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평가 (문단 편집) === 조선 중기 이후 여성인권 하락 === 중기 이후 가정 내 여성의 권리가 큰 폭으로 하락하고 인권이 남편과 시가에 종속되는 경향이 심해졌다. 다만 [[한글]]의 보급으로 여성의 문화 참여는 오히려 늘어났다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로 [[최씨음식법]],[[음식디미방]]등 여성이 한글로 직접 남긴 기록들도 꽤 있다. 그러나 문화 참여라는 게 여성들의 여가문화나 바깥 활동이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고, 남편을 향한 정절과 순종, 가정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한계가 있다. 즉 부분적인 계몽은 있을지언정 인권신장은 미비했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여성 중 한 명인 신사임당의 대외적 이미지가 "현모양처"란 걸 생각해보자. 물론 신사임당은 글과 그림 솜씨가 뛰어나고 굉장히 머리가 좋았으며 정치적 감각이나 현실감각도 뛰어났다. 또한 당대에도 뛰어난 화가로 이름 높았다. 사실 신사임당이 현모양처로 불리는 건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신사임당이 남편 [[이원수(조선)]]의 집으로 출가하지 않고 오히려 이원수가 초반에는 데릴사위로 살았다. 신사임당이 남편의 과거 급제를 돕고 여러 조언을 해주긴 했으나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그녀는 오히려 다른 방면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안타깝게도 그녀의 대외적 이미지는 조선 후기를 거쳐 현모양처가 가장 짙게 남았으며, 조선 후에 비해 비교적 여권이 높았던 당대에도 그녀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화가와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곤 하나, 만약 신사임당이 그 재능으로 남자로 태어났으면 당대를 휘어잡는 학자나 정치가가 되었을 것이다. 멀리 갈것도 없이 아들 이이가 고위 관료이자 학자로서 미친 영향력을 생각해보자. 물론 신사임당이 여권이 추락하는 과정에서 그 재능이나 명성이 평가절하 당하고 현모양처의 이미지만 지나치게 강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낮은 여권으로 그 재능에 제약받은 것도 사실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권은 더욱 추락해 아예 여성들이 교육을 받는 주요 목적 중 하나가 현모양처가 되기 위함, 즉 남편을 잘 섬기고 아이를 잘 기르는 목적이 된다. 실제로 이 흔적은 근대가 아닌 현대 대한민국까지 남아있었는데, 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에 7, 80년대까지 여성들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최고 명문대에 보내는 걸 꺼리는 트렌드가 남아있었으며 (그나마 보낼 거면 [[서울대학교]] 또는 [[이화여자대학교]]로 보냈다. 현재 여성 고위층의 많은 수가 이 두 학교 중 하나 출신인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해보자) "신부수업"이라는 말은 90년대까지도 널리 남아있었고, 사실 이런 성차별적인 생각의 잔재는 기성시대를 중심으로 현재까지도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