일성]]의 북한 정권을 옹호하거나, 극도의 경제 교류 기피로 동북3성을 가난하게 만든 북한 정권을 옹호하는 자들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들이 현재 중국에 소속되어 있는 관계로, 조선족들의 6.25 전쟁 회고담은 상당히 편향된 점이 많다. 세균전 증언이나 남한의 북침 같은 것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가]] 출신 포함 남한의 고위 인사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같은 건 걸러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 한때 이들의 증언들이 사실처럼 기술되는 바람에, 조선족들을 도매금으로 안 좋게 보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자식을 한족 학교에 보내는 일이 많아져서, 젊은 세대의 조선족 중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한족 학교에서도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사실상 기초적 단계에서 멈춘다. 한족 학교에서 교육시키는 이유는 부분적으론 기성세대가 [[중국어]]를 잘 할 줄 몰라서 다른 중국인들과 교류할 때 많은 애로사항을 겪은 [[트라우마]]에서부터 출발, 한족들과 동일한 교육을 받음으로써 중국 사회에 더 잘 융화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신분증상으로만 조선족일 뿐 사고방식이나 생활습관과 언어 등이 완전하게 [[한족]]이 되어버린 자식을 보며 후회하기도 한다. 또한 조선족은 1870년대부터 중국에 살면서 한족 친척이 있는 경우도 많으며, 모계가 한족 혼혈인 경우도 매우 많다. 중국은 신분증에 민족명을 기재하고 있어서 신분증에는 [[한족]], 조선족, [[만주족]] 등이 쓰여져 있다. 조선족 여자가 한족과 결혼하는 경우는 한족으로 변경할 수 있지만 조선족 남자가 한족 여자랑 결혼하는 경우에는 신분증상으로 조선족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다수여서, 일부 조선족은 신분증상으로 조선족이지만 한족의 [[혼혈]]일 수도 있다. 부모의 민족이 다른 경우에는 하나의 민족을 선택하여 등록한다. 조선족은 대학을 갈 때 특별전형으로 유리한 점이 있고 한족과 달리 자식을 여러명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조선족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중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이 중국에서 태어나고 중국 국적을 가지고 초, 중, 고등학교를 중국 학교에서 한족들과 공부하였으며 이 중국의 교육 과정으로 인해 한국인과 매우 다른 사고방식과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조선족의 경우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반중]]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 들어서 아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 재외동포 비자를 받고 대한민국에서 거주하는 조선족들은 대한민국의 의외로 매우 심한 반중 성향을 체감하면서 불안과 분노를 느끼게 되고 이것은 조선족들이 대한민국에서 중국인의 정체성을 더욱 강조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이러한 악순환 사이클이 반복되며 꽤 큰 사회 문제가 되었고, 조선족 사회에서도 우려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다만 국적으로 중국인 정체성이 매우 강한 경우에도 조선족과 한족을 굳이 구별하고 민족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평소에는 이를 잘 드러내지 않지만 어느 정도 친해지면 서슴없이 한족을 까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중장년층의 경우 조선족은 중국 정부나 지도자가 인정하는 민족이었다는 말을 하고, 청년층은 다른 중국 내 민족들의 문화나 생활 습관이 미개하다며 민족적 자부심을 표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또한, 어릴 적 조선족 마을에서 자라 옆 마을 한족 애들과 싸웠던 무용담을 펼치는 조선족도 있는데, 이럴 때 '중국 애들과 싸웠다'고도 표현한다. 자신들도 중국 공민에 속하지만 사회의 주류인 한족과 구분할 때는 한족 중국인 vs 우리 조선족이란 구분 의식이 있는 것. 한족을 비롯한 타 민족과 비교해서 조선족의 우월감을 표현할 때 '중국인들은 조선족보다 문명하지 못해 ㅉㅉㅉ'[* 여기서 문명(文明)이란 현대적인 시민의식, 개화 정도를 의미.]라고 말할 때도 있다. 중국인이면서 한민족인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백청강]]이 한국에서 출세하자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처럼 조선족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왜 자신들이 소속된 국가인 중국의 주석이 아니고 한국 대통령일까? 그건 바로 아프리카 [[케냐]] 이민자 출신인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되듯이 한국으로 이민한 중국인인 조선족이 한국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이는 중국 조선족의 의식 속에 역사, 민족, 국가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족에서 한국 대통령이 나오는 것에 맞는 비유는, [[버락 오바마]]가 [[케냐]] 대통령이 되는 것. 아니면 리셴룽이 중국 주석이 되는 것. 이는 조선족들 또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연평도 포격전]] 직후 한국을 무시하는 조선족이 발견되는 반면에, 한국식 민족주의로 무장하여 [[고구려]]의 기상을 외치는 젊은 조선족도 발견할 수 있다. 서버가 중국밖에 없는 듯한 어느 조선족 커뮤니티에서는 이들끼리 역사, 민족, 국가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중국 한족 애들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 있냐', '아니 그럼 한국인들은 우리한테 잘해주냐?' 등. 특히 거주 지역이 지역이니만큼 한국 어디선가 퍼온 듯한 [[고구려]]와 [[발해]]에 관한 게시물이 종종 올라오는데, 한국의 [[환빠]]의 영향을 받은 주장을 올리기도 한다. 즉, 태어날 때부터 민족과 국가가 같아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한국인과, 태어날 때부터 민족과 국가가 다른 채로[* 게다가 고국인 대한민국과 북한이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중국의 조선족으로 자라다가 이후 고국의 존재를 체감하게 되는 조선족의 민족의식 및 국가의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위협적인 이민족이 없는 한국에서는 국내에서 타민족으로부터 차별당하거나 구분될 수가 없다. 하지만 조선족은 자신들과 엮인 국가가 중국이며 변경의 [[소수민족]]이라, 그 정체성에서 당연히 한국인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의 '민족의식'이란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주변 '국가'에 비교하고 대항하는 사실상의 '''국민의식'''이다. 그러나 조선족에게 민족의식이란, 절대다수의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를 경계하는 '''소수민족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의식'''이다. 애초에 '민족의식'이란 단어조차 한국인, 조선족에겐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다른 국가 교민들은 그 국가가 정체성을 강요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중국은 국가가 정체성을 강요하는 상황이라 조선족이 특히나 이런 혼란이 심해질 수 밖에 없다. 미국이 자국 국민들에게 정체성을 강요했다면 재미교포도 한국인의 미국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조선족이 중국 땅에서 살면서 굳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스스로 완전 중국인이라 자칭한다면 중국어만 배우면 될 걸 왜 어렵게 하나의 언어를 더 배워 머리를 싸쥐겠는가? 자신들은 조선 민족이고 그 아이덴티티를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소위 한국인이 조선족을 같은 [[한민족]]으로 승인하든 부인하든 조선족은 그동안 [[조선민족]]으로 살아 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이른바 친한/친중이라는 것도 사실은 한국을 싫어하는 중국인/중국을 싫어하는 한국인만큼 반한/반중 정서를 보이지 않는 상대적인 것에 가깝다. 한국인들이나 중국인들이나, 다른 나라 국민들을 알아갈 때 실제 접촉보다 인터넷을 통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인데, 인터넷 정보는 언론사 뉴스를 포함해서 왜곡되었거나 편향적인 시각이 많고, 팩트체크도 자신의 확증편향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에 한중 양국의 이런저런 갈등으로 진영논리까지 개입되기 때문에 객관성이 결여되기가 십상이다. 가령 중국에서 무슨 흉악범죄가 벌어졌다고 하면 일부 한국인들은 중국이 무슨 사람이 살지 못할 인외마경이고 중국인들은 모두 잠재적 범죄자인 것처럼 반응하지만, 한국에서 같은 타입의 범죄가 일어나면 그러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한국이란 땅에서 살아가며 그러한 모습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며, 한국의 멀쩡한 모습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들 역시 중국에서 살아가며 실제로 겪어보았기 때문에 흉악범죄 뉴스가 떴다고 해서 중국과 중국인을 무작정 악마화하지는 않는 것이다. 반대로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한국기원설|자국의 위인들과 문화를 도둑질]]하려는 줄 알지만, 조선족들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교제한 한국인이나 TV 등에서 보이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모든 한국인들이 환빠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많진 않으나 조선족들 중에서도 역시 현재 중국의 정치적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고 눈치를 챈 사람들은 중국의 행태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며, 심지어 이규호,[* 前 [[중화인민공화국 인민경찰|중국 공안]]. [[탈북자|동포]]를 고문하는 방식 등 자국 공안의 부패에 대한 환멸을 느껴 망명했다. 현재 난민 자격으로 체류 중.[[https://m.khan.co.kr/article/201208012157085|#]] ] 지명광, 권평[* 인권운동가.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출신이며, 고향 연변에서 [[시진핑]]을 비판하는 티셔츠를 입었다가 징역형 및 출국 금지령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https://hongkongfp.com/2016/11/03/young-chinese-activist-missing-after-sharing-plan-to-wear-xitler-t-shirt-on-cpc-anniversary-report/|#]] 2023년 8월, [[제트스키]]를 타고 장장 14시간을 이동하여 상륙에 성공.] 등 드물게 한국으로 망명하는 조선족들도 있다. 사실 중국이라는 정치 통제가 강한 독재 국가에서 외국 국적으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대혁명]]과 같은 험란한 시기에는 외국에 연고가 있다고 간첩으로나 반역자로 몰리는 사건이 부지기수였고,[* 현재 북한과 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중국 국적을 가져야만 한족과 똑같이 땅을 분배받고 농사를 할 자격이 주어졌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이 현지 국적을 택하는 것처럼, 중국에 생활기반을 둔 사람이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중국 국적을 선택했다고 '고국을 배반했다'라는 식으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국적은 개인의 선택이다. 어떤 나라에 태어났다고 그 나라에서 평생 살아야 할 이유는 없고, 내가 몸을 의탁하고 보호받으며 그 대가로 충성을 바칠 나라를 정하는 건 내 마음이다.] 또한 중국 국적을 택했다면 당연히 자신이 속한 국가인 중국에 애국심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국민을 외국인보다 먼저 챙길 수밖에 없는 것이고,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현지 국가의 정책에 맞춰 살아남는 방안을 찾았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따지자면 한국과 중국 간의 정치적 긴장이나 자국민들의 건전한 애국심을 침략전쟁이나 각종 범죄, 패권주의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왜곡한 중국 지도부에 그 책임을 물어야지, 조선족 개개인을 비난해서 될 일은 아닌 것이다. 중국의 조선족처럼 2개 이상의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영어권]]에서는 [[TCK]](제3문화 아이)로 분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