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중원 (문단 편집) == 상세 == [[파일:external/www.kyosu.net/27220_13619_445.jpg]]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 [[홍영식]]의 집 건물(現 [[헌법재판소]] 일대)에 들어선 제중원. 설립 당시의 명칭은 광혜원이었다. [[파일:external/pressian.wcms.newscloud.or.kr/60100517004935(9).jpg]] 1886년 구리개(現 [[서울특별시]] [[을지로입구역]] 일대)로 이전한 제중원. 1884년 [[갑신정변]] 때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의 인척이자 측근이었던 민영익은 개화파 자객에게 피습당해 13번이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다. 이때 [[묄렌도르프]]가 미국인 선교사 의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을 고종에게 추천했고, 알렌으로부터 서양 의술로 치료받은 민영익은 목숨을 구하고 소생했다. 이에 감복한 고종은 알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비단 옷과 부채, 도자기 등을 선물하였는데, 이 때 알렌은 고종에게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의했다. 당시 근대적 의료기관은 1877년 부산의 제생의원을 시작으로 1883년 원산 생생의원, 인천 일본영 사관부속병원, 서울 일본관의원 등 여러 곳이 세워지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인 환자도 받았지만[* 원산 생생의원 개원 첫해에 1,100여 명의 한국인 환자가 방문했다. 반면 일본인 환자는 300여 명이었다.] 명목상으론 조선 땅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기타 외국인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었다. 그리하여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조선 정부가 세운 서양식 병원 '광혜원'이 설립되었다. 설립 12일 뒤 고종은 이 병원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제중원은 '중생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제중원은 조선 정부가 건물, 운영비, 병원 업무를 보조하는 주사 등의 하드웨어를,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의사, 간호사, 일부 운영비 등의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일종의 합작 병원의 형태로 운영됐다. 1886년 3월 29일에는 16명의 학생으로 '제중원의학당'이 문을 열어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이 시작됐다. 알렌 이후 존 윌리엄 헤론(John William Heron, 1856 ~ 1890), 애니.J. 엘러스(Annie J. Ellers, 1860 ~ 1838), 찰스 캐드월러더 빈턴(Charles Cadwallader Vinton, 1856 ~ 1936)이 뒤를 이어 제중원을 운영했다. 1891년 이후 제중원 운영진과 조선 정부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893년 7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제중원 원장으로 한국으로 파견된 [[올리버 R. 에이비슨]](Oliver R. Avison, 1860 ~ 1956)은 [[북장로회]] 선교부 서울지부를 이끌고 있던 [[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의 운영권을 정부로부터 가져오려고 시도한다. 반년 가까운 교섭과 협상 끝에 [[1894년]] 9월 제중원의 운영권이 조선 정부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이로써 제중원은 왕립(국립) 의료기관에서 사립 선교 의료기관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국내 영향력이 세졌던 정세에서 고종이 왕립 의료기관을 일본에 빼앗기기보다는 미국으로 넘기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고종은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이를 위해 가장 기댔던 것은 미국이었고, 일본도 청나라와의 전쟁을 승리하고 조선을 순조롭게 장악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가 필요했고, 이 때문에 운영권 이관을 묵인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후 제중원을 운영하게 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서울지부는 늘어나는 환자들을 감당할 수 없어 병원 확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러던 차에 1899년 언더우드를 비롯한 미 북장로회 서울지부 선교사들은 미국 [[클리블랜드]]의 부호 세브란스에게 한국의 의료 및 선교 상황을 전달하고 그를 설득하여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왔다. 같은 해에 제중원 의학교가 설립되었고 에비슨이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숭례문]] 앞에 병원을 신축하여 [[1904년]] 완공된 건물로 확장 이전하며 병원 이름을 제중원에서 기부자의 이름을 딴 [[세브란스병원]]으로 바꾸었다. 제중원 의학교 역시 세브란스 의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1905년]]에 고종이 선교회로부터 제중원의 운영권을 회수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제중원의 운영권만 선교회에 넘겼지 소유권 자체는 정부에 있었다는 것. 그러나 제중원 건물은 이후 병원으로 쓰여지지도 않았고 의료인도 모두 없어진 상태이며 현재처럼 제중원 같은 병원 이름의 브랜드에 대한 로열티 같은 것이 있었을 리가 없던 시절에 운영권 회수와 관련된 주장은 최근에 급조된 개념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근대적 자본주의가 도입되기 전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병원의 명칭이 바뀌고, 위치가 바뀌고, 운영자금의 출저가 바뀌었었도, 진료하는 의사가 그대로라면 과거와 같은 병원으로 보는 것이 무방한가? 물론 세브란스병원-제중원간의 연관성에 의문이 제기된다고 해서, 대한의원과 제중원이 연속성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이후 [[1907년]]에는 국립 의료기관 '대한의원'이 설립된다. 세브란스 병원은 우리가 아는 연세대 의료원의 모체이고, 대한의원[* [[이토 히로부미]]의 식민지 의료체계 확립 계획에 따라 [[일본 육군]] 군의총감을 비롯한 일본군의관 관계자들로 구성된 대한의원창립위원회를 통해 광제원과 적십자병원을 통합하여 설립하였다.]은 서울대학교병원의 과거 시설 중의 하나이며 1970년대 이후 제중원이 국립이므로 서울대학교병원 측이 본인이 제중원을 계승했다고 새롭게 주장함으로 인하여, 아래 문단에서 보는 것과 같은 논란이 생기게 된다.[* --이 논란을 이해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국립 이동통신사이자 과거 [[KT]]의 자회사였던 한국이동통신이 민영화되어 [[SKT]]가 되었는데, 이후 [[KT]]가 이동통신 사업에 다시 뛰어들면서 자기들이 가장 오래된 이동통신사라고 주장한다고 생각해보자. 여기서 [[연세대학교 의료원]]를 SKT에, [[서울대학교병원]]를 KT에 비유한 것으로 해석하면 이해하기 쉽다.-- KT로 비유 할수 없는게 매각 후 해체됨 연속성 없음]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과는 한자까지 똑같지만 전혀 관계가 없으며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 이 '광혜원'의 유래는 고려/조선시대에 공무를 보던 관리가 머무는 공공 숙박시설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