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시대 (문단 편집) == [[훈구파|훈구파 집권기]]: 15세기 후반 == 문종 이후에는 [[세조(조선)|세조]](7대), [[성종(조선)|성종]](9대)을 거치면서 문물 정비와 제도 확립[* 그 성과로는 대표적으로 [[경국대전]]이 있다.]에 박차가 가해졌고,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완성된 유교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고려보다 한층 강화되고 세련된 '''중앙집권화 관료제 국가'''의 모습을 갖춰 갔다.[* 15세기 당시 전 세계에서 조선보다 발전된 중앙집권화 관료제 국가는 [[명나라]]밖에 없었다. 같은 [[동아시아]]의 일본은 [[센고쿠 시대|전국시대]]이었고 유럽은 [[봉건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중세]]였다. 하지만 조선은 전국의 거의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했다.] 이런 과정에서 기득세력인 '''훈구'''가 형성된다. [[훈구]]란 정변과 반란 진압 등에서 공을 세워 공신전을 소유하게 된 대지주 공신들과 그 자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계유정난]]이란 비정상적 집권 과정을 거친 [[세조(조선)|세조]]의 치세부터 형성되었다. 이들[* 대표적으로 [[한명회]]가 있다.]의 세력화는 토지겸병 문제와 함께 국가 체제에 상당한 문제들을 초래하게 되었고, 지방농토와 중앙관직 진출을 놓고 지방에서 중소 지주로 실력을 행사하던 [[사림]]들과 대립각을 형성하게 된다. 훈구(관학파)가 중앙조정의 기득세력으로서 보수적이면서 현실 추구적인 성향을 보였다면, 사림은 훈구와 대립하며 유교 정치의 이상적 구현을 추구했고, 조선 건국에 불참한 세력과 지방에 뿌리를 두었기에 중앙 조정의 지배력과 왕권의 제약을 주장했다. 이들은 사림이 어느 정도 세를 갖추게 된 [[성종(조선)|성종]] 시기부터 대신-대간의 구도로 대립하기 시작한다.[* 다만 이때의 사림 세력은 훈구파와 비하면 중앙 조정에서 그 기반이 약했기에, 훈구의 자손들을 사림으로 끌어들이거나 사림에 호의적인 훈구의 지원을 받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