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태춘 (문단 편집) === [[아! 대한민국#s-8|아, 대한민국]]... 그리고 검열과의 전쟁 === [[파일:external/deecompany.cafe24.com/1045651_500.jpg|width=350]] [* 이 앨범 재킷은 당시 발매되었던 재킷의 형태가 아니다. 이 앨범 재킷은 1996년과 2003년에 재발매된 CD의 재킷이며 실제 앨범의 재킷은 이 이미지의 가운데에 있는 테이프 케이스 형태였다. 당시에는 아직 CD가 보편화되지 않았고, 불법으로 제작되는 앨범이 제작사를 섭외하여 LP로 제작되기는 당연히 불가능하므로 당시 이 앨범의 대부분은 테이프 형태로 판매되었다.] 정태춘, 아, 대한민국... [youtube(B1ZAVFLS3eU)] [include(틀: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순위=76,연도=1998,순위2=80,연도2=2007)] [include(틀:100BEAT 선정 90년대 베스트 앨범, 순위=63)] 1990년 발매(?)된 <아, 대한민국...>은 공윤측의 심의결과 및 가사 수정지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제작되어 배포된다.[* 당초 공윤 심의 결과 <버섯구름의 노래>는 남북통일, 핵전쟁, 평화 등 관념 혼재로 인한 난해함, <형제에게>는 부정적인 내용 강조, <우리들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을 이념적 사회문제와 결부시켰다는 이유로 [[https://web.archive.org/web/20030911105828/http://freedom.jinbo.net/kukbo/text/t7/express5.html|수정대상이었다.]]] 단, 당대의 법률 체계를 거부한 음반이므로 공식적인 유통 경로를 거쳐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공연장과 대학가를 중심으로 판매되었다.[* 당시에는 대학마다 존재하는 소위 사회과학서점에서 운동권 계열 음반(정확히 말하면 복제 테이프)을 흔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사실 한국의 음반 생산 체계가 지나치게 권위주의적 국가 통제 하에 있어서 그렇지 --[[소련]]하고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바로 십수년전 영미권에서 [[인디]]라 불리는 생산방식과 다를바 없었다. 당시 인디밴드들도 자체 레이블을 만들어서 자체적으로 생산한 음반을 공연장과 소규모 레코드점에서 팔았다.] 당시 정부와 여당은 같은 해 기존의 '음반에 관한 법률'을 폐지하고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을 새로 상정하여 1991년 2월 8일 국회 본회의를 거쳐 발효시킨다. 정태춘은 1991년 1월 29일 구성된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 의장이 되어 이 사전검열 제도와의 전면전에 돌입한다. '아, 대한민국...' 음반의 가장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음악에 대한 사전검열이라는 제도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저항을 시작한 최초의 음반이라는 점이다. 또한 이 음반은 한국 음악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이 음반은 당시 대중가요계와 민중가요계, 즉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소위 '운동권 가요'를 제작하고 배포하는 이들에게 동시에 [[충공깽]]을 선사했다. 이 음반의 노래들은 정태춘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하되, 담겨진 메시지는 강렬했다. 어떤 이에게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통쾌한 메시지였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천재적인 풍자시로 추앙되었다. 당시까지 대중가요계에 형식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소속되어 있던 음악가 중에서 이정도 수준으로 저항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제시한 이는 전무후무했다. 또한 민중가요의 측면에서는 예술적 수준의 격을 몇 차원 넘어서는 노래들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민중가요계의 메이저였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나 '꽂다지', '조국과 청춘' 등도 민중가요 자체가 가지는 한계, 즉 메시지의 전달성을 강조함에 따라 희생되는 예술적 수준의 저하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거나 그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즉,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려지고 유통되던 노래들은 집회를 위한, 혹은 운동권에 참여하는 이들의 정신적 고취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메시지 전달과 대중의 인식 개선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노래들이 대개 그렇듯이 예술성의 수준은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가사는 지나치게 직설적이었고 일반 대중이 향유하는 언어와 동떨어진 그들만의 어휘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그 가사에 붙여지는 멜로디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저항하는 대상이 선호하는 군가나 행진곡 풍이 많았다. 심지어 어떤 민중가요들은 그 의미에 맞지 않게 일본 군가들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요나누키 음계'를 기반으로 하거나, 희망새나 천리마[* 경기남부총련 노래단의 명칭.] 같은 강성 NL 노래패들은 '절가 형식'과 '주체창법'이란 북한식 음악체계를 시도하며 '조선', '미국놈' 등 북한에서나 쓸법한 용어까지 써서 일반 시민들에게 반감을 사기도 했다. 어찌 보면 그 창작자들 중 상당수가 음악을 전공한 프로페셔널 음악가가 아니라 조금 높은 수준의 관심 및 재능을 가진 대학생들 내지는 젊은이들이었을 뿐이니 당연한 결과이긴 하지만, 그런 가운데 등장한 정태춘의 노래들은 음악적 수준에서도 메시지의 질적 수준에서도 [[넘사벽]]의 수준이었던 것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특히, 그가 음악 활동을 통해 일관적으로 견지해 온 전통적 요소들은 형이상학적 수준의 이념적 지향, 혹은 이상적 지향에 따라 도입했던 어설픈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에 기반하여 체화된 것이었기에 고작 대학 생활 동안 탈춤 몇 번 추고 풍물 공연 몇 번 하고 졸업한 뒤 대부분 일반 직장인이 되어 다시는 그러한 문화와 접할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대학생 창작가들의 창작물과는 격이 달랐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이 음반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도 존재한다. 그 비판들은 대부분 그와 그의 음악이 가지는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경계선, 혹은 여집합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음반은 다수 대중이 선호하는 것과는 멀어져 선동적 메시지들을 담은 또다른 운동권 가요에 불과하다는 대중가요 측면에서의 비판과 그 비판의 내용과는 역설적이게도 메시지가 직접적이지 못하고 정서에 호소하는 지나치게 감성적인 곡들이 많다는 점, 다시말해 운동권 집회에 적절하지 못하다는 민중가요 측면에서의 비판이 동시에 존재했다. 전자의 경우에는 당대 격렬했던 정치, 사회적 흐름과 전혀 관계없는 듯이 아무런 책임감도 의무감도 느끼지 못하고 사랑타령이나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후자의 경우에는 그들이 저항했던 대상들과 방향만 다를 뿐 똑같이 획일화된 사고와 태도를 가졌다는 점에서 비판의 정당성이 상당히 결여된다라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이 음반이 당시 음비법상 불법으로 규정된 채 발매됨으로써 그의 디스코그래피는 다소 난해해지기 시작한다. 1996년 정식발매시 이 음반은 '정태춘 5'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발매하였는데, 이 5라는 숫자가 참으로 애매모호한 순서였다. 발췌곡집 등의 컴필레이션 성격의 음반을 제외한 정규음반으로 따지면 이 음반은 7집이 되는 것이 맞다.[* 실제로 포털사이트 등 여러 곳에서는 이 음반이 7집으로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앞서 발매된 6장의 앨범 중 박은옥과 함께 한 음반을 제외한 순수 정태춘 홀로의 음반을 따진다면 이 음반은 4번째 음반이 된다. 따라서 이 음반에 왜 '5'라는 숫자가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근거가 애매모호하다.[*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4를 빼고 계산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파일:external/cmsimg.mnet.com/132142.jpg|width=350]] 정태춘, 박은옥, 92 장마, 종로에서 [include(틀: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순위=91,연도=1998,순위2=63,연도2=2007,순위3=29,연도3=2018)] [youtube(M1DZvv4ekVI)] '92년 장마, 종로에서', 2019년 KBS 열린 음악회 '92년 장마, 종로에서'에 대해서는 [[92년 장마, 종로에서|항목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