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 (문단 편집) == 사상 == 제갈량의 사상에 대해서 [[유가(제자백가)|유가]]라든가 [[법가]]라든가 하는 등의 다양한 평론이 현대에 많이 있는데, 제갈량이 [[제자백가]]를 논한 글은 제갈량집의 집본에 남아있어서 제자백가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이는 제갈량 본인이 제자백가를 보는 관점이고, 현대인이 제갈량의 사상을 평가하는 관점은 이와 다를 수 있다. >[[노자#s-2|노]]는 양생에는 뛰어났으나 위험과 재난에 대처하지 못했다. [[상앙]]은 법치에 능했으나 백성을 교화하지 못했다. [[소진(전국시대)|소진]]과 [[장의]]는 말재간이 뛰어났으나 쌍방이 동맹을 맺도록 하지 못했다. [[백기(전국시대)|백기]]는 성을 치고 점령하는데는 능했으나 대중을 너그럽게 포섭하지 못했다. [[오자서]]는 적을 막는 계책을 꾸미는 데는 뛰어났지만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 못했다. [[미생#s-2]]은 신용을 지켰으나 변화에 부응할 줄 몰랐다. [[왕가]]는 성군을 받들어 모시는 데는 능했으나 어리석은 황제를 위해 처사할 줄은 몰랐다. [[허자]]는 명망 있는 인사들의 우열을 평가하는데는 능했으나 인재를 양성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사람들의 좋은 점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여명협 교수는 저서 《제갈량 평전》에서 이글, 「논제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제갈량이 지은 글인) 「논제자」는 선진 시대 대표적 학문이었던 유가와 묵가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순자』의 「해폐편(解蔽篇)」은 유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나 묵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다. 제갈량이 유가와 묵가에 대해 논평하지 않은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여기서 그의 사상적 경향이 드러난다. 그는 시와 예를 중시하는 가정에서 자라나 배우기 시작하면서 형주의 많은 명유 석학에게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가 유학을 숭상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묵가의 절용(節用)과 절장(節葬) 및 과학기술에 대한 중시 경향도 제갈량이 높이 쳤다. 이처럼 그가 유가와 묵가를 학문의 으뜸으로 쳤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논평을 하지 않은 듯하다. > >...........제갈량은 유학을 으뜸으로 삼았지만, [[공자]] · [[맹자]] · [[순자]] 중 그 사상은 뚜렷이 순자에 기울었다. 「논제자」 중 직접 『순자』의 「해폐편」을 본받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순자』「군도편君道篇」에서는, "몸을 닦으면 나라가 다스려진다"고 했는데, 제갈량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몸을 닦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또 『순자』 「성상편成相篇」에는, "다스림의 핵심은 예와 형이다"라고 했는데, 제갈량 역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덕과 형벌을 동시에 중시했다. 『순자』 「왕제편王制篇」에는, "칭찬과 상으로써 힘쓰도록 하고, 형벌로써 징계한다"고 했는데, 제갈량은 상벌을 엄격하고 밝게 할 것을 강조했다. 주지하다시피 순자는 유가학파 중에서도 가장 법가에 접근한 사상가다. 이 때문에 그의 제자 한비와 이사는 모두 법가의 대표적 사상가가 되었다. 제갈량 역시 법치를 숭상했으니 학술사상 방면에서의 사승관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 >여명협, 《제갈량 평전》, 600p 이렇듯, 여명협 교수는 저서를 통해 제갈량의 「논제자」가 『순자』 「해폐편」에서 탈태한 것임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그 방향에 차이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가려들어야 한다. 윗글에서도 유가와 묵가에 대해 논평하지 않은 것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는데, 그 근거로 많은 명유 석학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굳이 유가에 대해 논평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으나 묵가까지 도매금으로 묶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현대 중국 학자들은 고대 중국 학문 가운데에서 과학과 논리의 흔적이 뚜렷한 명가나 묵가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며 순자도 비슷한 이치로 좋아한다. 순자가 분명 공맹순 중에서는 가장 논리적이고 법가에 기울어져 있는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묵가랑 친한 것도 아니다. 제갈량이 묵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마치 유가를 언급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의미로 묵가를 선호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중국 학자들은 종종 주장하는 바를 세우기 위해서 올바른 근거를 생략하거나 납득이 어려울 정도로 박약한 채로 내버려두고 진행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또한 인용문뿐만이 아니라, 책 전체를 봤을 때 제갈량이 과학기술에 관심이 있고 공학적인 발명품을 중시했는데, 그것은 묵가의 성과이니 묵가와 통한다는 것은 이 인용문만 보는 것보다야 좀 근거가 강해지긴 하지만 여전히 근거가 강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고대의 과학과 기술에 관한 종류의 담론과 연결되기 때문에 길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간단히 말하자면 묵가와 순자가 제자백가 가운데 과학과 논리의 흔적이 뚜렷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고작해야 제자백가 가운데에서 그랬던 것에 불과하며, 중국의 이런 경향은 한국으로 비교하자면 조선의 실학 등을 그 실제보다 확연히 과대평가하는 풍조와 비슷하다. 또한 유가라고 해서 공학과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아예 무관심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이것 역시 조선의 주류 담론을 깎아내리고 양명학, 실학 등을 과대평가하는 흐름과 비슷하다. 전국시대 이후 중국의 발명가들이 모조리 다 유가형 인물이 아니라 묵가나 순자형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병기를 고안하거나 화약무기에 관련된 책을 쓴 이후의 장수, 학자들이 모조리 다 묵가인이 된다고 하기 어려운데 갑자기 묵가니 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물론 순자를 직접 인용한 듯한 한 구절이 있으니 이후의 학자들에 비해 순자를 중시했다고 하면 맞는 말이다. 실제로 순자는 후대인들의 평가에 따라서 위상의 부침이 심한 학자기도 하고. 그러나 묵가까지 나가는 것은 지나친 넘겨짚기다. 제갈량이 정말 묵가 등을 배웠다면 사마휘에게 배웠을 것인데 진시황 이후로 명맥이 끊겼다는 묵가까지 통달했을 정도로 수경선생의 학식이 그렇게 넓고 깊고 훌륭했단 말인가? 묵가의 경전은 전문적인 현대의 학자들이 현대의 방법론을 적용해서 해석, 연구해 보려고 해도 그들의 책이 너무 난해하다고 난리인데 특별한 학통에 대해 별다른 언급도 없는 수경선생은 혼자서 그 어려운 묵가를 훌륭히 습득했단 말인가? 난리통에 형주까지 오면서 묵가의 책을 포함해서 수많은 책들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왔단 말인가? 또한 출세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말 출세와는 상관없고 쓸데없이 고전의 전승만을 위하는 고리타분한 먹물 냄새 나는 학문을-그래서인지 잊혀져 있다가 고증학의 청나라 때나 재평가되는 묵가를- 가르치고 제갈량은 난세에 그걸 또 배웠단 말인가? 그렇다면 제갈량의 다른 동문들도 배웠을 것인데 왜 다른 동문들에게서는 묵가의 풍조가 나타나지 않는가? 사마휘가 수제자라고 생각한 제갈량에게만 묵가를 가르쳤단 말인가?] >夫君子之行, 靜以修身, 儉以養德. >부군자지행, 정이수신, 검이양덕. >무릇 군자는 행함에 지조가 있어야 하나니, 욕심 없는 평온한 마음으로 몸을 닦아야 하고, 근검과 절약으로 인품과 덕성을 길러야 한다. >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 >비담박무이명지, 비녕정무이치원. >담박하지 않은 마음으로는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밝힐 수 없고, 바깥 것에 흔들리는 마음으로는 원대한 목표에 이를 수 없다. > >夫學須靜也, 才須學也, 非學無以廣才, 非志無以成學. >부학수정야, 재수학야, 비학무이광재, 비지무이성학. >배울 때는 고요한 마음을 유지해야 배울 수 있는데, 배움 없이 재능을 키울 수 없고, 뜻한 바 없이 이뤄지는 배움도 없다. > >慆慢則不能勵精, 險躁則不能冶性. >도만즉불능여정, 험조즉불능야성. >거리끼는 것이 없고 게을러서는 정신을 진작할 수 없고, 조급하고 위험스러워서는 마음을 기르고 닦을 수 없다. > >年與時馳, 意與日去, 遂成枯落, 多不接世, 悲守窮廬, 將復何及! >연여시치, 의여일거, 수성고락, 다부접세, 비수궁려, 장부하급! >세월은 시간 따라 나는 듯이 달려가고, 의지도 세월 따라 흘러가는데, 시들어 지고 말면 세상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한 채, 슬프게 부서진 집이나 지키고 있게 될 테니, 그때 가서 후회와 원망을 어찌 감당하겠느냐! >---- >《계자서》(誡子書) 한편《무후사, 그 안에서 본 삼국지》(신아사, 2017)의 50번째 챕터와《제갈량 평전》은 제갈량의 계자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여명협 교수에 따르면 '''담박'''과 '''영정'''이라는 어휘는 비록 단어는 달라도 고요함을 위주로 하는 [[도교]] 사상과 같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만물을 고요히 관찰하며, 고요한 마음으로 생각해 냉정하게 처세하는 마음의 자세'''를 반영했다는 청정무위의 수신원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 무후사의 제갈량 사당이자 정전인 정원당(靜遠堂) 대들보에는 '''담박명지 영정치원'''(澹泊明志 寧靜致遠)이라고 새겨져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