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공 (문단 편집) ====== 긍정론 ====== >'''예를 들어, 많은 서양의 정치학자들이 중국과 조공국의 관계를 서구의 관점에서 단순한 종주국과 종속국의 관계로 표현하면서 조공-책봉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국력의 우열이 아닌 문화와 경제적 맥락으로 연결되고 공통의 군사위협에 대항하는 연합이나 동맹관계로 설명할 수도 있다. > >왜란 이후, 조선은 이제까지 누려왔던 중화체제 안의 특수한 지위('''형식상 번국이나 실질적으로는 동맹국이었던''')를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었다. >---- >- 최용, <비대칭세력연합 이론을 통한 동아시아 외교사의 재해석: 신라-당, 고려-몽골(원), 조선-명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군사학논집 (2020) >그런데 주변국 조선의 입장에서 사대정책과 중화관념은 중국과는 다르게 인식되고 활용되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사대정책과 중화관념이 동시적으로 형성된 것도 아니었다. 한반도가 약소국임을 자각한 가운데 발생한 사대는 현실적으로 강대국 중국으로부터 공격과 위협을 회피하고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주체적인 전략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 >'''당대 조공관계의 성립은 중국대륙의 군사적 압력에 의해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인접국과의 역학관계에서 각기 자국의 입장을 유리하게 유도하기 위해서 자주적으로 취해진 실리적인 외교수단이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결코 자기보존을 위한 자율성이 상실되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연한 외교수단으로서 때에 따라서는 조공 내지 책봉 관계가 다원적으로 편성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조공 내지 책봉관계가 양국간의 힘의 관계를 완화시키는 구체적인 절차를 수반하는 것이라면, 사대는 그와 같은 힘의 관계에서 양국간에 통용된 외교적인 수사였던 것이다. >---- >정용화, <사대중화질서 관념의 해체과정: 박규수를 중심으로>, 한국국제정치학회 (2004) 조선시대 조공-책봉 관계는 [[원 간섭기]] 당시의 고려와는 달리 조선이 명이나 청에게 정치적ㆍ영토적 주권을 상실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조선은 몽골 복속기 당시 몽골 황제권이 실제권력을 행사한 고려의 상황과는 분명한 질적 차이를 보였다.[* 이는 몽골 복속기 당시 몽골 황제권이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강력한 정치적 권위를 발휘했던 것과 달리, 공민왕의 속국 관계 재편 이후 고려-조선에서 명 황제권은 고려-조선 내부의 정쟁, 혁명, 반란 등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그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은 황제의 성지를 유리하게 활용하여 중국의 제후가 아닌 외신제후로서의 근거를 확보하고 이를 자기신념화하는 방향으로 더욱 나아갔다.] [[몽골 제국]]이 제국을 건설하여 천하질서가 일원화되면서 형성된 원명청대 대륙 왕조와 한반도 왕조의 상호관계는 그 속에서도 그 성격 편차가 매우 커서 의례나 그 규칙성 등을 수반하는 정치적 관계가 모든 시기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몽골 지배층의 대(對)고려 인식이 속국(屬國)에서 속령(屬領)으로 변모한데 반해[* 고명수(2020),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9.], 명나라 사람과 조선 사람은 모두 조선과 명을 서로 외국(外國)으로 인식한 사실이 그 좋은 예이다.[*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계승범)][* 조선 전기와 후기를 막론하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는 사례들이 매우 많은데, 그 가운데 일부를 전거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중종실록 24년 10월 18일 경진, 26일 무자, 27일 기축; 37년 11월 24일 경오; 숙종실록 35권 27년 3월 29일 병진; 경종수정실록 3권 2년 3월26일 신해; 영조실록 1권 즉위년 9월 1일 신축 등.] >{{{#!folding 인용문 ---- 궁극적으로 청이 조선을 외번(外藩, tulergi golo)과 구분되는 별개의 국가로, 조선국왕을 일국의 군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 '''이렇듯 외번몽고와 달리 독립적 지위를 인정받고 있던 淸代 조선국왕의 법적 위상은 征東行省丞相⋅駙馬⋅高麗國王이라는 복합적 위상을 가지면서 국내에서도 몽골 황제권에 의해 그 권한이 상대화되어 있었던 몽골 복속기 고려국왕의 법적 위상과도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 이재경(2019), "大淸帝國體制 내 조선국왕의 법적 위상 ―국왕에 대한 議處⋅罰銀을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83. p. 439. ---- 조선초기에는 유독 활발한 대외정벌(對外征伐)활동이 이루어졌다. 대외 정벌의 주류를 점했던 여진(女眞)정벌은 명목상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명과의 이해관계와 충돌이 불가피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조선이 건국과 함께 내세웠던 사대는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결국 조선은 사대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치로 인식했다기보다는 정국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정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활용했다. 조선은 두 원칙이 충돌할 때 당연히 국정목표의 달성을 우선시했다. 사대명분을 따르는 것이 국가의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할 경우 이를 굳이 따르지 않았다.''' 이는 사대가 국가의 보전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부속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동시에 아직 조선에서의 사대가 곧 국익을 의미하지 않았음도 보여준다. ---- 이규철, <조선 태종대 대명의식과 여진 정벌>, 만주연구 (2014) ---- '''그러므로 조선전기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심화된 중화 인식은 특정 국가로서의 명 대한 무조건적인 종속을 초래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 선행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듯이, 명의 정치·제도·학술·인심을 비판하는 당대 조선인의 기록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물론 이러한 기록이 중화 문명의 가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나 자주독립의 선언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조헌이 선조 7년(1574)년의 북경 사행(使行)에서 중화 문명에 대한 뜨거운 동경을 표출함과 동시에 중화의 이상과 괴리된 명의 현실에 분노를 표출한 바에서 알 수 있듯이, 이와 같은 현상은 명이라는 특정 국가를 조선인이 체득한 중화 문명의 기준에 의해 비판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조선은 예제를 비롯한 명의 문물 제도를 자발적으로 이식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명에서 유행하고 명나라 사람들이 추천하는 것이라 해도 양명학처럼 자신들이 설정한 중화 문명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완강히 거부하였다. '''조선과 명의 사대·자소 또는 조공·책봉 관계는 분명 예제상 상하위계적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명의 요구나 지시가 아무런 제한 없이 관철되는 것은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그 원리상으로도 성립하기 어려웠다.''' 양국의 관계는 세력뿐만이 아니라 의리와 명분이 함께 상호작용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제후국의 분의(分義) 못지않게 천자국의 분의도 양국의 관계를 규범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규정하였으며, '''독자의 강역과 인구를 다스리는 외번 제후의 통치권은 침해받지 않는 것이라 당대인들은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야만, 재조지은의 형성기인 '''임진왜란 당시 발생한 조·명 양국의 수많은 외교 현안과 갈등, 천자가 책봉한 조선의 국왕을 다름 아닌 철저한 중화 이념의 소지자로 알려진 이른바 ‘정통성리학자’들이 반정을 통하여 축출한 사실 또한 모순 없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중화 문명의 상징으로서의 명이 보편이라면 특정 국가로서의 명은 특수가 된다고 할 수 있으며, 보편의 틀 안에서 특수를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였다. ---- 허태구, 禮의 窓으로 다시 바라본 병자호란 }}} 결국 조선이 외국으로 간주되며 조공이 제대로 유지되는 한, 자체적으로 정치적, 영토적 주권을 언제나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계승범(2009),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p. 64~68] 책봉에 있어서 황제가 책봉한 조선의 국왕을 다름 아닌 철저한 중화 이념의 소지자로 알려진 이른바 ‘정통성리학자’들이 반정을 통하여 축출한 사실을 통해 중원제국의 요구나 지시가 아무런 제한 없이 관철되는 것은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그 원리상으로도 성립하기 어려웠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당대인들의 생각에서는 독자의 강역과 인구를 다스리는 외번 제후의 통치권은 침해받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허태구, 禮의 窓으로 다시 바라본 병자호란] 조명관계 이후의 조청관계 또한 청과 조선의 관계가 비록 대등한 관계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교역과 그 밖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행(使行)의 내왕에 의하여 제기되고 처리되는 조공관계였다. 그리하여 역대의 왕이 중국의 책봉을 받고 그 연호를 사용하여 형식적으로는 종속국이었지만, 실제로는 내정이나 외교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으며 자주적이었다고 본다.[* <한국사 32 - 조선 후기의 정치> V. 조선 후기의 대외 관계,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 18세기에 편찬된 『明史』에서 조선을 ‘外國’으로 분류한 것과는 달리, 1920년대에 편찬된 『淸史稿』에서는 조선을 ‘屬國’으로 분류했다. 이는 조선의 위상이 명・조선 관계에서보다 청・조선 관계에서 더 격하된 것처럼 오해할 수 있게 한다. 그렇지만 이는 1920년대 당시 중화민국의 지식인들이 이미 서양의 『萬國公法』[* 미국 출신의 법학자인 헨리 휘튼(Henry Wheaton)의 국제법 저서《Elements of intenational law with a Sketch of the History of the Science》을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이 청나라 동문관에서 진흠(陳欽), 이상화(李常華), 방준사(方濬師), 모홍도(毛鴻圖) 등과 함께 번역하여 1864년 출판한 것.]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萬國公法』의 ‘vassal state’를 기존에 널리 쓰이던 ‘屬國’이라는 단어로 문자적으로 번역해 이해한 결과였을 뿐이었다.[* 최소자, 淸과 朝鮮: 근대 동아시아의 상호 인식 (서울: 혜안, 2005), 180-183p.][* 구선희, 근대 한중관계사의 연구경향과 쟁점 분석, 한중일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와 쟁점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9)] 다른 말로, 아편전쟁(1839-1842) 이후 『萬國公法』이 널리 유통되고 1882년 이후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함에 따라, 이전부터 널리 쓰이던 ‘屬國’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서양 개념의 ‘vassal state’로 자의적으로 재해석해 사용한 결과였던 것이다. 오히려 1735년 청나라 시기에 편찬된 『明史』에서 조선이 ‘外國’으로 분류된 것은 당시 청에서 조선을 외국으로 보고 있었다는 반증이며, 1927년 중화민국 시기에 편찬된 『淸史稿』에서 조선이 ‘屬國’으로 분류된 것은 당시 중화민국의 지식인들이 청나라 시기의 조선을 속국으로 소급하여 이해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萬國公法』이 유통되기 이전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 무대에서 쓰이던 ‘屬國’의 의미는 서양의 개념으로서의 ‘vassal state’와 결코 같다고 볼 수 없다. 실제로 개항(1876) 이전의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을 외국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서양 학자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중국의 역사 기록에 보이는 ‘屬國’이나 ‘藩國’을 각기 독자적 권력체계와 영토주권을 갖춘 주권국으로 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계승범, 16-17세기 明・朝鮮 관계의 성격과 조선의 역할] 무엇보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제도는 큰 나라와 작은 나라 간의 국제적 상호승인을 위한 의례적 성격이 강했으며, ‘속국(屬國)’은 책봉국의 정치적 간섭 없이 내정과 외교 등 제반 국사를 자주적으로 처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서양의 ‘피보호국(protectorate)’ 또는 ‘반주권국(semi-sovereign state)’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으며, ‘屬國=vassal state’라는 의미의 변질은 19세기 이후 서양 국제법의 전파와 중국의 역사 왜곡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전근대 동아시아의 전통적 조공책봉 관계를 국제법적 의미의 ‘suzerain-vassal’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다. 실제로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屬國’의 의미는 다양했으나 일반적으로 ‘조공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또한 『萬國公法』에 따르면, “만약 그 국사를 자치하여 타국으로부터 명을 받지 않는다면 그 국가는 자주국(independent state)이라고 할 수 있다(凡有邦國 無論何等國法 若能自治其事 而不聽命於他國 則可自主者矣)”라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에 따르면 전통적 의미의 ‘屬國’은 곧 ‘자주국(independent state)’에 해당하였다.[*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서양 제국주의의 청에 대한 침입이 본격화된 1840년대 이후에도 청나라는 상당 기간 조공과 책봉은 의례에 불과할 뿐, 책봉국이라도 조공국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할 권한은 없다는 전통적 관행을 유지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청나라는 조선 원정을 앞둔 프랑스 및 미국 공사의 질의에 대해 '''“비록 조선이 중국에 공물을 바치고 있으나 일체 국사는 모두 그 자주(自主)에 따른다. 그러므로 텐진조약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성명하며 조선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자국은 간섭할 권리도, 책임도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청나라의 대(對)조선 정책은 1880년대부터 급변하였다. 신장 지역에서 발생한 러시아와의 분쟁, 일본의 류큐 병합 그리고 1860년대 이후 프랑스·영국의 인도차이나 침략 등으로 인해 전통적 중화질서의 판도가 점차 잠식당하자, 이제 청나라는 최후의 ‘屬國’인 조선에 대한 특수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屬國’의 의미를 근대 국제법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그 핵심은 청나라가 조선에 보호를 제공하는 대신 조선을 종속국(dependent state) 또는 반주권국(semi-sovereign state)으로 규정하는 데 있었다.[*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한편, 1880년에 출간된 『公法會通』[* 스위스 출신의 국제법학자인 블룬츨리(Johannes C. Bluntschli)의 국제법 저서《Das moderne Völkerrecht der civilisierten Staaten als Rechtsuch dagestellt》을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이 청나라 동문관에서 번역하여 1880년 출판한 것.]에서는 『萬國公法』과 달리 'suzerain state'와 ‘보호’의 책임을 직접 연관시켰다. 『公法會通』에서는 ‘보호를 구하는 국가’를 'semi-sovereign state'로, ‘보호를 제공하는 상위 국가’를 'suzerain state'로 정의하고, 'semi-sovereign state'를 ‘屛藩’으로, 'suzerain state'를 ‘上國’으로 번역하였다. 이로 인해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관계가 보호국-피보호국의 관계로 재해석될 여지가 발생한 것이다.[*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folding 《청광서 조중법 교섭사료》 “중국의 이른바 ‘속국’은 바로 외국에서 말하는 ‘보호국’입니다. 이유 없이 다른 나라를 침범하거나 화호를 맺은 동맹국을 침범하는 것은 모두 만국공법에서 반드시 금하는 것입니다. 살펴보건대 법월화약(프랑스가 베트남을 사실상 보호령으로 삼은 1874년 사이공 조약을 가리킴-인용자)에 ‘프랑스는 베트남이 자주권을 가져서 어떤 나라에든지 복종하지 않음을 분명히 인식한다. 혹시 내란 및 외국의 침략이 생기면 프랑스가 즉시 원조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베트남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요, 스스로 원조를 할 권한을 인정하여 마치 일본이 류큐를 멸망시킨 고지(故智)와 같이 보호를 가탁해서 그 잠식하는 음모를 수월케 하고자 함을 명백히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이 베트남을 다투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속국’의 이름을 다투어야 하고, ‘속국’의 이름을 존속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보호’의 실제를 남겨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 《清光緒朝中法交涉史料》, 4卷 ,〈内閣學士周德潤請用兵保護越南摺 光緖 9年 4月 7日, p. 6., "中國所謂屬國 卽外國所謂保護 無故侵人之國 及侵和好之與國 皆萬國公法所必禁者也 査法越和約云 法國明知越國係操自主之權 非有遵服何國儻有匪梗 幷外國侵擾 法國卽當幫助 是明謂越南非中國之屬國而欲以自許幫助 假託保護 以自便其蠶食之謨 如日本滅琉球故智 然則中國欲爭越南 必先爭屬國之名 欲存屬國 必先存保護之實" }}} 그리고 1882년 베트남 문제로 청나라와 프랑스 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청의 내각학사(內閣學事) 주덕윤(周德潤)은 《清光緒朝中法交涉史料》에서 ‘屬國’을 지키기 위해서는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중국 내에서 ‘조공국’을 의미하던 ‘屬國’을 ‘vassal state’로 재정의하기 위해서는 ‘보호’의 책임이 수반되어야 함을 주장한 최초의 사례로서, 당대 청나라 스스로도 전근대 동아시아 개념의 ‘屬國’과 근대 국제법적 의미의 ‘vassal state’간에 의미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880년대에 이르러 중국은 ‘屬國’의 의미를 전유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체제 속 ‘속국(屬國)=조공국’을 근대 국제법적 의미에서의 ‘속국(屬國)=vassal state’으로 일방적으로 재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재해석 자체가 1880년대부터 중국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일방적인 주장으로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전통적 ‘屬國’의 의미를 ‘vassal state’로 일방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청의 시도에 대해 고종의 외교고문 데니(Owen N. Denny)는 1888년 발표한 팸플릿 『淸韓論』에서 국제법적 견지를 바탕으로 ‘속국(屬國)=주권독립국’임을 논증하였다. >'''《청한론》'''[br]① 외국의 간섭이나 지시 없이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적 문제를 언제나 스스로 처리해온 나라는 법률적으로 독립국이며, 반드시 주권국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 ② 그러나 주권독립국의 가장 분명한 증거는, 다른 주권독립국과 교섭하고, 수호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고, 공사를 파견하고, 전쟁과 평화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이것들은 주권과 양립 가능하며 일관된 권리들로서, 어떤 국가가 이를 보유했을 때는 그것을 독립국들의 대(大)가족에 포함시켜야 한다. ③ 그에 반해 이러한 권한을 갖지 못한 나라는 그 협약(agreement)의 명시적 표현(expressed terms)에 따라 반독립국(semi-independent state) 또는 종속국(dependent state)의 반열에 놓여야 한다. 이에 따르면, ① 전통적 조공책봉 관계에서 한반도의 국가들은 중원 국가들에 대해 조공과 책봉의 의례를 준행했지만, 실제 내정과 외교에 있어선 자주적 권리를 누렸으며, ② 조선은 이미 1876년에 일본, 그리고 1882년에 미국·영국·독일 등과 대등한 독립국의 자격으로 조약을 체결하였고, ③ 조청 간 조공책봉 관계를 규정한 조약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병자호란 직후 체결한 정축약조(丁丑約條, 1637)인데, 여기에는 조선의 자주권을 제한하는 내용이 없었다는 점에서 조선은 국제법적으로 주권독립국에 해당하였다. 또한 미얀마 문제로 영국이 매년 청에 공물을 납부하고, 과거 유럽 연안 국가들이 바르바리 국가들(Barbary States)에 공물을 바친 사실이 그 유럽 국가들의 주권을 조금도 손상할 수 없음을 거론하면서, 특정 국가의 주권은 오직 명시적 조약의 형태로 규정될 때만 법적으로 제한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淸韓論』은 조선의 국제적 지위에 관해 영어로 논한 최초의 문헌으로서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1888년 8월 22일 미국 오리건 주 상원의원 존 미첼(John H. Mitchell)은 미 상원에서 이에 기초하여 조선 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하는 등 미국의 대(對)조선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는가?: 한중관계사 속에서 ‘속국’의 의미,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0년 12월] 무엇보다 이 조공-책봉은 한반도 왕조들이 고대부터 중원 국가들과 맺어오던 전통적인 외교방식이었다. 그리고 조공-책봉이라는 사대의 제도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 국가 양자에게 국가 안보와 국제 평화를 효율적으로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중화체제와 '사대': 한중 사대관계에 관한 정치학적 해석, 장인성, 《동양정치사상사연구》, 2014] 즉, 고대 삼국시대 때 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국가들은 중국에 대해 명목상 '번속(藩屬)'임을 자처하며 조공-책봉 관계를 맺어왔지만, 의례적인 승인 절차인 책봉 외에는 역사적으로 내정에 간섭을 받는 일은 [[원 간섭기]] 이전까지는 거의 없었다. 역대 한반도 국가의 치자들은 중국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았으며, 사대의 '예(禮)'를 내세우면서도 가능한 한 실리를 취하고자 했다. 특히 중국 대륙에서 여러 국가들이 서로 경합하던 삼국 시대(당 시기 제외)나 고려 시대(원 간섭기 제외)에는 외교 문제에 있어 사대로 인한 제약은 크지 않았고 선택의 여지가 컸다. 반면에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 각각 나라가 하나씩만 존재했던 원명청대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상대적으로 사대에 규범적인 면모가 강조되고 이에 따라 양국 관계가 고도의 안정성을 보이게 되었으나, 처음부터 조공-책봉의 성격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 후기 사대 연구: 대외정책수단으로서의 사대, 이재석, 《동양정치사상사연구》, 2015] 또한 중국적 제도가 지역체제의 안정성을 지지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중국이 안정되었을 때 동아시아 지역질서도 함께 안정되므로[* C. Kang, David, “Hierarchy and Stability in Asian International Relations.” John G Ikenberry andMichael Mastanduno, eds., Intrnational Relations Theory and the Asia-Pacific. New York: ColumbiaUniversity Press, 2003, pp.169~171; C. Kang, David, China Rising. New York: Columbia UniversityPress, 2007, p. 41;] 이 같은 구조에서 주변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며 신속(臣屬)하는 대신 내정의 자율성을 확보하게 되고, 중국은 굳이 주변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도 천하를 다스리게 되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홍면기(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페어뱅크 조공체제론의 비판적 검토: 중국중심주의라는 엇나간 시선의 문제, 2018, vol.33, no.2, 통권 47호 pp. 5-33 (29 pages)] 즉, 이러한 이유들로 내정불간섭의 원칙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