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시대 (문단 편집) == [[세도정치|세도정치기]]: 19세기 전반 == 정조가 사망하고 즉위한 [[순조]]가 어렸기에 왕실의 큰어르신인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의 할머니)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고, [[벽파|노론 벽파]]는 정순왕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시파에게 숙청을 가한다([[신유박해]]). 그러나 정순왕후가 죽고 순조의 친정과 함께 [[시파|노론 시파]]가 벽파에 반격을 가하며 그나마 남아있던 붕당마저도 사실상 소멸한다. 이런 대립 속에서 순조는 어느 정도 정치를 해보려 했지만 건강이 나빠지며 홍경래의 난 이후로는 크게 낙심하여 정사를 돌보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19세기 전반에는 [[김조순]]의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중앙의 권세가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것이 왕권을 능가하는 [[세도정치]]가 펼쳐진다. 붕당 정치 때보다 국가가 더 [[국가 막장 테크|막장로드]]를 달리게 된 셈. 사실 조선 후기부터 심화된 권력의 수도(한양) 집중 현상은 이런 사태를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특히 정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중앙에 집중시켜놓은 권력과 한껏 높아진 왕의 권위가 이런 현상을 부추겼다. 즉, 왕을 위하여 권력을 집중시켜 놓았으나 왕이 어리거나 정치를 하지 않다보니 아무 소용이 없기에 이를 이용하여 권신들이 왕을 마치 입헌군주제하의 왕실처럼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그저 떠받들기만 할 뿐이었던 것. 그러면서 그 권력은 모조리 특정인물이 가져가게 되었는데 정조의 피나는 노력이 악용되어 버린 것이다. 이때 벌어진 상황은 현재 [[필리핀]]이나 [[라틴아메리카]], [[서아시아]]가 왜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는가를 설명하는데 가장 적합한 족벌 정치 그 자체였다. 왜냐면 안동 김씨 족벌 집단은 고려의 [[무신정권]]과 [[권문세족]]처럼 국가의 장래나 유지 능력 및 시스템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고 오직 가렴주구에만 몰두하면서 조선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렸다. 이는 국가 체제의 말기 증상으로 외세가 쳐들어오지 않아도 이런 국가는 결국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붕당이 존재할 때는 그나마 상대 정파를 향해 비판이라도 가할 수 있었는데 붕당이 이미 소멸한 후라... 독재국가가 망하는 테크를 전근대 버전으로 보여준 셈이다. 결국 경제적으로는 토지 생산성이 하락하면서 더 이상의 인구 부양이 힘들어졌고 농민층의 소득 저하로 국가의 재정이 악화되었다. 특히 국가 재정이 악화되면서 사회 보호망이었던 환곡이 부족한 재정을 채우는 기관으로 변질되었는데[* 사실 [[균역법]] 시행으로 부족한 재정의 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지방의 세수를 가져갔던 탓도 적지 않았다.] 이로 인해 농민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조선은 본격적으로 [[국가 막장·멸망 테크|국가 막장 테크]]에 돌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의식이 성장한 징후가 괄목하리만큼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 당시 민중들은 착취 체계로 변질되어버린 조세 부역 체계와 탐욕스러운 수령들, 그리고 이와 결탁한 아전과 토호들에게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들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당시 만연하던 서북 지역(평안도)에 대한 차별로 인해 일어난 난이다.]이나 [[1862년]]의 임술봉기, [[진주민란]] 등이 대표적. 민중들의 계속된 반란으로 인해 조선은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서양의 이양선들이 해안에 출몰하는 등 서구 열강이 조선에 점차 접근하기 시작하여 안보가 불안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