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우스 (문단 편집) === 기나긴 통치의 끝 === 기원후 3세기에 [[로마 제국]]이 점점 붕괴되고 [[군인 황제 시대]]가 열리면서 민중들의 종교적인 열망은 늘어나서 제우스의 권위는 로마와 함께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제우스 신앙에 큰 타격을 주었다. AD 100년경, 약 7,000명{{{-2 (Hopkins)}}}[* Keith Hopkins, ''Christian Number and Its Implications'', 204-206.] 내지는 7,500명{{{-2 (Stark)}}}[* Rodney Stark, ''Rise of Christianity: A Sociologist Reconsiders History'', 5-7.]이던 로마제국 내 그리스도교 인구는, 200년경 20만명{{{-2 (Hopkins, Stark)}}}, 250년경 500만명{{{-2 (Hopkins)}}}, 300년대 말 3000만 명{{{-2 (Hopkins)}}}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저력을 보였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이전에는 10년마다 40%씩 그리스도인 수가 증가했던 것으로 추산된다.{{{-2 (Stark)}}} 단, 흔한 통념과 달리 희랍 다신교가 그리스도교의 박해 때문에 몰락한 것은 아니다. 밀라노 칙령 이전부터 교회는 이미 사회의 공적인 역할을 점점 흡수해나가고 있었고, 이 추세를 뒤집지 못했기에 다신교가 몰락한 것에 가깝다. 콘스탄티누스보다 후대에 이 추세를 어떻게든 뒤집어보려 했던 황제 [[율리아누스]]가 다음과 같이 울화통을 터트려야 했을 정도로, 희랍 다신교는 황제의 지원을 받고도 사회적 생명이 더이상 살아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무신론{{{-2 (=그리스도교)}}}이 조장되는 가장 큰 요인은 낯선 이에 대한 (교회의) 인간애와 죽은 이들을 위한 장례 주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무신론자인 갈릴레아 사람들은 자기네의 가난한 이들 외에 우리네의 가난한 이들까지 부양하고 있다. 우리네 가난한 이들에게는 사실 분명 우리들 자신의 보살핌이 모자란 것이다.''' >---- >-율리아누스, 아르사키우스에게 보낸 편지 {{{-2 ''Epistola ad Arsacium''}}} (AD 362) 결국 희랍 다신교는 박해를 받아서 강제로 폐쇄된 게 아니라, 사회의 공공 영역에서 그리스도교에게 패배했기에 사라진 것이다. >눈에 띄는 사건만 보고 제국 전체에서 이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으리라고 판단하는 것은 단편적이다. 그보다는 의례를 통해 공공 영역에 존재하던 고대 종교의 역할이 차츰 작아지며 종국에는 사라졌다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이다. >----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2 ''Διονύσιος Σταθακόπουλος''}}}, 《비잔티움의 역사》{{{-2 ''A Short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최하늘 옮김, 더숲, 2023, 80-81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