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네시스(밴드) (문단 편집) === 갈등과 피터 가브리엘의 탈퇴 === 1971년부터 제네시스의 초기 명반인 "Nursery Cryme"(1971), "[[Foxtrot]]"(1972), "[[Selling England by the Pound]]"(1973),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1974) 등을 통해서 그들은 대중성과 음악성 양쪽으로 수준급 밴드가 되었고, [[핑크 플로이드]], [[예스(밴드)|예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제쓰로 툴]] 등과 함께 당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중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멤버들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구성원 모두가 뛰어난 작사/작곡 능력을 갖고 있는 뮤지션에다가 테크닉도 충만한 실력파인 가운데 작사를 도맡아서 하고 라이브에서도 가사와 어울리는 분장을 한 채 노래를 부르는 [[피터 가브리엘]]이 혼자 주목받는 현상이 심해져 갔고, 그 때문에 다른 멤버들은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1974년에 발매된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에 이르러서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피터 가브리엘이 제네시스 활동 시절 [[로저 워터스]] 수준의 독재자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피터 가브리엘의 입김이 가장 많이 들어갔다는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앨범 역시 작사만 피터 가브리엘이 혼자서 딤당했고 작곡은 다른 멤버들과 같이 했다. 이 때문에 40년째 서로 으르렁거리는 길모어-워터스의 관계와 달리, 필 콜린스와 피터 가브리엘은 1980년대 초에 일찍 화해하고 서로의 앨범에 레코딩으로 참여하기도 했을 정도로 친해졌다.] 결국, 이 앨범이 발매되고 투어를 돈 후 피터 가브리엘은 1975년에 밴드를 탈퇴한다. 이것도 사실 탈퇴 통보는 1974년 브로드웨이 앨범 투어 이전에 멤버들에게 했지만, 투어에 영향을 미칠까봐 이를 대중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족하고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려는[* 당시 가브리엘의 아내가 막 첫째를 출산한 상태라 더욱 그러하였다.] 가브리엘과 밴드가 우선이라고 보았던[* 이 때문인지 1980년 필 콜린스는 아내와 파경을 맞이하고 이혼하게 되는 비극을 겪게 된다. 이때 나온 곡이 필 콜린스 최고의 명곡이라 불리는 In the Air Tonight이다.] 콜린스 사이의 의견 불일치가 낳은 결과였다. 또한 음악성과 대중성 부분에서 [[피터 가브리엘]]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제네시스가 [[보스턴(밴드)|보스턴]]과 같은 상업적인 요소를 받아들인 프로그레시브 록밴드가 되기를 바란 반면, 피터 가브리엘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술적인 면모가 강한 음악을 하고 싶어했는데 이런 음악에 대한 관점 차이도 피터 가브리엘이 탈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실제로 피터 가브리엘이 탈퇴한 이후 제네시스는 [[필 콜린스]]의 주도로 상업화 노선을 걷게 된다.[* 다만 [[피터 가브리엘]]도 [[필 콜린스]]가 솔로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1980년대 중후반 대중적인 팝 음악의 영향력을 받아들였고, 이 과정에서 나온 앨범이 그 유명한 [[So]]이다.][* 피터 가브리엘은 이때 느낀 감정들을 담아서 2년간의 휴식 기간 이후 1977년에 "[[Solsbury Hill]]"이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