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31보병사단 (문단 편집) === [[5.18 민주화운동]] === ||(상략) (다) 피고인 이희성은 윤흥정 전투병과교육사령관에게 계엄군을 투입하여 조속히 시위를 진압하라고 독려하고, 위 윤흥정은 다시 정웅 31사단장에게 7공수여단 33, 35대대를 광주시내로 투입, 시위를 진압하도록 지시하여,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위 부대원들이 금남로 일대로 출동, 같은 해 5.18. 16:00경부터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시위대를 추적하여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와 시민들을 구분 없이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심지어 머리를 가격하거나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 등을 벗기고 기합을 주기도 하는 등의 과잉진압을 실시하여 광주시민 405명을 연행함과 동시에 8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중략) (마)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는 부근 우슬재와 복평리에 매복 중 5.23. 05:30경과 같은 날 10:00경 두 차례에 걸쳐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여 그 과정에서 별지 (2) 피해자 및 피해상황일람표 순번 제5항 기재와 같이 박영철 등을 각 사망하게 하였다. (중략) 공소외 소준열은 피고인 정호용에게 각 공수여단의 훈련상황에 대하여 질문을 하여 3공수여단이 가장 훈련이 잘 되어 있다는 대답을 듣고 도청진입임무를 3공수여단의 특공조에게 부여하는 등 광주재진입작전의 공수여단별 임무를 결정한 다음 5.26. 10:30 전교사령관실에서 20,31사단장, 3, 7, 11공수여단장, 전교사 예하 보병학교 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압작전 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각 공수여단별로 특공조를 편성하여 전남도청 등 목표지점을 점령하여 20사단에 인계하기로 결정하면서 작전시각은 보안상 추후 통보하기로 한 후, 같은 날 16:00경 광주비행장을 방문하여 3, 7, 11공수여단장에게 5.27. 00:01부로 작전을 개시할 것을 지시하였다. || ||[[https://casenote.kr/%EC%84%9C%EC%9A%B8%EA%B3%A0%EB%93%B1%EB%B2%95%EC%9B%90/96%EB%85%B81892|서울고등법원 1996. 12. 16. 선고 96노1892 판결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류위반(뇌물)]] || ||(상략) (나) 계엄확대와 계엄군의 배치 2군사령부는 1980.5.17. 10:40 광주 소재 8개 전문대학에 31사단병력을 투입하도록 지시하였고, 국무회의에서 19:35계엄확대 선포안이 의결된 직후인 19:40경 전투교육사령부에 대하여 5.18. 00:01 이전까지 시위자를 체포하고, 04:00 이전까지 대학을 점령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5.17. 20:00경 7공수여단에 대하여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를 5.18. 02:00까지 점령하고 04:01까지 소요주모자를 체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계엄군은 전라남도내 16개 대학 및 중요시설을 점령하고, 대학을 수색하여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서만 100여명의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이와 동시에 2군사령부는 1980.5.18. 광주시내 직장예비군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와 탄약을 회수하는 한편, 31사단의 무기고 접근자 발포승인 건의에 대하여 군인복무규율에 따라 지휘관이 재량실시하도록 지시하였다. (중략) 피의자 이○성 계엄사령관은 09:00경 공수여단의 증파를 지시하여, 11공수여단이 광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14:00경 청구외 윤○정 전투교육사령관에게 군병력을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할 것을 명령하였고, 청구외 정○ 31사단장은 14:05경 전남도청, 금남로 지역에 군병력을 투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중략) (바) 5월 21일 상황 육군본부의 증원결정에 따라 20사단 병력 3,000여명이 광주에 증파되었으며, 04:30 육군본부는 계엄사 대책회의에서 폭도소탕작전을 5.23.부터 명령에 따라 실시하되 자위권을 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피의자 소○열이 16:30경 신임 전교사령관으로 부임한 다음 광주사태의 정치적 수습방안을 건의한 청구외 정○ 31사단장으로부터 3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이양받아 공수부대를 직접 지휘하기 시작하였다.(하략) || ||[[https://casenote.kr/%ED%97%8C%EB%B2%95%EC%9E%AC%ED%8C%90%EC%86%8C/95%ED%97%8C%EB%A7%88221|헌법재판소 1995. 12. 15. 선고 95헌마221·233·297(병합) 전원재판부〔취하〕 [불기소처분취소]]] || [[흑역사]]로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된 적이 있다. 단, 당시 사단장이던 [[정웅]] [[소장(계급)|소장]]([[1980년]] 예편)은 강경진압에 부정적이었다. 전남북계엄분소장 및 전투교육사령부(현 [[육군교육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윤흥정 [[중장]][* 다만 이 사람도 군의 강경진압을 반대하다 '''작전 중에''' 소준열 소장으로 교체당한다.]의 출동명령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이후 정웅 소장은 예편 당한 후에 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광주 북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당시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부대와의 오인 교전으로 3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당연하겠지만 5.18유족단체에게는 이 부대에 대한 인식이 썩 곱지는 않다. 광주에서 계엄군으로 진압에 투입되었던 [[제20기계화보병사단]]도 마찬가지. [[전두환]] 대통령이 사단장을 역임했던 [[제1보병사단]]과 마찬가지로 영 좋은 소리 못 듣는 부대. 그나마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보다는 상대적으로 덜한 편인데 앞에 언급한 정웅 소장과의 인터뷰 기사[* 해당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략) 이와 관련하여 광주 사태를 목격했다는 박 모씨(38)는 『광주 사태 때 광주 시민들이 정 장군의 향토(현 지역방위) 사단 병력에는 빵, 음료수 등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공수부대는 얼룩무늬 군복을, 향토 사단은 초록빛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향토 사단 병력은 시민들을 [[과잉진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 향토 사단마저 발포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라고 말했다. (후략)]에 따르면 지역방위사단에게는 심지어 '''빵이나 음료수를 가져다주었다'''고 할 정도. 31사단 병력은 공수부대보다는 온건한 대응을 폈다는 증언도 있고, 지역방위사단이란 특성상 지역민들의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게 이유인 듯 하다. 이것과는 별개로 정웅 소장은 광주에서 영웅으로 불리고 있는데 신군부에서 내린 강경진압을 무시하여 예편 당했었고 이후 [[김대중]]에게 광주의 진상을 폭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13대 총선에서 당선되었을 때는 90%가 넘는 지지율을 받았다. 이는 지휘관의 자질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아무리 상급자의 명령이라도 그것이 부당하면 그것을 무마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양심과 강단이 있느냐, 없느냐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민간인 희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항쟁 3일째인 5월 20일, 이날은 시민들이 시내버스와 택시로 차량시위대를 조직하여 계엄군의 만행에 정면으로 맞선 날이었다. 이 과정에서 광주역과 광주시청 사이에서 작전 수행한 3공수여단을 31사단이 지원했고 그 결과 이들에게 4명이 사망했다. [youtube(SRpsW89pEnI)] [youtube(ofOgSpZbQ-4)] [youtube(mQ3sLpBH4Ns)] [youtube(Fnj9aL7dsoY)] 뿐만 아니라 23일 해남에서 총격 사망자 2명 포함해서, 31사단의 유혈진압으로 총 6명이 사망했다고 5월단체는 밝혔다.([[https://www.mk.co.kr/news/home/view/2005/05/176693/|"광주 향토사단이 5.18 진압중 시민 사살"]]) 이 해남에서의 사망자 수 2명도 축소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실제 해남 사망자는 4~7명으로 추정된다. ([[https://youtu.be/SRpsW89pEnI|"해남군부대서 시신 봤다"...청문회 증언 막아]], [[https://youtu.be/ofOgSpZbQ-4|5.18 당시 해남 우슬재와 상등리에서 일어난 집단총격]]) 당시 23일부터 계엄군이 해남읍 해리와 옥천면 영춘리 경계에 있는 고개인 우슬재를 점령하고 군중과 차량들에게 발포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5.18 민주화운동/전개]] 참고. 게다가 2019년 공개된 군 문서들에 따르면, 5.18 당시 31사단에는 '''[[화염방사기]] 지원대'''가 존재했고, 실제로 화염방사기를 30대 사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https://m.moneys.mt.co.kr/article.html?no=2019120520088013550&code=w1602&MRN#_enliple|‘화염방사기 30대 사용’ 등 5.18 문서 2300여건 공개]]) 22일에는 31사단장 정웅 소장이 무장헬기 조종사들에게 '''"로켓포를 쏴서라도 때려라"'''고 강경진압 지시를 내린 사실이 드러났다.([[https://m.mk.co.kr/news/society/view-amp/2019/06/400119/|'로켓포 쏴서라도 때려라' 전두환 재판에 등장한 군 헬기 기록]]) 이런 것들이 밝혀지면서 31사단이 시위대를 향한 특전사에 비해 학살진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손놓고 보고만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31사단에 의한 사망자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사단장 정웅 소장의 항목을 참고. 다만 당시 정웅 소장은 초기 온건한 대응과, 사건 이후 보안사에서 강도높은 조사 후 강제전역 조치되었으며 전역사유가 "계엄시 근무지이탈"이므로, 정웅 소장이 부재한 상태에서 차상급 지휘관들이 작전을 이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단의 공식 전사자 명부에는 5.18 당시에 사망한 군인 2인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