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근 (문단 편집) == 가족 관계 == [[제갈씨|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두 여동생]]과, 남동생 [[제갈량]]과 [[제갈균]][* 손권이 [[제갈량]]은 제갈근의 [[동복형제]]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제갈근이 어려서 모친을 잃고 계모를 모셨다는 기록과 제갈량이 제갈근의 [[동복형제]]라고 특기한 점을 보면, 제갈균은 계모에게서 태어난 [[이복형제]]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제갈량과 제갈균의 모친이 '장씨'로 같은 사람으로 정리되어 있다. 연의와는 달리 실제로는 둘째 형인 제갈량을 따라 유비에게 사관하며 오늘날의 경찰총장이라 할 수 있는 장수교위가 된다.]이 있다. 공적인 자리에선 제갈량을 사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집안끼리 연락을 터놓고 살았고, 나중에는 자식을 일찍 보지 못한 제갈량에게 둘째 아들인 [[제갈교]]를 양자로 보내기도 했다. 제갈근은 동생 제갈량보다 7살 연상이었는데, 234년에 사망한 제갈량보다 7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 제갈량이 요절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제갈량은 과로로 사망한 인물치고는 54세까지 살았다. 제갈근이 오래 산 것이다. ~~특히 오나라 기준이면 더더욱~~] 제갈근은 아들 [[제갈각]]이 지나치게 재주를 드러내는 것을 두고 '저대로 두면 장차 집안을 망치고 말 것이다' 라 염려했는데 이는 훗날 그대로 맞아 떨어져 [[한당]], [[보즐]]처럼 [[호부견자]] 케이스를 타고 말았다. 그나마 제갈각은 능력이라도 있어서 저 둘보다는 낫긴 하다만. 제갈근 사후 제갈각은 손권이 죽은 후에 정권을 장악했지만 잦은 실정으로 민심을 잃고 [[손준]]에게 주살되었다. 그리고 제갈각의 삼족이 멸족되고,[* 제갈각의 장남 제갈작은 [[이궁지쟁|손권의 후계 문제]]에 말려들어 질책을 받은 제갈각이 직접 독살했고, 차남 제갈송은 약을 먹고 자살했으며, 막내 아들 제갈건은 모친과 위나라로 달아나다가 잡혀 살해당했다.] 제갈근의 막내 아들 [[제갈융]]은 약을 먹고 자살했으며, 그 세 아들도 주살되자 제갈근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그러나 이전에 자식이 없던 제갈량이 제갈근의 차남 제갈교를 양자로 데리고 갔는데 제갈교는 [[요절]]했지만 외아들 [[제갈반]]을 남겼다.[* 다만 제갈반은 오나라로 돌아온 이후 요절하고 말았다(...). 다행히 아들이 있어서 후손은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결국 손준이 병사하고 뒤를 이은 [[손침]]이 주살되자 오나라로 돌아와서 제갈근의 대를 이었다. 제갈량의 후사는 늦둥이 적자인 [[제갈첨]]이 이었다. 보통 제갈각에 대한 우려가 단지 성격만 보고 판단한 것처럼 보여지지만 제갈각의 행보를 가까이에서 본 제갈근의 통찰력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제갈각의 행보를 보면 제갈근의 우려대로 정확히 진행되고 맞아떨어졌음을 보아 괜히 제갈량의 형이 아님을 파악가능하다. 다만 그런 통찰력이 무색한 면은 있는 것이, 제갈근이 맏아들 제갈각을 항상 근심하여 "가문을 지키지 못할 가주다."라고 말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멀리는 조사 부부와 인상여가 함께 조사의 아들 조괄의 임용을 반대한 일이나 가까이는 같은 시대의 왕경의 어머니가 왕경에게 군수에서 멈출 수 있어야 한다며 말린 일처럼 제갈각을 말리거나 손권에게 제갈각을 쓰지 말라고 진언했다는 기록은 없다. 조괄과 조효성왕이 그랬고 왕경이 그랬듯, 본인이 안 들으면, 군주가 안 들으면 어쩔 수 없다는 한계는 있지만, 제갈근은 그런 시도조차도 안 했던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전해지는 일화로는 제갈근은 부인이 죽은 다음에 새 부인을 들이지 않았고 첩의 아들을 관직에 추천하지 않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