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탄 (문단 편집) === [[제갈탄의 난]]과 최후 === 전에 친하게 지내던 하후현, 등양 등이 조상과 가까운 사이라 이들을 제거한 사마씨 일족을 늘 두려워한 나머지 양주 일대에서 민심을 모으며 근거를 확보하려 했으며,[* 제갈탄은 하후현과 친했을 뿐 아니라 비슷한 경우의 왕릉이나 관구검이 죽임을 당했다는 점에서 불안해했다. 그 때문에 재물을 풀어 민심을 얻고, 일가나 양주의 협객 수천명을 먹이며 자신을 지키게 했다.] 이 낌새를 눈치챈 사마소는 후환을 제거할 생각으로 심복 [[가충]]을 파견해 소환령을 전했다. 세어에 따르면 사마소가 이미 조정을 장악했을 무렵, 장사 가충은 이로써 참좌를 마땅히 보내어 사정장군들을 위로해야 한다 하였는데, 사마소는 이를 올바르게 여겨서 가충을 수춘으로 보냈다. 가충은 돌아와 사마소에게 말하길 "제갈탄이 양주에 주둔하여, 위명이 있으니, 백성들은 제갈탄에게 의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소환한다면, 필히 돌아오지 않고, 반란을 미숙하게 일으켜 화가 적을테지만 불러오지 않는다면 반란이 지체되어 화가 더욱 클 것입니다." 가충의 조언을 들은 사마소는 제갈탄을 [[사공]]으로 삼았다. 제갈탄전에 인용된 《위말전》에 따르면 가충이 선양 얘기로 제갈탄을 떠보자 제갈탄은 얼굴색을 바꾸고 "경은 가예주([[가규]])의 아들이 아니오? 위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나라를 저버리고 황실을 다른 사람에 줄 수 있겠소? 듣고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위 황실에 목숨을 바치겠소."라고 대답했다. 가충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257년 5월, 조정에서 제갈탄에게 사공 직책을 준다고 불렀으나 두려움을 느낀 그는 [[사마소]]에 대항해 [[제갈탄의 난|반란을 일으키는데]], 양주자사 [[악침]]을 급습해 죽이고 수춘에 주둔하며, [[제갈정]]과 부하인 장사 [[오강]]을 [[손오|오]]로 보내 지원을 요청하게 했다. 제갈탄은 회남과 회북에서 둔전하고 있던 십수만의 병사와 [[양주(중국)|양주]]에서 새로 4~5만의 정병을 모으고 1년분의 식량을 비축한 후 성문을 닫고 수비에 임했다. 위군이 수춘을 포위하자 수차례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으나 무위로 돌아갔으며, 오의 원군도 패배하자 해를 넘겨 제갈탄과 문흠의 포위망 공격도 실패했다. 포위망이 지속되고 군량이 바닥을 드러내자 투항자가 속출했고, 문흠과 향후의 전략에 대해 의견 차이가 생기자 결국 [[팀킬|문흠까지 죽였다.]][* 정사에 따르면 문흠이 양주자사로 있던 시절부터 서로 사이가 나빴다.] 그 때문에 [[문앙]], [[문호#s-2]] 형제까지 위군에 투항했고 사마소는 이를 이용해 그들에게 벼슬을 준 뒤 수십기를 이끌고 성 주변을 돌면서 심리전을 펴게 했다. 제갈탄 측의 사기는 이를 계기로 급락해 기회를 틈탄 위군이 맹공을 퍼부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제갈탄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싸웠으나 이내 [[호분#s-1]]이 이끄는 군세에 궤멸당하면서 전사했다. 제갈탄의 삼족은 [[멸족]]당했으며 참수된 머리는 낙양에 보내졌다. 오로 건너간 아들 [[제갈정]]은 그대로 눌러앉아 오가 망할 때까지 장수로 지냈으나 [[서진]] 건국 이후 훗날 [[오멸망전|오까지 진에게 멸망당하자]](...) [[사마염]]은 제갈정을 불러 [[시중]]에 임명하려 했으나, 제갈정은 끝내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서 여생을 마쳤다.[* 낭야왕 [[사마주]]의 아들 동안왕 [[사마요]]는 제갈탄의 외손자였는데, 혜제 때 문앙을 역적으로 몰아 멸족시켜 외할아버지 제갈탄, 외삼촌 제갈정, 그리고 백부 [[사마사]]를 간접적으로 죽인 원수를 갚았다. 사마주의 [[장손]], 즉 자신의 외증손자인 [[원제(동진)|사마예]]가 나중에 [[동진]]을 건국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