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신 (문단 편집) == 폭군이 맞는가? == >子貢曰, "紂之不善, 不如是之甚也. 是以君子惡居下流, 天下之惡皆歸焉." >[[자공]]이 말했다. "[[주왕]]의 선하지 못함이 그렇게까지 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군자]]는 하류에 머무는 것을 싫어하니, 세상의 악한 것들이 모두 (그리로) 몰리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 많은 실정을 주왕 혼자 저질렀겠냐? 멸망할 나라의 대표였으니 걔가 모든 죄과를 몰아서 받은 거겠지'라는 뜻.]" 하지만 [[춘추전국시대]] 당시에도 '''너무 악행들만 달고 다닌다고 쓰여 있어, 그 진위가 매우 의심스럽다'''고 할 정도였다. 제신의 행적에 대해 어느 정도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먼 후대에 [[상나라]] 시대의 갑골문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갑골문에 의하면, [[상나라]]의 군주 제신은 천지신명에 충실하게 제사를 지냈고, 동쪽의 인방[* 人方이라고 쓴다. [[상나라]]에서 方은 방향이라는 뜻도 있지만 복종하지 않는 나라를 뜻하기도 하므로 여기서 인방은 나라 이름이다. 사람 인(人)이 두 사람이 기대는 모습이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 한 사람의 옆 모습을 본뜬 글자이고 오랑캐 이(夷)와 뿌리가 같은 말이다. 그래서 [[동이]]의 원래 뜻이 바로 인방이다.]을 평정해 오히려 [[상나라]]의 국세는 왕성했다고 한다. 이는 제신이 제사를 게을리하고 국정은 내팽개친 채 주지육림에 빠져 지냈다는 《사기》의 기록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방탕과 사치의 상징인 주지육림도 제사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게다가 갑골문에 의하면 상나라 시대의 전통적인 제사 방법인 [[인신공양]]이 제신의 치세에 접어들자 이전에 비해 빈도가 줄어들어든 편이다.[* 인신공양과 순장 등은 이후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 때도 여전히 횡행했다.] 이를 미루어 본다면 방탕하고 난폭한 인물이라는 기록은 왜곡된 기록일 개연성이 크다. 제신이 제사를 충실하게 지내는 것을, 서주의 문왕 희창과 무왕 희발이 왜곡시켜서 술 연못과 고기 숲을 만들었다고 소문낸 것은 이전 왕조의 마지막 왕을 깎아내리고, 신 왕조를 개창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한 제신이 사치하고 방탕했다는 기록은, 제신 개인에게 힘이 집중되었던(즉 왕권이 강화되었던)[* [[상나라]]의 구조는 왕으로 대표되는 상족과 점복을 도와주는 정인 및 복인으로 대표되는 지방 세력이 연합한 구조였다. 초기에는 이들 간의 힘의 차이가 별로 없었으나 후기에 들어 권력 승계 구조가 형제 상속에서 적장자 상속으로 옮겨지자(힘이 집중되기에 용이함) 왕은 제사를 지낼 때 신의 뜻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더불어 당시의 가치관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했고, 이러한 추세는 주공 단의 천명사상으로 완성되어 현대까지의 중국 역사의 큰 틀로 자리잡았다.] 상황에 대한 소국들의 불만이 표출된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상나라]]의 초기에는 형제나 숙부 등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부자 상속이 네 번에 걸쳐 연달아 나타나는 등 자성의 왕권이 안정된 모습을 보였고, 제신은 아예 서자인 이복형도 끌어내리고 부자 계승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적장자 계승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전근대 시절만 하더라도 왕국에서 왕권이 강하고 중앙집권적일수록 국력도 강한 게 일반적이었다. 즉 왕권이 굳건하다는 것은 상나라가 초기의 소국 연합 체제에서 한 일족을 중심으로 한 중앙국가라는 안정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상나라]]에 권력이 집중되자 자연스레 주변국의 힘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대한 불만이 [[주지육림]] 등의 설화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갑골문을 연구한 학자들은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패권이 넘어간 [[역성혁명]]의 실체는 주왕이 폭정을 해서가 아니라 [[상나라]]가 [[황하]] 유역 동쪽에 위치한 [[동이]]라고 불렀던 이민족을 상대로 동진 정책을 펴는 사이에 서쪽에 있었던 강력한 제후인 [[주나라]]가 상나라를 기습했고, 그걸 막아내지 못한 상나라가 멸망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서쪽에 있는 주나라 입장에서는 상나라도 동이로 취급되었지만.] 서주 무왕의 입성 당시 상나라 사람인 [[백이와 숙제]]가 이탈하는 등, 이 기습 공격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여론이 형성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하늘의 뜻에 따라 폭군을 주살했다는 식으로 정당화한 내용이 《사기》에 나온 왜곡된 기록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천명사상''' 자체가 상주혁명 성공 이후에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상당하다. 이에 따르면 상주혁명은 새로운 중앙권력에 맞는 체제를 위해 제신과 달기가 희생되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상나라]]는 여타 부족과의 혼인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힘을 얻어 나갔지만, 일정 이상으로 왕권이 커지려면 오히려 이들을 배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태고(太古)의 [[상나라]] 시대의 체제로는 그것이 힘들었고, 이것이 설화상의 긴장 관계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 불균형이 [[상나라]]의 부족신인 '''제'''(帝)를 넘어 보다 보편적인 천명론을 들고 나온 [[주나라]]에 의해 해소되는데, 이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이 제신, 그리고 왕권 강화를 제약하던 주변 세력의 상징으로서 달기였다는 것이다. 거기다 제신이 자제를 하게 했다고 한들, [[상나라]]의 인신공양 항목을 보면 알다시피 상나라는 기본적인 인습 자체가 너무 잔인했고 주변에게 큰 민폐라서 원한이 철철 넘쳐흘렀다. 이 왜곡은 상나라라는 나라 자체에게 가지고 있었던 주변국들의 증오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상나라]]는 주변 민족을 앞서가는 첨단 문물의 상징인 [[청동기]]를 앞세워 허구한 날 주변을 족쳐가며 대대적인 인신공양과 식인을 저지른 나라였다. 제신이 저질렀다고 《사기》에 기록된 만행들도 사실 상나라에서 공포를 주기 위해 꽤 많이 행하던 것들이었으며, 거기다 저 만행들은 [[춘추전국시대]]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난 일들이었다. 애초에 상나라의 주특기가 전쟁과 제사였는데, 이 둘이 연결되다 보니 인신공양이 성행할 수 밖에 없었다. [[상나라]]가 유달리 심했다는 거지, [[주나라]]도 잔혹성을 줄였지만 여전히 잘만 행했고, [[춘추전국시대]] 당시 온갖 나라들이 태연히 인신공양과 식인, 순장을 행했다. 이 풍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은 '''인'''(仁)을 내세운 [[제자백가]]의 [[유가(제자백가)|유가]] 발흥 이후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애초에 고대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딱히 제신 개인이 특출나게 악한 왕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습 자체가 [[아즈텍 제국]]만큼은 아니었을지언정 오만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산제물로 바치고 죽여댔으니, 제신 본인이 온건했다고 한들 주변국들이 상나라에 대해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원한이 사라질 턱은 없었다. [* 한자 [[피 혈]], [[백성 민]], [[고을 현]], [[붉을 적]]이 갑골문에서 발견된, 인신공양 및 처형과 관련깊은 잔혹한 유래를 가진 한자로 이런 문자가 자주 쓰였다는 것부터 상나라의 인습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사기》에 기록된 제신의 일화들은 제신 개인의 악행이라기보다는 [[상나라]]가 다른 나라의 포로들에게 벌인 잔혹한 행위에 대한 이야기들이 축적되어 [[주나라]]의 프로파간다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정리해보자면 비록 제신이 《사기》 등의 문헌에 보이는 것처럼 세기말 폭군 수준은 아니었더라도, 결국 상나라가 본래부터 가진 문제점인 [[인신공양]]을 비롯한 특유의 잔혹한 문화와 정책이 상의 멸망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이건 상나라라는 국가 체제의 문제가 [[주나라]]로 인한 멸망을 불러들였다고 보는 게 옳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