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계현 (문단 편집) == 선수 시절 == || [[파일:attachment/nonghyupjogye.jpg|width=300]] || || 1988년 농협 입단 사진 ||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농협 야구단|실업야구 농협 야구단]]에 1년간 몸을 담고 나서, 이듬해인 1989년에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당시 프로선수는 대륙간컵 등 국제경기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아마추어 선수 신분이어야 했다. 당시 이로 인해 발이 묶였던 선수는 [[송진우(야구선수)|송진우]], [[강기웅]], [[노찬엽]] 등이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덕분에 1989년은 국가대표급 신인들이 다수 쏟아져나온 해로 기록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 신인왕은 아마 시절 그들에 비해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 한 [[박정현(투수)|박정현]]이 차지했다. ||[[파일:/img/img_link7/147/146369_2.jpg]]|| ||[[파일:external/appdata.hungryapp.co.kr/SuAxd47yS7P65ZCdJqQiUYMPo33vCibc.jpg|width=268]]|| 기아 투수진의 삼대장이었던 영광의 [[해태 타이거즈]] 시절. [[선동열]], [[이강철]]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마운드의 3인방 중 한 축이었으며, 통산 320경기에 등판해, '''126승 92패 17세이브에 [[평균자책점]] 3.17'''을 기록했다. 전성기에는 유난히 [[LG 트윈스]]에 강해서, 1993년 ~ 1995년에[* 결정적으로 이 기간은 [[LG 트윈스]]의 '''전성기'''였다.] LG를 상대로 12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1993년 LG [[김태원(야구선수)|김태원]][* 1993년에 조계현과 [[김태원(야구선수)|김태원]]의 맞대결은 세 차례 있었는데 각각 0-0 무승부(더블헤더 1차전), 조계현의 1-0과 2-1의 두 차례 1점차 승리였다. 당시 [[김태원(야구선수)|김태원]]은 141.1이닝 방어율 2.42라는 엄청난 호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조계현과의 맞대결에서 전혀 승리를 챙기지 못하는 등 불운이 겹쳐 시즌 8승에 그치고 말았다. 결정적 요인은 조계현과의 맞대결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과의 맞대결은 1980년대 [[선동열]] 대 [[최동원]] 못지 않은 명승부였고, 엘지 해태의 3연전 모두 잠실야구장이 매진되기도 했다. 조계현의 LG전 연승은 1995년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의 1-0 완봉승으로 간신히 마감됐다. 조계현은 투수왕국 해태에서 최고 투수는 못 됐을지 모르지만 열혈 팬들도 거느리고 있다. 그는 팬들에게 투혼의 승부사처럼 비췄다. 대단한 구속도 아닌데도 강심장의 자신있는 투구 모습은 정말 짜릿한 희열을 선물했다. 특히 삼성, LG 등 라이벌 팀과의 대전엔 더 짜릿했다. 해태는 군산상고 주축에 광주일고가 보조하는 식으로 출범했고 해태의 전성기 마지막엔 군산상고 출신 조계현이 있었다.그가 떠난 후 해태의 우승도 끊기고, 결국 부도가 난 건 묘한 느낌을 준다. 그후로 해태나 기아에서 군산, 전주 출신은 줄어드는데 쌍방울의 출범도 이유가 됐겠다. 해태에서 빛나는 선수들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조계현은 성적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선수로 기억된다. 그가 던질때는 야구 승부 정신의 처절함과 치열함이 있었기에 그만의 팬덤과 아우라를 남길 수 있었다. 당시 명 투수들이 그렇지만 문희수처럼 대학을 안 가고 프로에 진출했다면 더 막강한 해태와 좋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지. 1992년까지는 셋업+마무리로 입단동기 [[이강철]]에 비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지만 1993년 그가 만개했다. [[선동열]]이 마무리로 내려가면서 [[선발 투수]]로 보직을 바꾸는데, 17승6패 방어율 2.15로 다승왕과 [[평균자책점]] 4위를 차지한다. 게다가 한국시리즈 2승으로 해태의 V7를 견인했다. 조계현은 고교 1학년시절 강속구 투수로 등장했다. 그후 어깨에 무리가 있었는지 속구가 무뎌졌지만, 프로에 나타날 때 그는 강속구도 자주 구사했다. 한데 1992년 200이닝에 가까운 투구를 한후 무지 힘들었다고 한다. 이대로는 야구를 오래 못할 것같은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 그후 본격적으로 변화구와 제구력 투수로 변신한다. 그리고 큰 성과를 얻었다. 그는 겨울전지훈련에 자주 동행치 않았다. 주로 따스한 남쪽 완도의 섬에서 보내곤했다. 보길도였을까? 아마도 체력적 부담도 있었겠고 자율훈련에 자신도 있었겠지만 구질개발이 중요하다고 보고 개인훈련을 택했을지도. 1994년은 그의 전성기였다. 그 해 해태는 LG의 맞대결에서 7승 11패를 당했지만 그 중 '''5승'''이 조계현이였다.~~본격 쌍둥이 킬러~~ 81승을 올리며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신바람 야구 LG에게 유일한 저승사자가 있었으니, 그건 조계현이었는데 2년 연속 다승 1위를 하였다. 라이벌 팀 LG의 [[이상훈]]과 함께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하지만 그해 투수 골든글러브는 최초로 40세이브 고지를 찍은 태평양의 마무리 [[정명원]]이 받았다. 그 해 8월 14일에는 쌍방울을 상대로 1안타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의 노히트노런을 저지한 주인공은 [[김기태(1969)|당시 쌍방울 부동의 4번타자이자, 감독이 된 후에는 드러눕기를 취미삼는 분]].[* 후에 김기태가 LG와 KIA에서 감독을 맡을 때 조계현이 수석코치가 되어 옆에서 그를 보좌한 걸 보면 참 인연이다.] 1995 시즌은 부상으로 인해 2달가량 출장을 못 하며 9승에 그쳤으나[* 이건 당시 방위복무 중이었던 [[이종범]]이 없는 타선의 무기력함도 있었다.]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의 트리플 크라운을 저지하면서 1.71로 방어율왕에 올랐다. 1996 시즌은 1993이나 1994랑 비교되지만 그해 못지않게 압도적인 투구를 보이며 1점대를 늘 유지하다가, 마지막에 2점대를 찍고 그걸 만회하려던 최종전에서 부친상을 당하고 만다. 결국 ERA 2.07에 16승을 찍고 끝난다.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40109184459299.jpg]] || || (출처 : 포토로) || 순탄치 못했던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6년의 활약을 마지막으로 [[이대진]], [[김상진(1977)|김상진]] 등 신예 에이스들이 나타나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밖에 나서[* [[하와이]] 전지훈련 중 '''[[이순철]]''', [[송유석]], [[김정수(1962)|김정수]], [[이건열]], [[정회열]] 등과 같이 [[해태 타이거즈 항명사건|항명사건]]을 터뜨린 게 원인이었다. 결국 이 선수들은 1996~1997시즌 사이에 대거 정리된다. 단 김정수만큼은 예외, 어느정도 사건 수습을 했기 때문에 비교적 오래 살아남았는데 이 덕인지 2000년 [[김응용]] 감독의 추천을 통해 SK로 이적했다.] 1997 시즌이 끝나고 [[삼성 라이온즈]]로 '''4억원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이 시기삼성은 우승의 한을 풀기 위해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타 팀에서 여러 선수들을 데려오는 등 [[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례들을 살펴보면 삼성의 막대한 자금력에 감탄할 정도인데, 먼저 김영진과 양용모(...)가 주전을 하던 포수진을 보강하기 위해서 1998년에는 해태에서 방출된 정회열을 자유계약으로, OB로 입단해야 했던 신인포수 김지훈을 지명권 양도로 데려왔고, 1999년에는 우완투수 이상훈과 4억원을 주고 두산에서 진갑용을 사온다. 그리고 1999시즌이 끝나자마자 LG에서 주전포수인 [[김동수]]를 3년 8억의 조건 + FA 보상금 + 김상엽을 주고서 사왔다. 또한 투수진 보강을 위해 1997 시즌이 끝나고 해태에서 4억원을 주고 조계현을 영입했으며, 1999년 시즌을 앞두고 OB의 에이스 투수 [[김상진(1970)|김상진]]을 6억 5,000만원을 내주고 데려왔다. 그리고 동시기에 해태의 젊은 마무리투수 [[임창용]]을 무려 간판타자 '''[[양준혁]]'''에 곽채진, 황두성을 얹고 거기에 현금 '''30억'''까지 줘가면서 데려왔다. 그리고 쌍방울의 주축 선수들이었던 불펜투수 [[김현욱(야구)|김현욱]]과 좌타자 [[김기태(1969)|김기태]]를 무려 '''20억'''을 주고 데려왔다. 여기서 끝이 아닌데, 사이드암/언더핸드 투수를 보강하기 위해서 1999년 말 FA 제도가 도입되자마자 해태에서 이강철을 3년 8억 + FA 보상금 + 박충식을 주고서 영입했다. 그리고 당시 최고대우로 9회 우승신화를 일군 '''해태 타이거즈 감독 김응용과 코치진들'''까지 모셔오는 투자를 단행했다. 1997~2000년 4시즌 동안에 삼성이 선수영입에 쓴 돈은 자그마치 '''100억''' 이상이다.~~하지만 정작 바라고 바라던 우승은 2002년 이후에 했다~~ 그리고 이 당시 삼성과 현대가 서로간의 전력 상승을 위해 야구판에 돈X랄을 한 탓에 강한 팀들과 약한 팀들의 전력 양극화가 심해졌고 결론적으로 '''리그 흥행 저하'''의 큰 이유가 되었다.] 여기서 1998 시즌과 1999 시즌을 보냈지만 1998 시즌은 2년전의 그 선수는 어디 갔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범했고, 1999 시즌은 말 그대로 몇경기 못 올라오면서 퇴물이나 다름없던 모습을 보여 1999년 시즌을 마치고 삼성에서 방출되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해태 시절 투수코치로 인연이 있었던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산 베어스]]로 이적했다.~~지금은 킬인식이라 부르지만 사람보는 눈 하나는 타고났다~~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414165949560B2.jpg]] || || (출처 : 포토로) || 현역 마지막을 보낸 [[두산 베어스]] 현역 선수시절. [[두산 베어스]]에서는 예전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팀의 최고참으로 활동하며 [[200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선발 투수로 나와 승리를 거두며 만 36세 6개월로 역대 한국시리즈 최고령 승리투수 신기록을 세우는 등 2001년까지 현역 선수로 뛰며 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기도 했다.[* 당시 김인식 감독에게 재활신 별명을 붙여주게 한 사례 중 하나.] [[파일:JQAOktA.gif]] 이름 가운뎃글자가 [[닭]]을 떠올리게 하는 '계'인데다 '변화구의 마술사', '팔색조', '싸움닭' 등의 별명을 얻은 탓에 팬들 사이에서는 ~~투수코치로 있을 때 투수진이 망가지면~~ 조닭이라고 부르며 대차게 깐다.[* 투구 동작시 다리를 반대쪽 다리 위로 꼬아서 내려오는 게 닭싸움하는 듯한 모습이라 싸움닭이라 하기도 함.] LG에 무척 강해서 [[엘나쌩 클럽]]의 대표 멤버였다. 이렇게 LG에 강했던 조계현이 훗날 [[김기태(1969)|김기태]] 감독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인해 LG 감독 대행이 된 게 아이러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