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식물) (문단 편집) == 한국의 구황작물 ==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조는 쌀의 생산량이 증대한 이후로도 중요한 [[구황작물]]의 역할을 맡았다. 차조는 찰기가 있기 때문에 다른 곡류 없이 이것만 가지고도 밥을 지을 수 있다,[* 이를 강조밥이라고 한다.] 물론 메조도 밥으로 만들 수는 있으나, 찰기도 없고 극도로 까칠해 목으로 넘기기도 힘든 것이 문제이다. 이 때문에 [[화전(농업)|화전]]으로 밭을 일구고 살아가던 화전민들은 메조만으로 밥을 지으면 반드시 잘 넘어가라고 미끌미끌한 [[도토리묵]]이나 [[청포묵]] 등을 곁들여서 먹었다고 한다. [[경상북도]] [[문경시|문경]]의 특산 음식으로 손꼽히는 묵조밥이 이 부류에 속하는데, 쌀밥보다 원가는 훨씬 비싸면서 사람이 먹지 못할 맛과 식감을 내는 관계로 옛날처럼 메조로만 밥을 지어서 내는 음식점은 드문 편이다. 실제로 조밥은 쌀의 비율이 더 높다 한들 조의 비율이 두자리 수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맛이 매우 형편 없어지는데 오직 조로만 지은 밥의 맛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먹기 힘든 음식일 것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RDrU3IHVjo, start=165)]}}}|| || 조로 지은 밥을 먹는 [[백종원]] || 조로 지은 밥이 어찌나 맛이 안좋은지 [[백종원]]은 추사 [[김정희]]의 유배 생활 때 먹었던 조밥을 생된장만 넣고 상추에 싸서 먹어보는데, "할머니들한데는 죄송하지만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짠맛 밖에 나질 않는다"라며 너무 거칠고 껄끄러워서 당시 김정희의 입장에선 절망과 공포가 뒤따르게 했을 맛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김정희 본인조차도 "이게 사람이 먹는 밥상이냐"라며 상당히 당황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일본 제국]]의 계속된 인구증가와 도시화 및 공업화에 따른 농지 감소로 일본에서 쌀 부족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조선의 쌀이 조선인들의 식탁에 오르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공출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 쌀 공급량은 부족해졌으며 그렇기에 당시 조선의 하류층의 주식은 좁쌀밥이었다. 이마저도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공급량이 더욱 적어져 빈민층에서는 나무 껍질을 벗겨 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밥이 주식이 된 당시의 사회상은 일제강점기를 무대로 한 소설에서도 종종 투영되는데, 대표적으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는 "조밥도 못 처먹는 년이 설렁탕은!"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좁쌀은 커녕 [[피(식물)|피]]도 부족해서 [[비지]]를 끓어먹었는데 이조차도 못구하는 빈민층은 나무껍질도 벗겨먹는 일이 허다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