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각 (문단 편집) == 평가 == >__제갈각의 재능과 기질, 재간과 모략은 나라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만했지만 교만하고 인색하였다.__ [[주공]](周公)이었을지라도 이룬 것이 없었을 텐데 하물며 제갈각에 있어서랴? 제갈각은 자신을 과장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능멸했으니 실패가 없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가 [[육손]]이나 동생 제갈융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술한 것을 직접 실행했다면 회한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더욱이 재앙이 있었겠는가? >---- >『오서』 「제갈각전」 말미에 기술된 진수의 평가. >손권은 오왕이 되자 처음으로 [[절도사|절도]](節度)라는 관직을 두어 군량미를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한나라|한왕조]]의 제도에는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시중이며 편장군이었던 [[서상]](徐詳)을 이 직책에 임용했었고, 서상이 죽자 제갈각을 대신 임명했다. [[제갈량]]은 제갈각이 서상의 뒤를 잇는다고 전해 듣게 되자,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__"우리 형(제갈근)은 연로하고, 그의 아들인 제갈각은 거친 성격을 갖고 있는데, 오늘 그에게 식량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식량은 군사적인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먼 곳에 있지만, 사사로이 불안을 느낍니다. 당신이 특별히 폐하께 알려 그의 임무를 바꾸도록 하십시오."__ 육손이 손권에게 아뢰자, 즉시 제갈각에게 병사를 지휘하는 관직으로 바꾸도록 했다. >---- >『강표전』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恪)은 비록 일이 잘못되어 적신(賊臣)에게 살해를 당했으나, __그 역시 나라를 위한 마음은 제갈첨(諸葛瞻 제갈량(諸葛亮)의 아들)의 부자와 더불어 거센 물결 속에 꿋꿋이 서 있는 지주(砥柱) 같았다.__ 어찌 집안에서 이런 충성과 절개가 이처럼 한꺼번에 났을까? 추측컨대, 그 부조(父祖)들의 교양에 따라 그렇게 되었던 것인 듯하다. 탄복할 만하고 공경할 만하다. >---- >[[이익(실학자)|이익]]의 『경사문』 >제갈근의 아들 각(恪)은 자가 원손(元遜)인데, 젊어서부터 재명(才名)이 있고, 임기응변하는 변론이 있었으므로 그와 더불어 상대할 자가 없었다. 손권이 그를 기특히 여겨, "'남전(藍田)에서 옥이 난다.'는 말은 참으로 빈말이 아니다." 하였다. 손권이 일을 가지고 각을 시험해 보려고 절도(節度)를 지키고 양곡을 맡도록 하였다. 그러자 제갈량이 육손(陸遜)에게 서신을 보내기를, "가형(家兄)은 연로하고 각은 성질이 소활하거늘 지금 양곡을 주관하였는데 양곡은 군사의 가장 중요한 것이라, 나는 불안하기 그지 없으니, 지존(至尊)에게 아뢰어 전직시켜 주시오" 하였는데, 육손은 손권에게 사뢰어 즉시 전직시켰다. __제갈량은 평생 근신하고 제갈각은 재주는 많으나 소활하기 때문에 이처럼 염려하였던 것이다.__ > >제갈각은 재기(才氣)가 남보다 뛰어났다. 식도(識度)와 아량(雅量)은 비록 제갈량만 못했으나 무슨 일이든 제갈공명을 사모하고 본받았다. 제갈공명이 유조(遺詔)를 받았는데 제갈각도 유조를 받았고, 제갈공명이 위 나라를 쳤는데 제갈각도 위 나라를 쳤고, 제갈공명이 [[마속]]을 베었은즉 제갈각도 호항과 [[손홍]]을 베었고, 제갈공명이 [[이엄]]을 꾸짖었은즉 제갈각도 [[주이]]와 손묵을 꾸짖었다. __자취만 따라서 본받는 것은 족히 화를 취하는 길이 될 뿐이다.__ > >제갈각이 [[산월]](山越)을 평정한 일은 제갈공명이 [[맹획]](孟獲)을 사로잡은 일에 밑돌지 않고, 그 [[회남]](淮南)의 승전은 기산(祈山)의 승첩보다 빛났다. 그리고 뒤에 군사를 정돈하고 성을 굳게 지키다가 역질(疫疾) 때문에 후퇴하였는데, 비록 손실은 있었으나 역시 제갈공명이 겪은 사곡(斜谷)의 패배 정도는 아니었다. > >그러나 공명(功名)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몸이 화를 면치 못한 것이 제갈량과 더불어 천양지차가 있었던 것은, __제갈량은 신밀(愼密)[* 신중(愼重)하고 면밀(綿密)함.]하고 제갈각은 우소(迂疏)[* 세상(世上) 물정(物情)에 어둡고 민첩(敏捷)하지 못함.]하였으며, 제갈량은 침정(沈靜)하고[* 성정이 차분히 가라앉고 조용함] 제갈각은 조동(躁動)[* 경거망동함.]하였으며, 제갈량은 겸손하고 제갈각은 거만하였으며, 제갈량은 엄격함과 용서를 병행하였는데 제갈각은 엄격과 각박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__ >---- >[[안정복]]의 『상헌수필』 >[[사마사|사마대장군]]은 두 번 패한 것을 끌어다가 자신의 허물로 여겨서 허물은 소멸되고 업적은 융성하게 되었으니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 __만약 이에 실패를 꺼리고 허물을 밀어내며 많은 사람에게 잘못을 돌리고 항상 공로만을 쥐고 실패한 것을 감추려 했다면 윗사람이 아랫 사람의 마음이 흐트러지고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니 아주 잘못 되었을 것이다.__ 군주가 된 사람이 만약 이 이치를 장악하여 국가를 다스린다면 실수를 행하였으나 이름을 드날릴 것이며 군사에서는 좌절하였다고 하나 싸워서는 이길 것이니 비록 백번 패해도 괜찮은데 하물며 두 번인 경우에야 어떻겠는가! >---- >[[습착치]]의 『한진춘추』[* 내용 자체는 사마사의 현명한 모습을 찬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해당 평에서 제갈각에 대한 부분은 1%조차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동흥제 전투의 패배에 대한 사마사의 대처가 합비신성 전투의 패배에 대한 제갈각의 대처와 정반대인 데다가 습착치가 사마사가 삼갔기에 성공한 행동들을 묘사하는데 묘하게 제갈각의 행보에 딱 들어맞는만큼 기재한다.] 잠시 대권을 주도한 [[오나라]]의 [[권신]]으로 순수한 능력만을 비교한다면 '''[[삼국시대]] 네임드의 2세들 중 손꼽히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 [[제갈근]]과 숙부 [[제갈량]]이 크게 경계했던 그의 '''오만한 성품'''은 제갈각의 성공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여전했던 탓에 권력을 잡은 지 1년도 안 돼서 [[손준]]에게 암살당하고 가문을 [[개발살]]내는 데 일조한다. 만약에 성품도 뛰어나거나 그나마 평범했으면 어땠을까 간혹 상상하게 만드는 인물. 능력적인 부분은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역사가)|진수]]조차 인정했지만, [[안하무인]]의 성격은 대차게 깠다.[* 진수는 유능해도 성격적 결함이 있으면 반드시 깠다. [[관우]], [[장비]], [[반장(삼국지)|반장]], [[위연]], [[곽가]]처럼 유능하지만 성격적으로 두드러진 단점이 있는 인물들도 "유능한 건 맞는데 성격이 영 아니야."라는 평을 남긴 건 유명하다. 반면에 [[유비]]와 [[제갈량]], [[황충]], [[조운]], [[방통]] 같이 능력과 인품 모두 갖춘 인물은 후하게 평가해줬다.] 죽었을 무렵 제갈각은 [[이궁지쟁|막장스러운 오나라의 정치판]]을 헤치고 나간 원숙한 기량을 자랑하는 [[정치인]]이었으며, 비슷한 시기 수차례 대결했던 [[위(삼국시대)|위나라]]의 [[사마사]]에 비해 넘사벽으로 오랫동안 군사적 경험을 쌓은 지휘관이었다.[* 사마사는 절륜한 정치력에 비해 군사적 업적은 상당히 초라하다.] 어려서는 여러 일화를 낳고, 젊어서부터 미친 듯한 활약의 향연을 선보였으며 대권을 잡은 이후에는 [[동흥제 전투]]에서 유망주급 기대를 부응하다 못해 훨씬 뛰어넘는 미친 듯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년도 안 돼서 대군을 일으켰다가 [[합비 전투(253년)|합비에 꼴아박고]] 반성없이 [[폭주]]해서 주살당한다.(...) 이로써 '''제갈각은 본인의 평가는 물론 [[오(삼국시대)|오]]의 미래 또한 크게 망쳤다.''' 이런 결말로 인해 [[호부견자]] 중 한 명으로 취급당하지만 능력만큼은 한없이 뛰어났음에도 성품 때문에 모든 것을 망쳤다는 점에서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한다. 즉, 성품 때문에 큰 뜻을 펴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기보다는 '''성품 때문에 본인이 쌓아 온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며, 총평하자면 그릇에 비해 과분한 재능을 가졌던 인물로 볼 수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제갈각에 대한 평은 상당히 일관적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교만하고 인격이 바르지 못한데다가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끝내 패망한 인물. 그래서인지 2차 매체에서는 제갈각의 객기를 젊은 혈기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앞서 언급했듯이 제갈각은 51세에 죽었다. 숙부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렸을 무렵 겨우(?) 47세였음에도 당시 노신으로 대부분 묘사하는 것을 고려하면 [[삼국지 시리즈]]도 그렇고 제갈각을 너무 어리게 묘사하는 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갈각이 말년에 부린 객기는 초년기의 "혈기"보다는 장년기의 "[[꼰대]]짓"으로 보는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년의 실패로 인해 제갈각의 활약 또한 평가절하되는 감이 있다. 제갈각의 첫 번째 활약으로 평가받는 단양 평정만 해도 호기롭게 적을 쳐부수기보다는 상당히 평화로운 방법을 통해 적의 항복을 받아내는 고단수를 사용해서 얻은 성공이다. 본인의 오만함과 교만함을 뽐내는 여러 서신들이 열전에 첨부되어 있는 덕분에 언제나 이빨까고 나대는 듯한 느낌을 주지만 승상 [[육손]]을 비롯한 수많은 오의 쟁쟁한 인사들을 몰락시킨 [[이궁지쟁]] 시기에 제갈각은 [[손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아들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살아남는 냉철한 모습을 보여줬다. 제갈각이 손화의 처 [[장비(손오)|장비]](張妃)의 외삼촌으로 손화파에서 제갈각만큼 혈연적 관계가 깊은 인물도 많지 않은데 살아남은 것을 보면 베테랑 정치가로의 기량을 선보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탁고대신으로 처음 기획한 군사작전인 동흥제 재축조는 제갈각이 그간 쌓은 군사적 / 정치적 경험을 단번에 방출한 활약이었다. 기록되지도 않을 정도의 소규모 피해에 불구하고 위군의 수만명을 그대로 죽인 성과는 숙부 [[제갈량]]조차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만약에 동흥제 전투에서 돌아온 이후 전장에서 얻은 병 때문에 [[오나라의 요절징크스|갑자기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더라면]] 제갈각은 뻘짓을 거듭하는 말년을 회피하고 뛰어난 전공을 거듭한 인생 전반부가 부각됨으로, "만약에 제갈각이 살아있었다면..."같은 IF들이 논의되었을 여지가 상당히 높다. ~~[[http://cafe.naver.com/booheong/79794|뭔가 위안스카이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제갈각의 삽질로 평가받는 합비신성 전투만 해도 전략 수립 단계에서는 쉽게 까기가 뭐하다. 제갈각은 그냥 본인의 패기를 방출하고 싶은 그러한 욕구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1. 수십 년 이내에 [[조위|위나라]]는 촉오를 아득히 초월할 수 있다.[* 수십 년이고 뭐고 간에 사실 '''[[위나라]]는 원래부터 촉오보다 국력이 강했다.''' 이유는 [[후한 13주]] 중에서 [[양자강]] 이북의 알짜배기 땅은 다 위나라가 먹었기 때문, 행정구역만 봐도 위나라 쪽이 제일 많고 인구비도 밀집한다. 인구도 위 493만 촉 104만 오 256만으로 촉오를 다 합쳐도 위나라 인구를 못 따라온다. 즉 이미 절대적인 국력은 위나라가 촉오보다 더 강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때문에 제갈각 말대로 시간을 끌면 불리해지는 건 촉오였으며 결국 [[촉한멸망전|그의 예견대로]] [[오멸망전|되었다.]] [[영가의 난]] 같은 것도 이 때로부터 수십년 후 이야기이며 그것도 [[서진]] 전역이 혼란에 빠진 틈에 벌어진 일로 이 시기만 해도 [[오호]]들은 위나라 노예나 다름없었다.] >2. 현재 위나라의 지휘관들이 세대교체 덕에 유능하지 못하다. >3. [[동흥제 전투]]의 승리를 등업어서 공격할 필요가 있다. >4. [[사마사]]의 권력은 아직 불안정하다.[* 당시엔 아직 조위 조정에 [[하후현]] 등 사마사를 견제하는 세력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같은 전략적인 문제를 이유로 들었다. 실제로 제갈각이 20만의 대군으로 북벌을 일으키고 [[강유]] 또한 수만을 이끌고 양주를 침공하자 [[위나라]]는 말그대로 혼비백산하여 조정에서는 제갈각의 침공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서주침공이나 대비하려고 했다. 열세의 국력에 불구하고 이같은 판을 획책해서 위나라를 위협한 인물에게 지나친 폄하를 가하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뛰어난 활약의 향연은 말년의 삽질을 커버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제갈각의 합비신성 전역은 결국 20만 대병을 동원했음에도 대패한 패전으로 패배 원인조차 전적으로 자신의 실책에서 비롯한 바였다. 제갈각은 위나라에서 우려한 바와 달리 곧바로 회남으로 침공하기 보다는 합비신성을 포위 / 함락한 뒤, 위군의 전력이 합비신성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서 회전으로 승리한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러나 이 사진이|그러나 오나라는 물론, 삼국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20만의 공성전을 시행하고도 그는 위군의 본대를 제때 끌어내긴커녕 합비신성조차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여름에 출병해 20만의 대군이 피로와 질병에 죽어나가는 피해를 보고도 퇴각마저도 너무 늦어 「경제기」에 의하면 [[문흠]]에게 만명의 수급이 베이는 피해를 입었으며 이를 제하더라도 10만 이상의 군대가 질병에 걸렸고, 전사자들은 땅을 뒤덮었다. 똑같은 패전일지언정 [[조비의 남정|222년의 조비]]나 [[합비 전투(234년)|234년의 손권]]은 군대에 질병이 돌자 즉각 퇴각하여 피해를 최소화했으나, 제갈각은 아집으로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는 더욱 가관으로, 실패의 원인을 남에게 떠넘김은 물론, 올바른 간언을 올린 하급 관원들마저 질타한 [[책임전가]]도 모자라, 친한 사람들은 공직에 넣는 [[부정부패]]를 벌이며 또 다른 원정을 계획하는, 그전까지의 공훈이 없었더라면 가히 난신적자라 불러도 무색치 않을 무리수를 거듭했다. 때문에 이전의 화려한 활약은 사실상 물건너가고 [[손휴]]에게 복권된 이후에도 합비신성에서의 실패와 그 직후의 모습 때문에 공훈을 기리는 비석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들어야했다. 말 그대로 판은 잘 짰으나 본인의 무능함으로 망친 셈이었다. 제갈각은 국제정세를 살펴보고, 정책을 취해 국익을 돕고, 전략을 도모해 적군을 격파하는 등 보좌하는 역할에 뛰어났다. 허나 인격적 결함으로 인한 리더쉽 결여는 그를 부패무능한 사령관으로 만들었다. [[손권]]이 죽기 전에 제갈각이 "스스로 멋대로 할 것"이라는 평가는 제갈각의 한계를 매우 정확히 본 것이다. 제갈각은 고삐를 붙잡아줄 사람이 [[제갈근]]과 [[손권]] 사후에는 사실상 없었고 덕분에 제갈각의 폭주는 동흥제 전투라는 잭팟을 터트렸지만 반대로 합비신성 전투의 실패와 말년의 실책의 향연을 유발했다. 이에 포함되지 않는 오나라 후기 인물이 몇이나 되겠냐만은 만약에 [[손등]]이 황제로 즉위했다면 제갈각은 단점이 부각될 일 없이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숙부와 아버지 못지 않은 걸물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손등은 [[손오사우]]라는 그룹에 말똥드립으로 볼 수 있듯이 제갈각과 거의 격 없는 사이인 데다가 어린 손량과 달리 정통성도 그렇고 나이도 그렇고 제갈각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그런 거 없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제갈각의 주살은 [[오(삼국시대)|오나라]]의 역사가 겉잡을 수 없는 막장으로 흘러나가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유비]], [[조비]], [[조예]]가 죽어서 황제계승을 경험한 촉한, 위와 달리 오나라는 처음으로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 게다가 오나라는 특유의 [[세병제|사병제]]도 덕분에 군주와 장군들간의 주종관계가 중요했고 [[이궁지쟁]]으로 조정이 손화파와 손패파로 갈리는 혼란을 맛본데다가 어린 [[손량]]이 즉위한만큼 그를 보좌해야하는 제갈각의 책임이 막중했다. 오나라는 말그대로 흥망의 갈림길에 있었던 셈이고 제갈각을 대신한 [[손준]], [[손침]]의 집권은 [[국가 막장 테크|오나라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제갈각은 군사적 승리로 중앙정부의 위상을 상승시키려 했다는 평가도 존재하지만[* 가와카쓰 요시오의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합비신성 전투 이후 제갈각의 행동은 득없이 무모할 뿐이라 뭐라 해석하기조차 어렵다. 어쨌든 합비신성 전투 이후에 충분히 재기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르친 일련의 과오와 이른 죽음이 오나라의 쇠망에 일조했다는 점 하나만큼은 명백하다. 뛰어난 기량에 나름대로의 목표의식에 불구하고 일 년도 안 되는 세월에 행한 뻘짓 덕에 이전의 공로와 활약이 부정당하고 [[호부견자]]로 평가받는 것은 어찌보면 가혹하다고 할 수 있지만 충분히 기회가 있었고 그걸 알아차릴 능력도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가혹하게 평해야할지도 모른다. 아버지인 [[제갈근]]이 정치면에서도 나름의 족적을 남기고, 병사들의 목숨을 아끼는 전법을 병행하며, 나라의 건실함을 세우는 데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운 결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권신급 권력을 가졌음에도 [[찬탈]]을 탐하지 않고 오의 팽창과 [[천하통일]]만에 집중한 것은 뭐라 평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이익(실학자)|이익]]은 제갈각을 제갈량 부자 못지 않은 충신으로 평했다.][* 하지만 제갈각의 오만하고 안하무인스러운 성격을 고려할 때 만약 동흥제 전투에 이어서 합비신성 전투까지 성공하여 엄청난 전공을 세워 권력을 공고히 했으면 사마씨와 달리 찬탈의 길을 걷지 않았을 거라는 장담은 할 수 없다.] 겨우 2년 남짓한 세월 동안 집권한 거라. 즉, '''한없이 뛰어난 능력을 인격이 감당 못한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지는지 극명하게 보인 인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