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조선시대 (문단 편집) == 개요 == [[조선]]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이다. 건국 초기, 명 중심의 패권 질서 확립과 일본의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시기적으로 상당 부분 겹친다.]의 종식[* 허태용(2014), "동아시아 중화질서의 변동과 조선왕조의 정치・사상적 대응", 《歷史學報》 221, p.35.] 등에 힙입어 [[태조(조선)|태조]]부터 [[태종(조선)|태종]], [[세종(조선)|세종]], [[세조(조선)|세조]] 치세에는 강력한 왕권과 더불어 [[고려]]말기의 여러 폐단 및 혼란상을 개혁했다.[* 김경록(2018), "조선초기 국제정세와 국방정책", 《군사연구》 146.] 특히 이 시기에는 한국어 고유문자인 [[훈민정음|언문(한글) 창제]]와 함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 [[천상열차분야지도]] 제작, 세계 최초의 납 활자인 [[병진자]] 제작, 최초의 역법인 [[칠정산]] 제작, ‘[[4군 6진]]’ 등으로 표상되는 영역 개발-확장, 인구의 꾸준한 증가[* [[통계청]]에서 발간한 인구 대사전 <표 3-4> 연도별 조선 시대 인구 추정치 참조.] 등 여러 긍정적인 발전들이 계속 이루어졌다. 이후 [[성종(조선)|성종]] 시기에도 정치체제의 안정화를 바탕으로 많은 업적을 달성하였다.[* 조선 성종조 거버넌스체제 변화과정 분석 (심재권, 한국행정사학지, 2019, vol.46, no.46, 통권 46호 pp. 51-75 (25 pages)) ; 조선 성종의 文廟 儀禮 준행과 국왕으로서의 권위 창출 (송웅섭, 역사와 담론, 2018, vol., no.85, pp. 123-156 (34 pages))] 하지만 성종 사후 [[연산군]]의 폭정으로 [[중종반정]]이 발발하는 등 일부 혼란과 폐단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변동없이 평화적으로 국가가 계속 운영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기나긴 평화 가운데 [[센고쿠 시대|일본]]에서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가 도래했고, [[만주|북방]]에서는 [[여진족|여진 세력]]들이 성장했다.[* 한성주(2018), "조선과 여진의 貂皮 교역 성행과 그 영향", 《만주연구》 25, “특히 조선에 있어 여진과의 사적 무역의 확대를 주도한 것은 바로 초피 였다. 조선의 백성들은 국가의 공납을 위해, 상인과 변장들은 사적 이익의 확대를 위해, 수령들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여진과의 초피 교역을 이용했다. 여진인들은 조선에 초피를 팔고, 대신에 우마와 철물 등을 받아왔는데, 이는 여진인들의 농업 발달과 생산력을 향상시켰고, 자신들의 군사 무기들을 발전시켰다.”] 결국 왕조 중반에 [[임진왜란]](남왜) 및 [[정묘호란|정묘]]·[[병자호란]](북로)이 발발하면서 국가가 전복될 큰 위기를 맞고 그 과정에서 [[인조반정]] 및 명청조의 간섭을 겪었다. 그렇게 양란 이후 [[효종(조선)|효종]], [[현종(조선)|현종]] 시절에는 다시금 피해가 복구되는 듯 하였지만 17세기 후반에 들어서 조선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경신대기근]]이 발생하는 등, 국가적으로 또 다시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었다.[* 김문기(2011),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재해와 기근", 《이화사학연구》 43.] 하지만 이후 [[숙종(조선)|숙종]]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시행하여 민생의 안정을 추구했고 본격적으로 주전, 즉 화폐 제조를 실시하였으며[* 흔히 우리가 잘아는 [[상평통보]]는 숙종 즉위 초년부터 주조되기 시작해 전국의 중앙, 지방 관청에서 유통되었다. 숙종이 상평통보를 발행한 목적은 조선 조정에 있어서 재정의 확충이라는 목적이 컸다. 실제로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은 숙종 시대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국가 재정 역시 훨씬 더 탄탄해졌다.] [[영조]], [[정조(조선)|정조]] 시기에는 정치 및 사회적 문제들이 상당부분 개선되는 중흥기를 맞이했다. 반면 정조 사후에는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수십년간 내부혼란을 겪었다.[* 이경구(2016), "총론: 새롭게 보는 정조와 19세기", 《역사비평》 115, p0.116~117; 오수창(2019), "조선시대 통치질서의 재검토 ", 《東亞文化》 57, pp.14~18.] 이후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조선은 '서세동점'으로 인해 서구 열강들로부터 이권을 침탈당했고,[* [[http://contents.history.go.kr/data/pdf/nh/nh_041_0030.pdf?|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아울러 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가 조선의 정치적 분쟁에 적극적으로 끼어들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휘말렸다.[* 김원수(2015), "청일전쟁 및 삼국간섭과 러시아의 조선정책", 《韓國政治外交史論叢》 36(2).] 20세기 초 [[대한제국]]은 [[삼국간섭]]의 공백기를 활용해[* 유바다(2016),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p.371~374.] [[광무개혁]]을 추진하였지만 결국 [[일본 제국]]으로부터 [[한일병합조약|병합당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