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조선시대 (문단 편집) == [[붕당정치|붕당정치기]]: 16세기 후반 ~ 17세기 전반 == 사림의 집권 자연스레 각자 학파와 친소관계에 따라 당을 이루어 서로 대립하게 되는 붕당 정치가 시작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림은 크게 [[이황]], [[조식(조선)|조식]] 등의 [[동인(조선)|동인]]과 [[이이(조선)|이이]], [[성혼]]의 [[서인]]으로 나뉘어져 대립했으며[* 당시 동서 분당의 원인으로는 구 훈구파에 대한 처우의 문제가 컸다. 이에 따르면 동인은 강경파에, 서인은 온건파에 해당한다. 참고로 초기의 동인과 서인은 결코 대등한 세력은 아니었다. 동인이 다수 소장파에 해당했으며, 서인은 소수파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인의 외연이 더 넓어져 그나마 동인에 대항할 만큼의 세를 갖추게 되었던 것.], 두 당 간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 [[정여립의 난]]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조선은 개국 200년 만에 이웃 일본의 [[임진왜란|대규모 침략]]을 맞게 되었다. 이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사건으로 조선을 크게 둘로 나눌 때 갈림점이 되는 사건으로 임진왜란 이전을 조선 전기, 임진왜란 이후를 조선 후기로 나눈다. 마치 [[왕망]]의 난으로 [[한나라]]를, 왕망의 난 이전을 [[전한]], 왕망의 난 이후를 [[후한]]으로 나누는 것과 같다. 100여 년의 [[센고쿠 시대]] 동안 분열되어 있던 일본의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 과정에서 쌓인 여러 내부 문제들이 직면해 있었고, 이 문제들을 풀기 위해 대륙 침략, 즉 [[한반도]] 침략을 감행한다. 히데요시는 [[지휘관]]을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로 삼은 뒤 20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동원해 이를 둘로 나눠서 각자에게 준 뒤 전격적인 침략을 단행하고, 오랜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를 거쳐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일본과 달리 200여 년간 평화 시대를 맞이하며 군제 운용이 해이해져 있던 조선은 전쟁 초기 일본군의 침략에 파죽지세로 밀리고 만다. 일본군은 초기의 승기를 바탕으로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성까지 떨어뜨렸으며, 선조는 [[압록강]] 앞인 [[평안도]] [[의주]]까지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이순신]]을 필두로 한 조선 수군의 활약, 각지에서 재정비된 의병과 육군의 반격으로 전세는 고착세에 들어갔고, 조정의 요청에 따라 [[명나라]]가 지원군을 파병하면서 전세는 오히려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결국 일본군은 전선을 남해안으로 물릴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정유재란]]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패퇴(철수)하고 조선은 마침내 전쟁에 승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수많은 사망자와 농토 황폐화 등 전쟁 피해도 막심했다. 당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 말, [[광해군]](15대) 시기에 더욱 극심해진다. 임진왜란 직후 동인은 서인을 정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인은 서인에 대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졌으며, 북인은 이후 남인마저 실각시켜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북인은 크게 초강경파와 상대적 온건파인 [[대북]]과 [[소북]]으로 다시 갈라졌다. 대북은 여러 옥사와 폐모론을 주도하며 소북을 밀어내어 권력 독점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으나, 이는 서인 주도의 [[인조반정]]을 초래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반정 이후, 대북은 숙청되었고, 소북은 당파로써의 힘을 잃고 여타 당파에 흡수됐으며[* 대개 [[남인]] 혹은 [[서인]]으로 전향했다.] '서인 여당, 남인 야당'의 공존 형태의 붕당정치가 구현된다. 한편, [[중원]]의 지배자인 명나라가 [[이자성|농민 반란]] 등으로 내리막을 걸으면서, [[만주]]의 [[여진족]]들은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후금]]이라는 국가를 형성하고 명을 위협했다. 반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인조]](16대) 정권은 [[광해군]]의 양면 외교를 비판하며 대명의리론에 기울어져 있던 사대부들의 여론을 따라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친명배금을 표방한다. 그러나 이는 후금을 자극하여 [[정묘호란]]을 터뜨렸으며, 국호를 [[청나라]]로 바꾼 뒤에는 다시 사대(신종)를 강요하게 된다.[* [[정묘호란]] 당시 침략한 [[후금]]의 군세는 3만여 정도였고 개전 초반부터 협상을 요구했기에 형제관계를 맺고 교역을 활성화시키는 정도로 끝났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조선의 완전한 신종을 추구했으며, 이는 조선이 친명배금 정책을 상당 부분 포기했더라도 반드시 불거져야 했던 충돌이었다.] 조선에선 반발하며 척화론이 크게 대두했으나 청은 대규모 병력을 일거에 투입하여 침공했고 조선은 맞서 싸웠으나 참패하여 청에 굴복하며, 군신관계를 맺게 한다([[병자호란]]). 이때 조선은 국왕인 인조가 삼전도에서 당시 청나라 황제 태종 홍타이치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표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다수의 백성들이 노예로 붙잡혀 갔고, 왕자들이 볼모로 잡혀가며 청의 내정 간섭을 받고 막대한 공물을 지불하게 되는 등의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아야 했다. 이는 조선의 왕실과 사족들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이때의 충격은 이후 청에 대한 반감이 커지며 [[소중화]]주의와 예학의 강화, 그리고 북벌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에 자리 잡기 시작한 [[효종(조선)|효종]](17대) 대에 이르러서는 내부 간섭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 왕조와 지배층인 사족들이 내세운 이념은 오랑캐에게 당한 굴욕과 원망을 언젠간 갚아주겠다는 [[북벌]]론. 그러나 이건 실현 불가능한 정치적 구호였고, 실상 북벌론이 지배적이던 효종 및 현종대의 군사력 증강을 보면 각종 성읍 수축 등 방어력 증대가 중점적이었다.[* [[강화도]] 포대가 완비된 것도 이때.] 시간이 지나면서 북벌론은 흐지부지되었으며, 오히려 후기에 들어선 청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 운동이 전개되기도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다시 평화기에 접어들었으나, [[소빙기]]로 인한 현종 대의 [[경신대기근]]과 숙종 중반기의 대규모 가뭄과 전염병 창궐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아 양란의 후유증 극복은 숙종 후반기에 접어들어서야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방납에 대한 폐단을 억제하기 위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