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시대 (문단 편집) == [[여말선초|관학파 집권기]]: 15세기 전반 ==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홍건적]] 등 외적의 침입이 계속해서 이어지던 원명교체기의 혼란기에, [[황산대첩]] 등의 무훈을 바탕으로 신흥 무인으로 크게 성장한 [[이성계]]는 고려 말 [[권문세족]]에 대항해 성장한 [[정도전]] 등의 지방 중소 지주 출신의 [[신진사대부]][* 신진 사대부들은 고려 말에 들어온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으며, 그중 [[정도전]] 등의 급진파들이 신흥 무인이었던 [[이성계]]와 손잡아 같이조선을 세우는 데에 일조한다. 그러므로 [[조선]]은 유교를 국가체제로 삼게 되었다는 얘기다.]와 힘을 합쳐 [[위화도 회군]]을 거쳐 고려를 무너뜨리고 [[유교]]([[성리학]])에 기반한 새로운 국가 조선을 건국한다.[* 현대에 와서 이 성리학이라는 유교의 분파가 한반도 여성인권 탄압의 시작이라고 조선과 더불어 까이는 일이 많다. 실제로 조선 초기를 기점으로 여성인권 위축이 시작된 것은 사실이나 (고려 때까지만 해도 남편이나 아버지 등 호주가 사망하면 자식들과 같이 재산을 물려받았고 친자식이 아니어도 [[음서]]를 통해 관직을 물려줄 수 있었다), 마냥 성리학 탓만 할 수는 없고 그 외의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며, 왕에 대해 입만 잘못 놀려도 두들겨 맞거나 죽기까지 하는 등 전반적인 인권인식 자체가 낮았다.][* 사실, 고려시대 때도 고려 성종이 유교 정치를 했으나, 유교만 중시한 것은 아니고 삼국시대 때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져온 국교인 불교도 중시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의 왕족과 그 계파인 왕씨들을 탄압하는 [[왕씨 몰살]][* 당시 [[왕씨]]들은 이러한 학살을 피하기 위해 성을 바꾸기도 했다는데(-라고 [[야사(역사)|야사]]에서 전한다.), 일단 왕(王) 자가 들어간 글자인 전(全), 전(田), 옥(玉) 등으로 성씨를 바꾸었다고 한다.]이 자행됐다. 개국 세력 내부 갈등으로 인해 두 번의 [[왕자의 난]][* [[1차 왕자의 난]]은 [[태종(조선)|이방원]]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립하고자 세자([[이방석]])를 죽인 것이고, [[2차 왕자의 난]]은 [[태종(조선)|이방원]]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이성계의 넷째 아들 [[이방간]]이 난을 일으켰으나 당시 [[태조(조선)|상왕]]과 [[정종(조선)|왕]]이 말려 진압된 난이다.]이 있었으나 난을 통해 즉위한 [[태종(조선)|태종]](3대)은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숭유억불]]을 진행하며 새로운 국가로서 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조선)|세종]](4대)은 국가의 기틀이 되는 주요 제도들을 정립했으며, 한편으론 고유의 민족 문화를 최고조로 발달시켰다. 그중 백미는 [[훈민정음]]의 탄생. 또한, 영토 확장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지금의 [[압록강]] 및 [[두만강]] 아래 있던 [[여진족]]들을 강 너머로 쫓아 보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영토를 완성한다.[* 다만 여기서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사민정책이었다. 세종은 4군 6진을 관리하고 개척하기 위해 [[삼남]](충청, 전라, 경상)의 백성들을 북쪽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북쪽의 추운 기후와 여진족의 지속적인 약탈 등으로 인해 안정적으로 살기 힘든 곳이어서 당시 그곳에 사는 백성의 대부분이 죽어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