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시대 (문단 편집) == [[탕평책|탕평정치기]]: 18세기 == 환국정치를 통해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숙종(조선)|숙종]](19대), --[[경종(조선)|경종]]--, [[영조]](21대), [[정조(조선)|정조]](22대) 시기로 대변되는 [[18세기]]에는 붕당 간의 갈등을 각 당의 인재를 동등하게 고루 등용한다는 [[탕평책]] 등으로 조절하는 전제에서 제법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탕평책은 숙종 시기 환국정치를 거치며 처음 등장한 단어로 [[경종(조선)|경종]] 시대(20대)를 전후로 한 극한의 붕당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영종, 정조 시기 인사 정책으로 활용됐다. 특히 조선은 18세기에 접어들면 왕권의 강화 등과 함께 사회적으로는 어느 정도 안정기를 구가한다. 화폐 경제가 마침내 상용화되어 이를 통해 상업이 발달했으며, 또한 청나라의 고증학이 전파되어 일각에서는 북학과 [[실학]]이 발달해갔다. 이런 모습 때문에 이 시기가 근대로 나아가는 시대였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의 주장이 있다. 반면 신분제인 중기의 반상제 체제가 점차 양인들이 국가에서 발행한 [[공명첩]]을 사들이거나 양반 족보를 사들이는 편법으로 양반층으로의 상승을 꾀하게 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18세기 부농의 증가와 더불어 양반 수는 폭발적으로 급증했으며, 부분적으로 면세 혜택이 있는 양반 수의 급증은 재정 감소와 조세 불균형을 초래해 당시의 조세 시스템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는 나중에 [[19세기]] [[삼정의 문란]]이 야기되는 근본적 원인이 된다.] 한편, 사림으로 대변되던 사족들이 중앙 사족과 지방 사족으로 이분화되어 조정의 관직이 한양과 그 주변에만 집중되어 가는 관직의 수도권 집중현상이 심화되어 간다. 이런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붕당정치도 사실상 해체 단계에 들어간다. [[영조]] 집권 후반기에는 [[소론]]이 사실상 실각하면서 [[노론]] 일당만이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이후에도 [[소론]], [[남인]] 인사들이 탕평의 이름으로 기용되긴 했으나 노론에 맞설 만큼의 실권이 없었다. 탕평이 실질적으로 발휘된 건 영조 전반기(완론탕평)일 뿐, 영조 후반기와 정조 시기의 탕평은 집권 일당인 노론을 견제하기 위한 왕의 견제책에 가까웠던 것. 영조는 후반기에 탕평이라는 미명하에 노론 내 척신들[* 풍산 홍씨, 경주 김씨]을 통해 노론 사림을 견제했고, 정조는 이미 실권을 상실한 남인과 소론을 적극적으로 기용해 노론 일당 이전의 붕당 정치로의 복원을 꾀했다.(준론탕평)[* 당시 정조가 적극 기용한 남인들 중에 정약용으로 대변되는 실학자들이 몇몇 포진해 있었기에, 이것이 정조가 실학자들을 후원해 국가 개혁을 꿈꾸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정조(조선)|정조]] 문서 참조.] 그러나 정조 시기 노론은 강경파인 [[벽파]]를 중심으로 당의 의리를 앞세우며 남인, 소론의 등용에 반발하며 이를 계속 반대했다. 참고로 벽파와 달리 왕(정조)의 뜻을 쫓은 노론 온건파와 남인, 소론을 시파라 일컬었다. 이러한 반대에 부딪친 정조는 결국 말년에 붕당의 복구를 포기하고 노론 시파이자 명문 가문인 신([[新]]) 안동 김씨의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척신)으로 지목하여 세자의 근위세력으로 삼는, 척신 정치로 다시 돌아서는 모습[* 정조는 즉위 초반 왕권 강화를 위해 당시 노론 척신이었던 홍인한과 김귀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을 죽이고, 줄곧 척신을 경계해왔었다.]을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