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공 (문단 편집) ===== 청나라 시기 ===== >상이 이르기를, …… "명년에 장차 세폐를 보내야 하는데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를 생각하면 편히 잠을 자지 못하겠다."고 하니, 심열이 이르기를, "내년에는 그래도 백성들에게 징수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 후에는 참으로 계속하기 어렵습니다." >---- > 인조실록 37권, 인조 16년(1638년) 11월 6일 두번째 기사 게다가 [[명나라]]에 조공하는 건 명나라가 조공한 양에 못지않은 하사품을 주는, 일종의 교역이었기 때문에 [[조선]] 측의 불만이 없었지만[* 그리고 이게 사실 불만이 있을 수가 없는 게 뭐냐면 전적으로 주변의 여진 부족들이나 조선이 남는 장사였다. 명에게 있어 조공은 부모로서의 위상을 인정받기 위해 받는 것이기에 조선이나 여진 부족 등이 바치는 조공보다는 하사품을 더 많이 주는 것이 외교적 관례였다. 그래서 조선이 거의 조공을 바치면 이문을 남겨 왔다. 공무역은 조선에게 여러 모로 이문이 남는 장사였다. ] 1637년 [[병자호란]]에서 인조 정권이 불과 50일도 안되어 항복하여 수립된 조청관계에서는 [[조명관계]]에서의 방물 외에 세폐(歲幣)가 추가되어 1263~81년 여몽관계와 같이 조공이 이원화 되었다. 방물과 달리 세폐는 청 측이 강제로 양을 책정했는데, 식량 사정이 매우 좋지 않던 청은 매해 세폐미 1만 석을 바치게 했다. 물론 세폐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1639년 요동에는 기근이 벌어지자 대중국 약탈전을 준비하던 청은 조선에게 세폐미 1만 석 중 품질이 나쁘다는 이유로 2,250석을 재차 요구했으며, 1640년에는 그 무렵 청에게 완전히 복속된 [[경흥군]] 대안의 얀추(yancu) 지역의 천여 명의 둔전민들을 기근으로 부터 구제하기 위해 미곡 3,178석과 소 100여 마리 등을 보내고, 2년에 걸쳐 100여 곡 이상의 곡물을 지급하였다. 다만 그해 청은 세폐미를 1천 석으로 감면해주었으나, 2년 뒤 [[청태종|홍 타이지]]가 [[송산전투]]를 일으키면서 조선에게 그해(1642년)부터 1646년까지 바쳐야 할 쌀 5천 섬을 한달안에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 김문기(2012),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유통", 《역사와 경계》 85, p. 338~342.] [[1644년]] 명 중앙의 붕괴 이후 북경을 차지한 [[이자성]]의 반란군을 축출하고 북경을 정복한 청은 입관과 함께 식량사정이 더욱 급해져서 [[소현세자]]를 통해 겨울 전에 5천 석을 조공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듬해 2월에는 무려 20만 석을 요구했다가 10만 석으로 감면해주었다. 조선은 전국에서 300척의 배와 7천여 명의 인원을 모아 곡물을 지급해야 했다.[* 뱃사공들이 일부로 배를 전복시키거나 조난당하면서 북경에 지급된 세폐미는 3만 6천여 석에 불과했다.] 이 대대적인 수탈은 1645년 청이 강남을 차지하자 2년 뒤 세폐미를 1백 석으로 감면해준 끝에 매듭을 지었지만, 원 간섭기의 수탈을 제외하면 전통적인 조공-책봉 관계에서는 일찍이 유례가 없는 수준으로 당시 조선의 조공 마련 비용은 [[호조(조선)|호조]] 재정 규모를 압도적으로 초과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재정보용책을 실시했으나 속수무책이었고 백성들에게 결포를 걷어 엄청난 대민 폐해를 초래했다.[* 김문기(2012),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유통", 《역사와 경계》 85, p. 342~346; 홍선이(2014), "歲幣 方物을 통해 본 朝淸관계의 특징 -인조대 歲幣 方物의 구성과 재정 부담을 중심으로-", 《韓國史學報》 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말기까지 조청관계에서 조공으로 인한 조선의 부담과 소득품의 가치를 비교했을 때 조선은 국가재정상 연평균 전 20만 량 이상의 손실을, 칙행시에는 40만 량에 달하는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전해종(1970),《한중관계사 연구》, p. 98~99.] 이 당시(인조 15년~17년, 1637년~44년)가 조선의 대청관계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로, 당시 청은 조선에 매우 위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청의 입관 후 점차 완화적인 관계로 발전하였다. 1644년 청의 입관은 현실적으로는 여진족의 중국 지배를 성립시켰고, 명왕조 회복을 시도하는 일부 復明運動者 즉 황실의 후손은 江南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조선과 청 양국관계는 정상화되면서 앞서의 전쟁시기에 비하여 현저하게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물론 상호 간의 경계심이나 적대적인 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청의 관심의 대상이 중국으로 확대되면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조선에 대한 강요는 다소 감소되었고 일단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한국사 32 - 조선 후기의 정치> V. 조선 후기의 대외 관계, 국사편찬위원회, 1997년] 이후 강희시대 중반 이후부터는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바뀌었고 18세기에 들어서면 조선 지식인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이러한 변화를 청나라가 베풀어준 은혜 덕택이라는 식의 서술은 역사적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는 자세가 아니다. 청나라는 대만 정벌을 통해 중국에 대한 정복을 완성하였고, 중앙의 재정에도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더이상 조선과의 긴장관계를 감수하면서 막대한 공물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의례적인’ 공물만을 받기 시작하면서 양국 사이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것은 양국이 형식적으로 완전히 동등한 국가로서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상황을 고려하고 자국의 위엄을 손상하지 않는 선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영옥, 조청관계에 대한 편의적 이해 사례(2012)] 이후에 [[조선]]은 훗날 청이 [[대영제국|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과 조약들을 체결하고 내우외환에 빠지기 전까지 청과 [[일본]]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큰 이익을 봤다. 물론 일부 대상들과 특정 상인층이 이득을 보았을 뿐, 정부 재정은 여전히 궁핍하였기 때문에 민생은 고통받았다. 19세기 초반부터 조공으로 인한 손실과 중국 및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저렴하고 우수한 질의 상품이 유입되고 동시에 일본자본의 침투가 시작되어 조선의 경제는 더욱 쇠퇴하기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