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철 (문단 편집) === 조선시대 ===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이성계에 의하여 건국이 되자, 조선은 초기부터 광물을 채굴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철장은 안동·합천·용궁·산은·무주·영덕·무안·고산 등 17개소가 있었고, 이들 철장은 제련소에서 농한기에 광석을 취련하여 상납하게 하였다. 세종 당시 조선의 철의 산지는 34개소인데 이 가운데 사철을 생산하는 곳이 21개소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철은 크게 생철과 숙철로 나눴다. 생철은 망치로 두드리면 깨져서 주조로 가공하는 쇠, 숙철은 망치로 두들겨서 단조하는 쇠를 말했다. 생철은 무쇠라고도 불렀고, 숙철은 시우쇠라고도 했다. 시우쇠는 연철에서부터 연강까지의 스펙트럼이 포함된다. 조선의 제철법은 서구의 것과 달랐기 때문에 서구의 철 분류법에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조선시대의 철광 제련법은 다음과 같다. 쇠부리가마에 철광석을 넣고 1,200∼1,300℃ 사이에서 장시간 가열하면 묵철 또는 잡쇠 덩어리(선철)가 바닥에 생긴다. 이 덩어리를 다시 강엿쇠둑과 판장쇠둑에서 잘게 부수고 가열한 뒤 다시 두드리면 숙철이 된다. 맨 처음 만들어진 시우쇠를 신철(薪鐵)이라고 하는데, 이 신철 1근을 두드려 정련하면 품질이 열등한 정철 4냥을 얻었다. 이러한 괴련철 위주의 제철술은 고대에서부터 이어진 것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이 때문에 조선시대 전통 제철술을 재현 연구하는 프로젝트에서는 서구의 고대 제철 기술 재현 연구를 참고하기도 하였다.[* 조대연. (2017). 고대 철 제련로의 전개과정 및 철 생산 복원실험에 관한 검토 - 유럽의 사례를 중심으로 -. 숭실사학, 38, 47-76.] 언제 실전되었는지는 기록의 부족으로 불명확하나, 조선 시대에는 고대 한성 백제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초강법이나 관강법은 사용되지 않았고 단조가공을 통해 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기록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우리나라의 대장장이들 사이에서 비밀스레 전해지는 제철법이 있는데 자기도 자세히는 못 들었지만 대강 들은바로는 그것이 중국 옛 기록에 있는 관강법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증할만한 유적이나 유물은 발견된 바가 없다.[* 정해득. (2020). 조선시대 철장(鐵場)의 운영과 제철(製鐵)기술에 대한 문헌적 검토. 한국중세고고학, 7, 79-10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