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문단 편집) == 의의 == 건준은 남북과 좌우를 망라하여 '''한국 현대사 최초로 [[지방자치]]를 시행한 조직'''이였으며, 후에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정부화되면서 지부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8.15 광복]] 이후 공백된 행정과 치안을 안정시키고, 연합군 주둔 전까지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여운형]] 등 당대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운영하여 민족에게 광복을 체감케 하였다. 이러한 건준의 설립·발족과 엔도 정무총감과의 권력 이양 교섭, 그에 따른 [[독립운동가]]들의 정치활동 등은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광복절]]과 국권 회복일을 건준 설립일인 [[1945년]] [[8월 15일]]로 설정하는 데에서 알아볼 수 있듯 현재에도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는 독립 당대에도 [[1945년]] [[8월 15일]]을 독립일로 받아들인 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것으로, 당장 [[미군정]] 시기의 광복절 1주년 경축식 행사도 [[1946년]] [[8월 15일]]에 열렸다. 무엇보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가장 와닿을 만한 중요한 의의는, 현재 [[미수복지역]]인 '''[[이북 5도]]의 행정구역은 [[북한]] 당국이 개편한 행정구역이 아닌,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목적으로 일부 수정한 행정구역에 기초하여''' 설정되어 있으며, 관할기관인 [[이북5도위원회]] 역시 이 건준이 해방 당시 설정한 행정구역에 따라 명예 도지사·시장·군수·읍장·면장·동장·이장을 임명한다.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건준의 의의를 아래와 같이 높게 평가하였다. > 해방 후 건준 같은 조직이 돼 있지 않았으면 굉장한 혼란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충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해외에 주요 독립운동 단체들이 해외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방이 되기 전부터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파 계열들이 중심으로 건국동맹이 조직되었고, 그래서 해방이 되는 날부터 건준이 조직되어 활동하였기 때문에 안정이 어느 정도 되었다. 우선, 치안과 행정같은 주요 업무를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 ---- >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출처: KBS 인물 현대사 여운형 편]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에드거 스노우]] 기자는 해방 후 조선에 와서 2개월간 머무르면서 정세를 알아보고 귀국한 뒤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 미국은 아무 준비가 없이 조선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조선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다. 곧 정치적 준비가 있었다. 미국인이 만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살렸더라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하였을 것이다. > ---- > <에드거 스노 자서전>, [[에드거 스노우]] 저. -제 4부 냉전- 문단 인용[* 다만 에드거 스노우의 자서전에는 당시의 조직인 '건준'이 아닌 후행하는 조직인 '인민위원회'라고 명기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