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시대 (문단 편집) === 기존의 훈구 / 사림 이분법 통설에 대한 반박 === [[식민사관]]이 판치던 [[1960년대]]가 저물고, 이에 대항하는 학계에 새 바람이 불어오니, 그 일환이 조선 역사를 새로 연구한 것이다. [[1970년대]] 사학자들은 조선 지도층을 사림과 훈구로 나눴는데, 이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하버드 대학교]] 한국사학 연구소 초대소장인 에드워드 와그너를 시초로 조선 정치사의 대표적 연구가인 정두희, 김범 등이 사림과 훈구의 이분법을 부정했고, 이는 현재 학계에서 수용 과정에 놓여있다. 허나 이분법 통설을 부정하는 것이 사림 훈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훈구'는 사실 원훈구 대신을 축약한 것으로, 원로 공신세력을 지칭한다. 대표적으로 [[한명회]]나 [[중종반정]] [[성희안|삼대장]] 등이 들어간다. 헌데 사림과 훈구가 대립하여 사화가 일어나고 결국 훈구세력이 축출되었다는 소리가 아니다. '공신세력' 만이 훈구의 정의에 맞는데, 이들은 이미 [[성종(조선)|성종]] 때에 축출되거나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그렇다면 현재 정의하는 훈구파는 누구인가? 이때 적용되는 파벌의 잣대는 바로 씨족과 이해관계다. 공신세력과 그 가족들, 그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이들이 훈구파로 규정된다. 하지만 이 정의도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는 모순이 생긴다. 대표적으로 허종 형제의 사례를 들 수 있는데, 형제가 하나는 삼사의 대간이었고, 다른 하나는 삼공(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이었다. 그런데 그 대간이 삼공을 탄핵했으니, 이는 혈연관계로 규정되는 훈구파의 정의와 부합되지 못한다. 이들이 서로 대립하고 정치적 대결이 심화된 것은, 이들이 서로 사림과 훈구여서가 아니라, 성종조의 정치가 대간과 대신의 대립구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시엔 사림의 세력은 미약했으며, [[김종직]]을 필두로 사림이 유입되었다고는 하나, 실절적으로 사림으로 규정된 이들이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기묘사림의 이야기다. 따라서 와그너와 정두희를 비롯한 학자들은 사화를 사림과 훈구의 대립이 아닌, '''삼사의 대간과 대신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화의 피화인에 삼사 대간의 사림 뿐만 아니라 훈구파로 분류되는 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있는 것을 설명해준다. 한편 본래 조상은 훈구파로서 성종 ~ 중종조 때 대신이었던 가문이 후손은 정작 사림파로서 선조 때 임용된 대신인 경우도 허다하다. 일부는 이들을 전향사림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 이러한 기존의 통설에 대한 무수한 반례들은 기존의 사림과 훈구 대립구도를 부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사화는 삼사와 대신의 대립'''이며, 훈구파와 사림파의 교체는 왕도 정치, [[성리학]] 근본주의를 주창한 신유학의 폭넓은 수용[* 물론 훈구파도 수용한 측에 포함된다. 이로써 전향사림이 이해된다.]으로 이해된다.[* 구체적인 반박은 해당 학자들의 저서에 실려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