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공 (문단 편집) == 특징 == 조공은 원래 [[천자]]와 [[제후]]로 이루어진 [[봉건제]]의 [[주나라]]에서 채택된 제도였지만, 천자와 제후의 개념이 [[중국]]을 넘어서 동북아시아의 국제 질서로 확장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외교 관례로 굳어졌다. 중국에서는 [[봉건제도|국내에서도 행해졌지만]], 점차 [[황제]]권(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군현제|실질적인 의미의 제후가 사라지게 되자]] 자연스럽게 조는 망궐례[* 새해 첫날 제후국왕이 천자가 새로운 해의 달력을 내려준 것에 감사하는 의미로 치르던 의식.] 등으로 간소화되고, 공은 [[세금]]화되었다. 또한 조공책봉 관계에 대한 논의는 근대 국제법 질서나 그것에 기반한 현실주의 이론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되면서, 현실주의와 다른 측면들만 과도하게 부각, 동시에 구성주의가 변형된 형태로 수용되어 이를테면 주변국가들의 위계적, 불평등한 관계의 자발적 참여, 내면적 수용, 사상적 가치의 공유 등이 강조되고, 외형적 관계에 치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김영진(2016), "전통 동아시아 국제질서 개념으로서 조공체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정치외교사학회》 38, p. 252~253.] 실제로 순쉬에펑은 조공체제를 강력한 중심국가가 존재하며 공공재를 공급하는 체제로 정의하고 동아시아의 경우 역내국가가 중심국가가 제정한 규칙을 자발적으로 준수해 왔다는 점에서 패권체제와 구별된다고 주장하며 명청시대의 화이질서, 그 중에서도 명청과 조선의 관계가 가장 전형적이라고 주장하였다.[* 홍면기(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페어뱅크 조공체제론의 비판적 검토: 중국중심주의라는 엇나간 시선의 문제, 2018, vol.33, no.2, 통권 47호 pp. 5-33 (29 pages)] 이처럼 그동안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정치가 압도적인 힘과 선진적 문명을 보유하고있는 중국이라는 중심과 상대적으로 힘과 문화적 영향력에서 이에 미치지 못하는 주변부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수용되어 왔다. 동아시아의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이 주변국에 지배적인 행위자처럼 군림해 왔고, 주변국은 중국이 만든 국제질서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왔다는 주장이다.[* Womack 은 동아시아국제정치를 비대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Womack, Brantly, “Asymmetryand China's Tributary System.” The Chinese Journal of International Politics, Vol 5, 2012, pp. 37~54.Ledyard 는 이와 다른 관점에서 중국의 성쇠에 따라 주변국과의 관계가 변화하여 왔음을 설명한 바 있다.Ledyard, Carl, “Yin and Yang in the China-Manchuria-Korea Triangle.” In Morris Rossbi ed.,China among Equal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3, pp. 313~353.]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따져볼 점이 적지 않다. 중국적 천하관에서 말하는 자소사대의 질서가 이상적으로 구현되는 경우 이는 공동체 질서의 이상에 접근하게 되지만, 반대로 힘의 논리가 강하게 개입되면 패권적 질서로 일탈할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국이 항상 우월적 지위를 향유한 것도 아니며, 그 국제 관계가 중심과 주변이라는 단순한 이항적 관계로 전개되어 왔던 것도 아니다. 동아시아 역사는 중심과 주변, 주변과 주변 사이의 다양한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중심과 주변 사이에 힘의 관계가 역전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공책봉 제도는 주(周)왕이 분봉(分封)을 통해 지배 체제를 구축했던 제도로서, 한(漢)대에 들어와 국내 관계뿐 아니라 주변국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제도로 확장되었다. 황제 국가를 지향한 한나라는 주변국과의 관계를 군신상하 관계로 분식하였다. 명실상부하지는 않지만 이 제도를 바탕으로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이 제도가 가장 정교하게 정비된 것은 한족 왕조인 명(明)대에 와서였다.] 실제로 북방세력이 강성할 때에는 역으로 중국이 이들에게 조공을 하며 평화를 샀던 사례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한나라|한]]이 [[흉노]]에게, [[당나라|당]]이 [[돌궐]]에게, [[송나라|송]]이 [[요나라|요]]와 [[금나라|금]]에게 조공을 바친 것이 그 사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의제한 역사문화적 개념을 고안하고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강제하면서 자신의 정통성과 헤게모니를 주장해 왔고, 조공은 그에 대한 가장 유력한 제도적 기반이었다.[* 홍면기(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페어뱅크 조공체제론의 비판적 검토: 중국중심주의라는 엇나간 시선의 문제, 2018, vol.33, no.2, 통권 47호 pp. 5-33 (29 pages)] 조공 무역의 이익과 손해도 그 내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익을 볼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또한 그 내용을 당시의 관점에서 보느냐 아니면 지금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이익과 손해가 달라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당시 국력 신장에 도움은 되지 않는 사치품을 잔뜩 받고 중요한 전략 자원인 말 같은 것들을 주면 지금 관점에서는 손해로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 관점에서는 그것이 이익이고 다른 무역에서 중요하게 쓰일 수도 있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조공품을 선진 문물을 배우는 데 들이는 학비로 취급하기도 했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에 있어서 조공은 [[사대]]에 따른 일종의 외교 의례이자 각국 정부간의 공무역이었고, 조공을 한다는 것은 국가 대 국가로서의 위치와 외교 관계를 확정한다는 의미였다. [[고려]]는 [[송나라]] 시기에 상대국인 송나라의 엄혹한 외교적 현실을 적절히 이용하여 체면과 실리를 동시에 챙기기도 했다. 송나라는 잠재 적국인 거란을 부족한 군사력으로 견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몇 안 되는 우호국인 [[고려]]와의 관계를 최대한 우호적으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동란섭필》,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등을 직접 참고할 수 있다. 고려 사신이 마치 깡패처럼 행동했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이야기지만, [[소동파]]가 [[고려]]를 맥적(貃敵)이라 부르며 비난할 정도로 고려와의 조공무역이 [[송나라]]의 재정에 부담을 주던 것은 사실이다. 송나라의 재정은 전연의 맹으로 인해 요나라에 세폐를 바쳐야 했고 서하에도 비슷한 세폐를 바쳐야 했는데, 고려와 조공무역까지 해야했으니 그 부담이 상당했다. 그리고 다소 과장되었다고는 하나, 고려 사신들이 송나라에 가서 결코 '예의 바르게' 행동한 것도 아니었다. 참고로 [[고려]] 사신들의 예의 바르지 않은 행동은 [[거란]]에서도 계속되었다. [[여요전쟁]] 이후 몇 번의 무력 충돌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고려와 요나라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흘러갔지만, 그래도 한동안 고려가 승전국이라는 이유로 고려 사신이 요나라에 가서 거란인의 변발을 잡고 폭행을 하며 모욕을 주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조선으로 치면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승리하고 이후 청나라로 간 조선 사신들이 만주족에게 깡패 짓을 한 셈이다.[* 그런데 소동파는 더 나은 나라들도 있는데 송나라가 고려에 너무 지나친 대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 불만을 가져서 좀 감정적으로 극딜한 면이 있고 고려 역시 친송정책과 함께 거란 때문이니 하는 변명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딱히 무례하게 마구 행동하고 다녔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가 송나라와 꽤 오래 교류가 없어 조공을 바치지 않고 있다 다시 조공하러 왔을 때도 송나라에서 그 진의을 물으니 "우리나라가 거란과 더불어 이웃이 되었더니 그들의 주구에 견디지 못한 국왕 [[문종(고려)|왕휘]]는 늘 화엄경을 외어 중국이 재생하기를 빌었는데, 하룻저녁 꿈에 별안간 이 경사에 몸이 이르러서 성읍과 궁실의 번영함을 샅샅이 구경하고 꿈을 깨자, 이곳을 연모하여 즉시 시를 읊으셨는데, 악한 인연 어이하여 거란에게 이웃되어 한 해에 바친 공물 몇 가지나 괴롭혔네 이 몸에 날개 돋쳐 먼 중국에 왔건마는 애달파라 깊은 대궐 누수 소리 날 새려네"라며 거란의 탓으로 돌렸다. 송나라 입장에서 거란과 양다리 걸치고 있는 현장을 봤을 때에도 사실은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고 말을 하여 송나라 황제가 진의를 조사하기 위해 고려 사신을 부른 적도 있었는데 당시 태도도 무례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송나라는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라고 하여 요나라 사신에 준하여 대접했다. 일설에 따르면 고려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송나라의 메뉴얼은 1,300장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려 전기 이러한 조공책봉 체제의 모습은 이후 [[몽골제국]]이 등장하면서 책봉의 실질성이 강화되는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또 상국 중서성에서 공문을 보내 봉주의 둔전에 필요한 농우·농기구·종자·군량 등에 관한 일을 통보해 왔습니다. 농우에 관련해서는 지난 번 보고드린 바와 같이 기르고는 있으나 아무리 넉넉한 자라도 한두 마리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가난한 자는 대부분 쟁기로 밭을 갈거나 혹 서로 소를 임대해 부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재 시골에서 기르는 소들은 전라도 지역으로 군량을 수송하느라 배를 곯고 피로해 반 넘게 폐사해 버렸습니다." > >'''"농기구·농우·종자·식량이란 것은 모두가 백성들의 생존 기반인데 이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상국의 군대에 공급하면 아국의 잔존한 백성들은 거듭 기아 상태에 빠져 소멸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제가 이 점을 참으로 민망히 여기고 있사오니, 폐하께서 밝게 살펴주시기만 간곡히 바라고 있습니다." >---- > <고려사 세가>, 원종12년(1271), 3월 [[http://db.history.go.kr/id/kr_027r_0010_0030_0120|#]] 이러한 책봉의 실질성이 강화된 것은 고려 국가 외부에 존재하는 군주의 상위권력 혹은 권위인 황제권이 국내의 정치, 의례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명미(2017), "성지(聖旨)를 통해 본 여말선초의 정치·외교환경", 《역사비평》 121, p. 71.] 14세기 말 [[몽골]]족의 [[원나라]]를 대신하여 중국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명나라]]는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조공책봉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 곧 [[중화사상|중화주의]](中華主義)를 완성하기 위해 사대관계를 굳건히 하고자 하였다. 주변국들의 반발도 거셌는데, 특히 [[고려]]의 [[공민왕]]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북방의 동녕부(東寧府)를 침공하였고, 명나라는 요동도사(遼東都事)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고려를 압박하였다. 고려는 요동 정벌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이 건국되었다. [[조선]]은 [[원나라]]를 버리고 친명(親明)을 분명히 하였고, 이에 [[명나라]]는 조선의 건국을 즉각 승인하였다. 조선은 ‘조선(朝鮮)’과 ‘화녕(和寧)’이라는 두 가지 국호를 올려 선정을 위촉하였고, ‘조선국왕(朝鮮國王)’을 새긴 새로운 옥새를 요청하였다. 이로써 조선과 명나라는 황제가 왕을 봉하여 주고, 왕은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는 전통적인 조공책봉 관계를 수립하였다. [[명나라]]는 [[요동]] 문제를 비롯한 현안이 남았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조선]]을 압박하여 힘의 우위에 서고자 했다. 이 때문에 조선에 과도한 공물과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였고, 사신의 자질을 문제로 들어 조선 사신의 명나라 입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은 강하게 반발하며 항의를 하자 명나라는 사신을 1년에 3번 파견하는 1년 3사가 아니라 3년에 1번 파견하는 3년 1사를 권하였다. 사행 횟수를 줄여 사행을 통해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누설되는 군사적 정보를 줄이고, 조선이 여진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사행 제한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는 정치적 안정과 권위를 인정받는 문제 외에 사행이 갖는 경제적ㆍ문화적 이익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역을 피해 압록강을 넘어온 요동 사람을 쇄환(刷還)하는 문제와 조선이 작성한 표전문(表箋文)으로 벌어진 논란 등 여러 사건이 중첩되며 얽힌 관계는 대명관계에서 강경파였던 정도전이 [[무인정사|왕자의 난]]으로 사라지면서 일단락되었다. 세종 대를 지나 국내외가 안정되면서, 대명관계도 요동을 중심으로 한 영토 문제에서 문화와 교역을 중심으로 한 경제ㆍ문화 문제로 변화하였다. 조선은 서책과 약재, 활([[각궁]])의 재료가 되는 수우각(水牛角) 수입에 적극적이었다.[[http://saheng.ugyo.net/user/about/about02.jsp?menu=2|#]] >주문사(奏聞使) 남재(南在)가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아뢰었다.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고 또 명령하기를, ‘너희 나라 사신의 행차가 왕래하는데 길이 멀어서 비용이 많이 드니, 지금부터는 3년 만에 한 번 조회하라.’ 하였습니다. > (甲辰/奏聞使南在回自京師曰: “帝厚待之, 且命曰: ‘爾國使臣行李往來, 道遠費煩, 自今三年一朝。) >---- >태조 4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9월 2일(갑진)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tabid=k&id=kaa_10209002_001|#]] 전근대 동아시아의 번속국(藩屬國)은 황제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조공국을 의미하였으며, 번국(藩國), 속국(屬國), 번방(藩邦), 속방(屬邦), 번속(藩屬), 번병(藩屛) 등으로도 불렸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관계에서는 황제국과 번속국(藩屬國) 간 상하 관계가 존재하여 번속국(藩屬國)은 황제국을 상국(上國)이라 높여 부르고 자신을 누방(陋邦)이라 낮춰 불렀다. 그리고 번속국(藩屬國) 간에도 상하 관계가 존재하여 일본, 여진, 류큐는 조선을 상국(上國), 대방(大邦)이라 높여 부르고 자신을 누방(陋邦)이라 낮춰 불렀다. 명나라 황제는 조선의 임금을 조선국왕에 책봉하였으며 [[이등체강]](二等遞降)을 적용한 친왕(親王)의 대우를 하였고, 일본 막부의 쇼군을 일본국왕에 책봉하였으며 삼등체강(三等遞降)을 적용한 군왕(郡王)의 대우를 하였다. 중국은 선진문물을 [[동아시아]]에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다른 말로 하면 서양의 선진문물이 동아시아에 직접 들어오기 전까지는 중국과 조공 무역을 하지 못하면 그만큼 발전에서 뒤처지게 된다는 의미였다. 중국은 한반도 국가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 국가, 북방 민족, 서역 국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공무역도 명목은 조공이었다. [[조선]]도 [[여진]]이나 [[일본]]이 조공해 올 때는 하사품에 신경을 썼다. [[동아시아사]]에서 조공에 대한 이익은 중국와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면이 있다. 기본적으로 조공의 손익은 각 국가의 국력이나 지리적 위치에 영향을 받았다. 예컨데 일본의 경우 조선보다 훨씬 강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바다로 한창 떨어져 있어서 중국이 함부로 수탈할 수가 없었다. 또 일본의 경우엔 조공무역의 일종인 [[감합무역]]의 이득이 커서 [[다이묘]], 상인들끼리 무역권 가지고 경쟁하는 사례로 [[영파의 난]]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이로인해 명나라가 [[해금령]]을 강화하자 줄어든 이익 때문에 후기 [[왜구]]가 성행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여진족]]이나 [[몽골]]의 경우 중국과의 거리는 가까웠지만 군사적으로는 강력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싸우기는 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달래줘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말무역 등에서 상당한 이득을 봤다. 반면에 [[조선]]이나 [[베트남]]은 중국과 거리도 가까웠을 뿐더러 당시 동아시아에서 상대적으로 중국을 상대하기엔 세력이 약한 축에 들었기에 중국이 굳이 이런식으로 배려할 요인이 적었던 면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