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태춘 (문단 편집) === 고난과 방황의 시기 ===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두 번째 음반을 준비하게 되는데, 첫 음반의 성공을 지켜본 서라벌 레코드는 그에게 선곡의 권한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대중적 성공에 있어서는 패착이었다. [[파일:external/cmsimg.mnet.com/38681.jpg|width=350]] 정태춘 2집,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 정태춘의 2집은 음악적 수준 그 자체로는 실패작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대중적으로는 실패작이었다. '사망부가'나 '탁발승의 새벽노래' 등의 수록곡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정서적인 특색이 더욱 강조되고 깊이가 있는 것이었으나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방송국 관계자들에게는 뻣뻣하고 싸가지 없으며 어딘가 불순한 놈으로 인식된 상황에서 음반의 성공은 요원한 일이었다. [[파일:attachment/정태춘/cry.jpg|width=350]] 정태춘 3집, 우네 2집의 실패에 이어 3집의 결과는 더욱 비참했고 시장에 음반이 제대로 깔리지도 못하게 된다. 3집의 노래들 역시 정태춘 특유의 정서는 더욱 강조되었고, 반주 중 상당수를 국악으로 하는 등 실험적인 요소도 많았던 음반이다. 하지만, 결과는 대 실패.[* 3집 수록곡 중 '장마'는 이듬해(1983년) [[이수만]]이 '한 송이 꿈'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게 된다.] 연이은 음반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는 경제적으로도 꽤나 궁지에 몰리게 된다. 저작권에 따른 수입 체계나 음반 유통의 정확한 통계에 따른 인세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 대중음악인들의 수입 체계는 꽤나 허술해서, 레코드사에서 계약금조로 주는 돈에다가 월급조로 주어지는 생활비가 일종의 음반과 공연에 대한 정산이었던 셈인데, 이 시기 이러한 생활비 지급이 중단된다. 음반사의 경영난이라는 핑계가 따라왔지만 그야말로 핑계일 뿐, 누가 봐도 저조한 흥행에 대한 당연한 댓가였다. 1980년대 초반의 이 시기는 그의 음악활동 기간 중 가장 방황이 심했던 시기였다. 연이은 음반의 실패로 인한 경제적 곤궁함, 결혼을 하고 자녀까지 낳아 기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연예인'이 아닌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이 때 손을 내민 것은 당시 메이저 레코드사 중 하나였던 지구레코드. 지구레코드가 제시한 조건은 4년 전속 계약으로 800만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