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공 (문단 편집) ===== 명나라 시기 ===== 원래 [[명나라]]는 [[조선]]에게 조공품으로 [[금]]과 [[은]]을 요구했으나, [[세종대왕|세종]]은 말과 포로 대체하였다.[* 태종시기에도 의견이 주장되었고 세종시기에도 요청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0011004_006|#]][[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108018_001|#]]] 명이 말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나라는 그 반대 급부인 사여(賜與. 말값)를 포로 지불하였다. 게다가 미리 명나라가 나중에 사여품을 줄 테니 말을 먼저 달라고 하자 [[태종(조선)|태종]]은 거절했다. 무조건 현금 박치기. 나중에는 이상하게 사여품을 명나라가 먼저 주고 조공품인 말은 나중에 줬다. 한마디로 말해서 선결제. 게다가 [[말(동물)|말]]값은 조선에서 정했다. >{{{#!folding 《태종실록 1년 10월 3일》 ---- 의정부에서 무역하여 바꿀 말 값을 정하였다. 큰 말 상등 값은 상오승포(常五升布) 500필, 중등 값은 450필, 하등 값은 400필이고, 중말 상등 값은 300필, 중등 값은 250필, 하등 값은 200필로 정했다. ---- 태종실록 1년 10월 3일 }}} 상등마는 당시 가격으로 아무리 낮아도 쌀 300두 정도였다. 참고로 조선은 여진에서 말을 조공받기도 하였는데(말하자면 수입) 이때도 말값은 조선이 정했다. >{{{#!folding 《세종실록 8년 1월 7일》 ---- 호조에서 상계하였다. '말을 올린 야인(野人: 여진족)에게 답례로 내려주는 물품은 큰 말의 상등은 면포 45필, 중등은 40필, 하등은 35필로 하며, 중질 말의 상등은 30필, 중등은 25필, 하등은 20필로 하며, 작은 말의 상등은 15필, 중등은 10필, 하등은 6필로 하는 규례를 정하게 하소서'이에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8년 1월 7일 }}} 이때의 상등마의 가격은 쌀 30두. 심지어 [[정난의 변]] 와중에는 [[건문제]]에게 후진 말을 팔아먹고도 이걸 명나라에서 추궁할까 봐 그 담당 관리를 보호하려 했던 케이스도 있다. >명나라는 조선에 대해 유목민족보다 낮은 가격을 지불하였는데, 조선은 유목민족에 비해 말의 생산에서 비교열위일 뿐만 아니라 절대열위였다. 예를 들면, 명나라는 1597년 몽고가 공납으로 바친 말에 대해 은 10냥씩을, 시장에서 구입한 말에 대해 5~7냥씩 지급하였는데, 1401년 조선에서 大馬의 공정시세는 은 90냥이었다. 그럼에도 1400년 이전에 명에 대한 말의 최대 수출국은 고려.조선이었다. 조선은 경제적 손실이 큰 교역을 외교적 목적으로 응하였던 것이다. > >(중략) > >명나라가 特貢이란 명목으로 조선으로부터 말을 구입할 때, 時賈로 조달한다고 천명한 적도 있지만, 대체로 중국 내 시세보다 낮았고, 조선의 국내시세보다는 훨씬 낮아서 강제이전적 성격도 포함하였다. >---- >- 이헌창, 한국 전근대 무역의 類型과 그 변동에 관한 연구 >永樂帝가 즉위하자 말 1필당 가격은 견직물 3필과 면직물 2필이란 수매가로 귀착된다. 한편 女眞의 경우 遼東 馬市에서 거래된 말의 평균 수매가가 永樂 3년에 견직물 3.6필⋅면직물 14.6필이었고 이후 永樂 15년에는 米 5석과 견직물⋅면직물 각 3.2필이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명은 고려나 조선에 비해 女眞을 더 우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 임경준, 明初의 말 수급체계와 거래가격 ― 女眞高麗朝鮮에 대한 말 수매가를 중심으로 ― 그러나 이는 조선이 팔고 싶어서 팔았다기 보기엔 힘든데, 명의 사정에 맞춰서 갑자기 많은 숫자의 말을 팔라고 하는 경우도 많아 조선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유쾌한 거래[* 수량에 맞춰서 말을 갑작스럽게 준비하느라 추가적인 비용이 들었고 여진족과 무역으로 죄다 보충했으면 몰라도 직접 말을 준비하는 경우에는 큰 이익을 보지 못하였다.]는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기록을 보면 기병 전력의 약화를 우려하는 신하의 간언이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말을 많이 바치긴 했지만 연구에 따르면 이는 조선이 손해를 보면서 단지 외교적 안정을 위해서 그 손해를 감수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조선도 중요한 전략물자인 말이 많이 나오는 땅이 아닌지라 자국에서 필요한 말조차 여진족에서 수입해서 썼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홍무제]]나 [[영락제]]는 명의 조공국이지만 훗날 위협적인 적이 될 수 있는 조선을 견제도 할 겸, 어차피 자국에서는 생산이 제한적인 말도 살 겸 조선을 이용했고, 조선은 이 관계에서 돈이나 받으며 국방력 강화는 꿈도 못 꾸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말]]은 현대의 탱크나 기갑차 같은 전략자원이었고, 전근대 사회에선 생산량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명은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돈을 주고 소중한 전략 자원인 말을 받으며 조선의 전력 약화를 노렸던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전략물자 생산 제한은 현대에도 존재한다.[* 당장 [[핵무기]] 생산이나 [[원자력 발전소]] 가동에 필요한 [[우라늄]]이나 [[플루토늄]] 및 이를 재처리하는 기술의 유통이나 매매, 보유에 대해 세계 각국에 강력한 규제를 걸어두고 이를 [[IAEA]]를 통해 감시하는 걸 생각하면 쉽다. 좀더 옛날 얘기로 가자면, 1930년에 있었던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통해 세계 각국의 군함 생산량과 보유량을 통제한 것도 [[명나라]]가 [[조선]]을 포함한 주변국에 군수물자로 쓰일 [[말(동물)|말]]을 사간 것과 비견될 수 있다.] [[홍무제]] 이래 [[조명관계]]가 명 황제의 의향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계승되어 [[선덕제]] 치세까지 지속됐다. 영락제는 1408년, [[이성계]]와 [[이방원]]의 [[사리(불교)|사리]] 400여 개와 전국의 사리 454개를 강제로 수집해갔으며, [[https://cafe.naver.com/historyarchive/21781|#]] 1409년에는 조선에 최초로 처녀를 요구하여 선덕연간까지 5번이나 공녀를 요구했다. 이때문에 조선에서는 몇달에 걸쳐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심지어 조선국왕이 직접 처녀를 간택하기도 하였다. 또한 처녀 외에도 환관 양성을 위해 12살에서 18살 가량의 화자를 총 15차례에 걸쳐 200여 명을 명에 바쳐야 했다. 영락 중반부터 황제의 독단적 의향에 따라 좌지우지되던 관계는 점점 조선 견제가 아니라 황제의 개인적 취향을 맞춰주는 풍토로 변해갔다. 때문에 공녀와 화자 외에도 조선의 해산물, 두부 요리사, 가무를 배운 소녀, [[매]], [[스라소니]] 등을 꾸준하게 바쳐야 했다. 어느정도였냐면 조선이 정복활동을 벌여 [[4군6진]]을 설치하고 명과의 갈등을 우려하는 상황에서도 말년의 선덕제는 조선의 두부 요리사를 찾을 정도였다. 조선 조정과 한양, 평안도 백성들은 황제들의 개인적 취향과 그 요구를 전달해주는 탐욕스러운 환관들 때문에 상당한 곤혹을 치러야 했다.[* 정동훈(2020), "正統帝의 등극과 조선-명관계의 큰 변화", 《한국문화》 90.] 다만 명나라가 수탈만한건 아니고 반대로 후한 하사품을 주기도 하였는데 당장 세종 초기 [[영락제]]가 세종에게 잔치하는데 보태라고 양,거위,옷감,다량의 책등을 후하게 하사하는 기록이 있다.[* "황제께서 신에게 이르시기를, 중국에 술이나 과일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길이 하도 멀다 하시고, 생견(生絹) 3백 필과 안팎 옷감 30필과 양 1천 마리를 하사하시어, 술과 과일 값으로 하라 하시었으니, 이상의 물건들을 왕이 받으시고, 왕의 나라에 있는 것으로 잔치를 차리게 하시오."하고, 사신이 먼저 태평관으로 돌아가니, 병조 참판 이명덕과 지신사(知申事) 원숙(元肅)을 보내어, 채백(綵帛) 15필, 채견(綵絹) 15필, 생견 3백 필, 양 8마리, 거위 16마리, 《음즐서(陰騭書)》1천 권을 받아 오게 하였다.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8017_001]]] 어린 나이의 [[정통제]]가 즉위하면서 황제의 무관심으로 [[조선]]은 더이상 황제의 입맛을 맞춰주기 위해 곤혹을 치를 필요가 없어졌으며 때문에 의례적인 사신단만 종종 오가게 되자, [[조명관계]]는 매우 안정화 됐다. 이제 [[명나라]]는 북경 인근의 [[조선]]을 자신들의 주요 동맹국으로 삼을 수 있었고, 조선도 명나라로부터 선진 문물을 대거 수입하고 국력을 착실히 키워나갈 수 있었다[* 당장, [[명나라]]가 자국에 팔 물목으로 [[말(동물)|말]]을 요구하는 통에 대규모의 기병을 운용할 수 없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말이 없으면 대포를 만들면 되지]]'하는 생각으로 [[대포]]를 포함한 각종 화약 무기의 생산에 주력하여, 현대의 [[대한민국]]에 비견되는 [[한국사]] 최고의 [[화력덕후]] 국가가 되었는데, 이는 명나라와의 조공무역으로 얻은 재력이 바탕이 되었다.].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도 이걸 노리고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 이래로 [[명나라]]에 칭신했으나, [[다이묘]]들이 막부의 무역 선단을 사칭해서 몰래 조공하는 바람에 별 이득을 보지 못하고 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