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문단 편집) == 한계 == 크게 외부적인 한계와 건준 자체의 내부 분열이 꼽힌다. 우선 외부적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의 행정권 이양이 제대로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총독부의 신변 보장 문제로 행정·치안권 이양을 받아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8월 말경 미군이 38선 이남은 자신들이 상륙할 때까지 조선총독부가 행정권을 유지하라는 포고령을 내리게 되면서 [[일본 제국]] 본국에서 행정권을 연합국 주둔 후 [[미군]]에게 이양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이에 따라 총독부는 [[조선군]]을 동원해 행정 기관들을 봉쇄하여 이로 인해 행정의 공백 혹은 중첩이 생기기도 했으며, 지방의 경우 그래도 건준이 행정권과 치안권을 대부분 쥐고 있었지만 청사 소재지인 [[경성부]] 같은 경우는 조선군 사령부의 방해로 2중 정부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38선 이남[* 38선 이북은 일찍이 소련이 대부분의 행정권과 치안권을 접수하였고 총독부의 행정권은 일찍이 붕괴되었다. 일례로 경성 [[조선신궁]]이 스스로 승신식을 가지고 본전 건물을 철거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과 달리, 평양신사는 승신식조차 가지지 못하고 '''광복 당일''' 밤중에 방화로 파괴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광복 직후 이북과 이남에서 총독부 영향력 상실 속도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에서는 건준과 총독부의 사실상 2중정부 체제가 이어져 오다 결국 공식적인 행정권 이양은 미군의 공식 주둔 후 총독부로부터 [[미군정]]으로 이양되었다. >'''인공 수립 당시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여 각도 관공서와 일본인 공사 재산을 압수하고 일군을 무장해제시켜, 모든 것을 조선인민에게 맡길 뿐 그 목적이 없는 듯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소군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군의 공동한 최고방침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며 미군도 38도 이남에 진주하여 오면 역시 조선인민에게 모든 것을 맡으라 할 줄 예상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맡을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급히 인민대표회의를 열어 국호를 결정하고 정부조직법을 결정하며 인민위원을 선거하였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9 미군 주둔이 가까워지자 건준은 조선을 대표하는 단체로 인정받기 위해 국가 설립을 서둘렀다. 때문에 9월 3일 내각 개편이 이루어지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9월 7일 [[인천항]]에 진주한 미군은 포고령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았으며, 이에 얼마 가지 않아 실권이 없는 조선인민공화국은 와해됐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차 승인받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임시정부나 조선인민공화국과 같은 여타의 독립운동 단체 및 자칭 정부들은 당시 국민들의 보통선거와 같은 공식적 정부 수립 절차를 갖추지 않아 이들이 국민들을 대표한다는 민주적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독립 운동 단체들을 공식 정부로서 승인하게 된다면 해방 후 조선 국민들이 직접 참정권을 행사하여 정부의 형태와 인적 구성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침해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인공은 처음부터 선거를 계획하고 있었다. 전국적 총선거를 통해 대표성을 확보하려 하자 미군정은 선거를 방해했다. >인공은 10월 3일 총선거를 통한 제2회 전국인민대표회의를 46년 1월 소집한다는 취지문을 발표하였다. 곧 전국적인 총선거를 통해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함으로써 인공의 대중적 지지와 대표성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이었다. 물론 1945년 9월 6일의 제1회 인민대표자회의에서도 인공이 전 인민의 광범한 민주주의적 선거로 선출되지 못하였으므로 '임시혁명정부'이며 "혁명시기에 대응하는 과도적 존재"라는 입장에서 "늦어도 2년 이내로 될 수 있는 빠른 기간 내에 제2차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결의"하였다. >(중략) >인공주도세력에게 1946년 3월 1일 제2차 전국인민위원회 대표회의의 선거는 인민의 총의를 물어 완전한 정부의 실현, 또는 신국가를 건설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인공은 선거에 실패한다면 승리한 정당에게 정권을 내어주고,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는다면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매진하겠다는 비장한 입장을 밝혔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86~87 >미군정은 인공이 수립되어 활동하자 1945년 10월 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의 공식 성명을 통해 38선 이남에는 오직 미군정이라는 한 정부만 있을 뿐이며, 조선인민공화국은 권위와 세력과 실체가 전연없는 것이며, 인공지도자들을 "괴뢰극의 막후에서 연극을 조정하는 사기한"이라고 비난하고 해체를 명령하였다. >(중략)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는 일반대중에게 신임과 지지를 획득하는 방법으로 신임총투표, 일반국민선거를 제안, 확정하고 새로운 주권의 확립을 기도하였다 > >미군정은 아놀드장관의 성명을 통해 인공의 이러한 시도를 허위선거라고 규정하고, 선거는 "대중을 유도하는 자칭 정치가의 유희물"이 되기에는 너무도 신성한 것(중략)"이라고 비난하고, 선거의 중지를 요구하였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70~71 일제의 항복 직후 정세를 관망하던 우익세력들은 점차 결집하기 시작하였으며, 반면에 일사불란해 보이던 건국준비위원회는 내부적 균열을 겪게 되었다.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 등을 포함한 중도 우파 세력은 “건국준비위원회가 초계급적 협조정신으로 명실상부한 과도기적 기구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좌경화되어 간다”며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게다가 [[김성수(1891)|김성수]],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 등은 '임시정부 봉대(奉戴, 받들어 추대함)'를 주장하며 건국준비위원회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초기와는 달리 좌익세력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하게 되었으며, 건국준비위원회는 결국 [[조선공산당]]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 >건준의 결성 초기부터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게 된 것은 여운형•건국동맹과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적 친화성, 그리고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자들의 친분관계도 바탕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소련의 서울 진주 소식이 크게 작용했다'''. 여운홍에 따르면 '''여운형은''' 8월 15일 아침에 엔도를 만난 뒤 정백과 함께 돌아와 단독으로 담소를 나누었으여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기 때문에 사태가 달라졌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중략) 이에 '''여운형과 건준 참여세력들은 사회주의 계열을 적극 참여시켜 소련군의 남한 진주에 대응하는 국가건설을 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1 건준 위원장을 지냈던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건국준비위원회가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된 과정에 대해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으며, 형님(여운형)에게는 박헌영 등 극렬 공산주의자와 손을 끊지 못하고 건준이 좌경화되어 이용당한 것이 정치생활 중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견들에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 조선을 건설함에 있어 구태여 빛깔을 문제삼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 모두가 합력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 '''조선인민공화국이라면 적색으로 아는 사람은 소학교 1학년과 같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 >여운형[[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2_0030_0010_0010_0030|#]] >그러나 '''인공의 수립이 조공의 일방적인 독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운형도 인공 수립에 적극 관여하였다'''. 여운형은 9월 6일의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개회사와 격려사에서 비상한 시기에 연합국의 진주에 대비하여 "연합국과 절충할 인민총의 집결체"로서 인공이 수립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여운형은 또한 "혁명가는 정부를 조직하고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인민이 승인만 한다면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정부는 그대로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여운형은 북한에서의 "소군정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국의 공동방침으로 해석"하여 남한에서 "미군 역시 조선인민에게 맡길 줄로 예상"하는 낙관적 정세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여운형은 일제시기부터 혁명단체와 혁명가들이 중심이 되어 과도정권을 수립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권구상은 인공과 다르지 않았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5 >'''여운형은 인공 수립에 합의한 뒤''' 건준 내부의 반발에 부딪치자 조각발표를 보류하려고 하였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인공 대표대회에서 인사도 했고 인공 부주석의 지위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7 >여운형: 조선은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조선은 아직 해방되지 않아 여기에 비합법적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넨꼬: 어떻게 해방이 안 됐습니까? >여운형: 해방이라고 되기는 했지만 미국인들로부터 다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로마넨꼬: 왜 그렇습니까? >여운형: 최근 남조선의 반동세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이 그들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여운형: 1945년 8월 15일 오전 7시에 전 정무총감인 엔도가 조선인민의 대표들을 불러 “4~5일 후면 서울에 붉은 군대 선발대가 도착할 것이며,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에 우리가 무장해제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8월 15일 오후 서울에는 붉은 군대가 서울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시민들은 붉은 군대를 조용히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아 매우 실망했으며, 38선이 획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더욱 불만스러워 했습니다. >로마넨꼬: 당신은 우리의 활동이 군사적인 것이며, 우리는 명령받은 바로 그 지역까지만 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여운형: 나는 38선 이남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감옥에 있는 정치범들을 석방시키는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정치범들이 주축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당신은 북조선에서 인민위원회가 발전해 가는 것과 같이 미군이 진주한 남조선에서도 그러리라고 믿습니까? 그러나 실제 사실은 다른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fs&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fs_010r_0010_0050_0020&position=-1|로마넨코 소장과 여운형의 미소공위 재개문제 논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