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1폭격기사령부 (문단 편집) == 역사 == 제21폭격기사령부의 상위 부대인 제20공군은 그 어떤 지휘 구조에도 예속되지 않은 상태로, 합동참모본부 차원에서 [[헨리 아놀드]] 육군항공대사령관이 직접 사령관을 맡아 지휘했다. 이는 [[B-29]]가 전술 폭격 임무에 사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제20공군은 제20폭격기사령부를 중국에 전개했지만, 중국에서의 [[일본 본토 공습]]이 사정상 여의찮던 상황이었다. 때마침 [[태평양해역군]]이 사이판을 [[사이판 전투|탈환]]하자, 제20공군도 마리아나 제도에 B-29를 집결시키면서 1944년 3월에 창설된 제21폭격기사령부가 마리아나 제도에 전개되어 일본 본토를 공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 상공의 제트기류를 뚫고 고고도에서 정밀폭격을 하는 일은 그 당시 기술로는 사실상 불가능했고, 육군항공대는 무려 약 30억 달러[* [[VT 신관]]을 개발하는데 약 10억 달러, 그 [[맨해튼 프로젝트]]에 약 20억 달러를 사용했다. B-29를 위해 정말로 막대한 금액을 사용했던 상황.]를 사용한 B-29가 애물단지가 되는 상황을 피하고자 중국에 있던 [[커티스 르메이]] [[소장(계급)|소장]]을 마리아나 제도로 불러들였다. 르메이 소장과 그의 참모였던 [[로버트 맥나마라]] [[대위]]는 전술을 저고도 융단폭격으로 전환했고, 전술을 바꾼 이후의 첫 출격인 [[도쿄 대공습]]에서 그동안 육군항공대가 기대해 오던 전과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이에 고무된 제21폭격기사령부는 나고야, 고베, 오사카를 불태워 버렸고, 잠시 [[오키나와 전투]]를 지원했다가 다시 본연의 임무로 돌아와서 더 이상 일본에 폭격할 대도시가 없을 정도로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제21폭격기사령부는 일본의 웬만한 도시와 산업 시설을 모두 폭격했고, 그 외에도 일본의 항만 도시에 기뢰를 부설해 일본의 원자재 수입량을 80% 이상 감소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전쟁을 끝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역시 제21폭격기사령부에 배치된 제509혼성전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제21폭격기사령부는 태평양전략공군(United States Strategic Air Forces in the Pacific)의 창설에 이어 1945년 7월에 제20공군으로 재편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