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인민공화국 (문단 편집) == 건국 선포 및 각료 명단 == >건준의 결성 초기부터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게 된 것은 여운형•건국동맹과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적 친화성, 그리고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자들의 친분관계도 바탕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소련의 서울 진주 소식이 크게 작용했다'''. 여운홍에 따르면 '''여운형은''' 8월 15일 아침에 엔도를 만난 뒤 정백과 함께 돌아와 단독으로 담소를 나누었으여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기 때문에 사태가 달라졌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중략) 이에 '''여운형과 건준 참여세력들은 사회주의 계열을 적극 참여시켜 소련군의 남한 진주에 대응하는 국가건설을 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1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것을 마치 여운형의 것을 빼앗았다고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여운형이 소련 진주 소식을 듣고 사회주의 계열 인사를 적극 참여하게 한 것이다. 또한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를 빠르게 전국적으로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해방 직전까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들이 대중 속에서 조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부터 해방까지의 국내 독립운동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가들이 이끌었다. [[경성콤그룹]] 뿐만 아니라 [[건국동맹]]도 구성원 다수가 이전부터 계속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던 사람들이다. >공산당 재건운동가들이 대중 속에서 활동한 결과 대중에 뿌리내린 지도중심을 형성하고 점차 공산주의자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도권을 획득해 갔다. 지역과 대중에 뿌리박은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해방 후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나 전국노동조합평의회 등이 급속하게 결성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박한용, [[http://m.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bc5f7ddbb4d7c61bffe0bdc3ef48d419&keyword=%EB%B0%98%EC%A0%9C%EB%8F%99%EB%A7%B9#redirect|일제강점기 조선 반제동맹 연구]], p4 >해방직후 한국에서는 일대 혁명적 고양이 일어났으며, 그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8·15후 분출하는 대중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조직적 역량이 일제 말기에 어떻게 준비됐는지를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일제 말기의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다. 치안유지법 위반사건은 중일전쟁 발발 후 점차 감소 경향을 띠며 1940년에 그 최저 상태를 기록했으나,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부터 양상이 역전되어, 그 증가 추세는 일제의 패망 시기까지도 계속된다고 한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은 서울지방에서만도 경성콤그룹을 비롯하여 공산주의자협의회, 스딸린단, 화요회그룹, ‘자유와 독립’ 그룹 등과 같은 비밀 단체를 결성해서 활동했다. 경성콤그룹은 1936년 12월에 검거된 이재유그룹의 잔존 성원들이 이관술의 지도하에 재결집되어 활동하다가 박헌영을 조직의 지도자로 맞아들여 결성된 것이었다. 이 단체는 기존의 각파 사회주의자를 망라하여 구성된 것으로서 서울지역의 노동자·학생층은 물론 함경도를 포함한 지방에까지 자신의 조직활동을 확장했다. 이 단체는 1940~41년에 몇 차례의 검거사건으로 약화되긴 했으나 해방직전까지 줄곧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사회주의자들이 참가한 비밀단체 가운데에는 건국동맹과 같은 통일전선 단체도 있었다. >---- >韓國史硏究의 回顧와 展望[[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totalCount=2&itemId=hn&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types=&searchSub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position=1&levelId=hn_026_0050_006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D%B4%EA%B4%80%EC%88%A0&searchKeywordConjunction=AND|#]] 일단 9월 6일에 졸속으로 국가를 선포한 3일 뒤인 9월 9에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미군정은 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인수받았다. 이보다 5일 뒤인 9월 14일에 건준 중앙인민위원회는 역시나 총선 등의 정당한 절차로 제헌의회를 만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미군정과 소군정의 협조를 받아 총독부의 행정조직과 경찰조직을 공식적으로 인수하지도 않은채, 중앙정부 관제와 각료 명단을 공포했다. 이러한 중앙정부 관제와 각료조직도는 여운형이 아닌, 박헌영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공표되었으며, 명목상으로는 임정과 각 파벌조직들의 균형을 맞춘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상 조선공산당이 실권을 쥐고 있는 형태였다. >그러나 '''인공의 수립이 조공의 일방적인 독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운형도 인공 수립에 적극 관여하였다'''. 여운형은 9월 6일의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개회사와 격려사에서 비상한 시기에 연합국의 진주에 대비하여 "연합국과 절충할 인민총의 집결체"로서 인공이 수립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여운형은 또한 "혁명가는 정부를 조직하고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인민이 승인만 한다면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정부는 그대로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여운형은 북한에서의 "소군정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국의 공동방침으로 해석"하여 남한에서 "미군 역시 조선인민에게 맡길 줄로 예상"하는 낙관적 정세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여운형은 일제시기부터 혁명단체와 혁명가들이 중심이 되어 과도정권을 수립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권구상은 인공과 다르지 않았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5 >'''여운형은 인공 수립에 합의한 뒤''' 건준 내부의 반발에 부딪치자 조각발표를 보류하려고 하였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인공 대표대회에서 인사도 했고 인공 부주석의 지위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7 여운형은 아무것도 몰랐고 박헌영만이 주도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여운형이 요양중이었던 것은 맞으나 각료 명단은 여운형과 합의하였으며 발표만이 박헌영의 독단이었다.[* 출처: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7] 발표도 여운형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다. >'''인공 수립 당시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각도 관공서와 일본인 공사 재산을 압수하고 일군을 무장해제시켜, 모든 것을 조선인민에게 맡길 뿐 그 목적이 없는 듯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소군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군의 공동한 최고방침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며 미군도 38도 이남에 진주하여 오면 역시 조선인민에게 모든 것을 맡으라 할 줄 예상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맡을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급히 인민대표회의를 열어 국호를 결정하고 정부조직법을 결정하며 인민위원을 선거하였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9 * [[주석(직위)|주석]] [[이승만]] * 부주석 [[여운형]] * [[국무총리]] [[허헌]][* 가인 [[김병로]](초대 [[대법원장]]), 애산 [[이인]](초대 [[법무부장관]])과 함께 3대 항일 인권[[변호사]]로서 조선인 인권 보호를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들이다. 허헌의 호가 긍인이라 이 셋의 호와 이름에 모두 인이 들어가서 일명 '삼인'으로 불렸다.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한제국]]과 일제의 변호사 자격증을 모두 취득했다. [[1926년]] 조선 최초의 6개월간 민간인 세계일주를 다니기도 했다. [[신간회]]나 건준에 적극 참여하며 온건좌파의 성향을 띠었으나, 결국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냈다. [[1951년]] 익사.] * [[내무부]]장 [[김구]](대리 [[조동호]]·김계림) * [[외무부]]장 [[김규식]](대리 최근우·강진) * [[재무부]]장 [[조만식]](대리 [[박문규]]·강병도) * [[국방부|군사부]]장 [[김원봉]](대리 김세용·장기욱) * [[상공부|경제부]]장 하필원(대리 김형선·정태식) * [[농업부|농림부]]장 [[강기덕]](대리 유축운·이광) * [[보건부]]장 이만규[* 이후 월북.](대리 이정윤·김점권) * [[교통부]]장 [[홍남표(1889)|홍남표]][* [[연해주]] 고려공산당 출신 남로당 간부.] (대리 이순근·정종근) * [[공안부|보안부]]장 [[최용달]][* 1927년 [[원산 총파업]]으로 이름을 알린 좌파인사.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 교수로 조선건국동맹 때부터 참여하였다. 이후 월북하여 북한 [[헌법]]을 기초하였으나 [[숙청]]당했다고 추정된다.](대리 [[김무정|무정]]·이기석) * [[법무부|사법부]]장 [[김병로]](대리 [[리승엽|이승엽]]·정진태) * [[교육부|문교부]]장 [[김성수(1891)|김성수]](대리 김태준·[[김기전]]) * [[문화부|선전부]]장 [[이관술]][* [[이재유]]와 나란히 [[경성재건그룹]]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경성콤그룹]]의 창건자이자 지도자였던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고문 후유증을 앓는 몸으로 해방의 날까지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던 투사 중의 투사였다. 따라서 광복 후 '선구' 여론조사 5위의 인기를 누렸다. 김일성보다 인기 많고 박헌영과 비슷했으며 권력도 그만큼 누리던 조선공산당 지도자로서 반박헌영파와도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박헌영에게 불만을 지닌 당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조율하는 위치에 있었다. 학술적으로 조작된 사건으로 판명된 [[정판사 사건]]으로 체포령이 내려졌는데도 월북을 거부하고 남한에 남았다가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첫 피해자가 된다. 독립운동만 하고 광복 후에는 합법 정당 활동만 했으며 아무런 이적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정말 아무 잘못 없이 대한민국으로부터는 유공자 지정을 받지 못하고 대중에게는 마녀사냥을 당하는 중. 이관술은 광복 후에도 반곡초등학교 건물을 신축할 때 542평(1791.74㎡)의 땅을 기부하는 등 사회에 기여했다.](대리 이여성·서중석) * [[정보통신부|체신부]]장 [[신익희]](대리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조두원) * [[노동부]]장 이위상(대리 김상혁·[[이순금]][* [[이재유]] 그룹의 활동가이며 [[경성콤그룹]]의 창건자인 독립운동가.]) * [[서기장]][* 사무국이나 서기부로 표기된 자료가 있다. 리강국이 서기인 것은 확실하다.] [[리강국]][* 보성고보를 수석졸업하고 독일 유학했던 엘리트 출신으로 독일 공산당(KPD) 당원이기도 했다. 국내에서 공산당, 독립운동 활동을 하다가 연인인 [[간첩]]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하였으나 역시 숙청당했다.](대리 최성환) * 법제부장 최익한[* 공산당 ML파, 역시 월북 후 숙청.](대리 김용암) * 기획부장 정백[* 고려공산동맹 중앙위원, 조선청년총동맹 상무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공산주의 운동가.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 등 좌익 활동을 이어가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했고 1949년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전향하였으나 [[6.25 전쟁]] 와중 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어 총살되었다.](대리 안기성) 보듯이 고위층을 보면 좌우가 합작한 내각을 구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임시정부 출신은 명목상의 고위직만 얻었고, 실상 주요 요직은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나 좌익세력이 차지하였다.[* 이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 주창한 '8월 테제'에 따른 것이다. '8월 테제'란, 초창기에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세력을 포용하면서 나아가 최종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인민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단계적 전략 요지의 내용을 담은 선언을 말한다.] 당시 [[이승만]], [[김구]]는 아직 해외에서 귀국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김성수(1891)|김성수]], [[김병로]], [[조만식]], [[신익희]] 등의 우파인사들도 이름은 올라갔지만 실제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조선인민공화국 설립 이전에 이미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등 일부 우파 인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환국환영회 및 국민대회준비회(국준)를 조직하고 9월 8일 경에 조선인민공화국 타도 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우파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이승만]]도 미국에서 귀국한 다음 방송을 통해서 정식으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주석 취임을 거절했고 [[김구]]와 [[김규식]]도 11월 말경 공식적으로 입각을 부인했다. 특히 [[김규식]]은 [[허헌]]과의 담화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설립에 대해 여운형 측은 자신과 어떠한 의견도 교환하지도 않았고, [[미국]]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임명시킬때는 당사자의 의사를 물어보는데 자신이 일방적으로 인공의 외무부장으로 취입당한것은 불법적이라며 여운형과 인공 측에게 일방적으로 취임당한것에 불만을 드러냈다. 결국 '''위 각료명단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인공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이름을 도용당한 데 불과하고, 실제 취임한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각각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8886&cid=46626&categoryId=46626|한국문화대백과]]와 [[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1_28_0040|자료대한민국사]]에서 확인 가능하다.] 건준 당시 우파 대표로 부위원장이었던 [[안재홍]]은 건준을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고, 건준위를 2차 개편해 김병로, 이인 등 우익 인사들을 합류시켜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여운형을 설득했다. 그러나 여운형이 이를 거절하면서 안재홍과 우파 세력이 건준을 떠나게 된다. 이 때문에 비교적 좌파에 포용적이었고 건준위 합류를 생각했었던 김병로도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조선인민공화국 정부라는 것은 실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없는 명목상의 것에 불과'''했다. 여하간 건준은 일제 법률의 완전 폐기, 친일 민족반역자의 토지몰수, [[철도]]·통신·금융기관의 국유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정강과 27개조 시정방침을 발표했다.[* 이 정강정책은 [[조소앙]]이 기초해서 임시정부가 내걸고 있던 [[삼균주의]]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거창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인공"은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30><:> {{{#005BA6,#28aeff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br]{{{-2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 ||<-5><:> 후보 ||<-5><:> [[여운형]] ||<-5><:> [[이승만]] ||<-5><:> [[김구]] ||<-5><:> [[박헌영]] ||<-5><:> [[이관술]] || ||<-5><:> 지지율 ||<-5><:> 33% ||<-5><:> 21% ||<-5><:> 18% ||<-5><:> 16% ||<-5><:> 12% || ||<-5><:> 후보 ||<-5><:> [[김일성]] ||<-5><:> [[최현배]] ||<-5><:> [[김규식]] ||<-5><:> [[서재필]] ||<-5><:> [[홍남표]] || ||<-5><:> 지지율 ||<-5><:> 9% ||<-5><:> 7% ||<-5><:> 6% ||<-5><:> 5% ||<-5><:> 5% || ||<-30><:> {{{#005BA6,#28aeff '''내각이 조직될 경우 적당한 인물'''[br]{{{-2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2호}}}}}} || ||<-6><:> [[대통령|{{{#000,#fff 대통령}}}]] ||<-6><:> [[내무부|{{{#000,#ddd 내무부장}}}]] ||<-6><:> [[외무부|{{{#000,#ddd 외무부장}}}]] ||<-6><:> [[재무부|{{{#000,#ddd 재무부장}}}]] ||<-6><:> [[국방부|{{{#000,#ddd 군무부장}}}]] || ||<-6><:> [[이승만]] ||<-6><:> [[김구]] ||<-6><:> [[여운형]] ||<-6><:> [[조만식]] ||<-6><:> [[김일성]] || ||<-6><:> [[법무부|{{{#000,#fff 사법부장}}}]] ||<-6><:> [[교육부|{{{#000,#fff 문교부장}}}]] ||<-6><:> [[상공부|{{{#000,#fff 경제부장}}}]] ||<-6><:> [[교통부|{{{#000,#fff 교통부장}}}]] ||<-6><:> [[노동부|{{{#000,#fff 노동부장}}}]] || ||<-6><:> [[허헌]] ||<-6><:> [[안재홍]] ||<-6><:> [[백남운]] ||<-6><:> [[최용달]] ||<-6><:> [[박헌영]] || ||<-30><:> {{{-2 * 위 표는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45~51에 실린 정치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를 바탕으로 만들었다.[br]여론조사 제1호에서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http://botw.egloos.com/11227268|출처 및 참고자료]]}}}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틀:광복 직후 한국의 정치지도자, version=88)] 설문에 포함된 부처는 [[대한제국]] 당시 7부(내부, 외부, 탁지부, 학부, 군부, 법부, 농상공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당시 7부 1국(내무부, 외무부, 재무부, 학무부, 군무부, 법무부, 교통부, 노동국)을 조합한 듯 하다. 그 당시 해방정국에서 민중들이 바라는 내각과 거의 유사한 점에서 최고위층만큼은 민중의 지지를 받을 인사들로 구성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상술한 것과 같이 그들이 참여의사를 밝히지도 않았는데 인공에서 명의를 일방적으로 도용했다는 것.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에 대해 좌파조직이라는 비난이 대두되자,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여운형은 먼저 국내의 혁명동지를 규합·단결하여, 국가건설을 준비하고, 해외 혁명동지들이 입국하면 이들과 함께 혼연 일체의 과도정권을 세우려 하였다.[[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2_0030_0010_0010_0030|출처]]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 조선을 건설함에 있어 구태여 빛깔을 문제삼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 모두가 합력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 조선인민공화국이라면 적색으로 아는 사람은 소학교 1학년과 같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갈라지면 넘어지고 뭉치면 일어선다. 한민당·국민당·건국준비위원회 등이 손을 잡고 국민 총력을 집결해야 하며 이것을 인민 대중은 원하고 있다. 그리고 사대주의 배외사상은 절대로 배격해야 한다. >---- >여운형[[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2_0030_0010_0010_003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